<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남편 | 스타브라키오스 |
[clearfix]
1. 개요
동로마 제국 니키포로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스타브라키오스의 황후.2. 생애
콘스탄티노스 6세의 모후이자 동로마 제국의 여제 이리니의 사촌. 그녀는 본래 다른 남자와 약혼했지만, 807년 니키포로스 1세가 그녀에게 신부 경연대회에 참가하도록 강요했다. 스타브라키오스는 신부 후보 중 테오파노를 선택했다. 이로 인해 교회의 반발이 일었지만, 테오파노는 약혼을 취소하는 데 동의하였다.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그녀는 807년 12월 20일 스타브라키오스와 결혼하여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수여받았다고 한다. 그 후 남편이 시아버지와 공동 황제로서 활동하는 동안, 그녀 역시 정치에 상당히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811년 5월, 니키포로스와 스타브라키오스는 휘하 장수들과 함께 불가리아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1년에 걸쳐 철저한 준비를 한 제국군은 승승장구하며 불가리아를 밀어붙였다. 당황한 불가리아 국왕 크룸은 강화를 요청했지만 이번 기회에 불가리아 왕국을 아예 멸망시키고 싶었던 니키포로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811년 7월 26일, 플리스카 근교의 좁은 협곡을 지나던 제국군은 불가리아군의 습격을 받았다. 니키포로스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사했고 그의 해골은 크룸의 술잔으로 쓰였다. 한편 스타브라키오스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그 과정에서 척추가 골절되고 다리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스타브라키오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후 황제로 선포되었다. 하지만 부상이 워낙 심각해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국가 비상 사태를 극복할 적임자로 니키포로스 1세의 사위인 미하일 1세 랑가베스를 추대하려 했다. 여기에 미하일의 아내이자 스타우라키오스의 누나 프로코피아도 스타브라키오스를 설득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미하일을 매우 싫어했고 오히려 자기 아내인 테오파노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다. 여기엔 테오파노의 의중이 상당히 반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키포로스 등 정계의 핵심 인사들은 이리니에 이어 또다른 여제를 맞이할 생각이 없었다. 죽어가는 황제가 동의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 811년 10월 2일에 마하일 1세 랑가베스가 황제가 되었다. 이후 원로원 의원들은 스타우라키오스를 강제로 수도원에 보내 삭발식을 거행하게 했다. 한편 테오파노도 황후 직임에서 물러났지만, 미하일 1세는 그녀를 헤브라이카에 있는 좋은 집에서 살게 해줬고, 나중에는 수녀원을 제공하여 수녀로서 살게 했다. 그후 스타브라키오스는 석 달만인 812년 1월 11일에 테오파노의 집에서 사망했다. 이후 테오파노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