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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Justyna, Justina, Justine영미권의 여성 인명.
1.1. 실존 인물
1.1.1. 로마 제국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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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388년 |
아버지 | 유스티우스 |
형제자매 | 콘스탄티우스, 케레알리스 |
남편 | 마그넨티우스, 발렌티니아누스 1세 |
자녀 | 발렌티니아누스 2세, 플라비아 갈라, 그라타, 유스타 |
유스티나는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피케눔 총독 유스티우스의 딸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유스티우스는 딸이 태어날 때 자신의 오른쪽에서 자주색 빛이 비추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일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유스티우스의 후손이 황제가 될 거라고 여기고 유스티우스를 암살했다고 한다. 유스티나에게는 콘스탄티우스와 케레알리스 형제가 있었다. J. 루제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1958년)에서 세 남매 모두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외척인 네라티우스 가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네라티우스 가문은 4세기 초 주목할 만한 인물 4명을 배출했다. 먼저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아내이자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의 어머니 갈라를 들 수 있으며, 갈라의 오빠들은 358년 집정관을 역임한 나에라티우스 케레알리스, 365년부터 368년 사망 때까지 이탈리아의 총독이었던 불카키우스 루피누스이다.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율리아누스 황제 시절 로마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praefectus urbi: 로마 시장)를 역임한 막시미누스의 어머니도 이 가문 출신이라고 밝혔다. 역사가 티모시 반스는 유스티나가 콘스탄티누스 1세의 큰아들 크리스푸스의 손녀, 또는 증손녀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콘스탄티우스 1세의 아들 율리우스 콘스탄티누스가 유스티나의 선조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추정한다. 유스티나의 어머니는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갈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추정된다.
유스티나는 350년 콘스탄스 황제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마그넨티우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마그넨티우스는 353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파견한 토벌대에게 패하여 목숨을 잃었고, 유스티나는 과부가 되었다. 그 후 370년경, 그녀는 서방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재혼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세베라와 유스티나는 서로 아는 사이었는데, 어느 날 함께 목욕을 하던 중 유스티나의 아름다운 몸매에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세베라는 남편에게 유스티나의 몸매를 칭찬했고, 발렌티니아누스는 도대체 얼마나 예쁜 아가씨인지 보고 싶어져서 직접 가서 확인했다. 그는 유스티나를 보자마자 첫 눈에 반했고, 세베라와 유스티나를 모두 아내로 삼기로 마음먹고, 모든 성읍에 "누구든지 2명의 합법적인 아내를 가질 수 있다"라는 내용의 법률을 반포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중혼이 합법화되었다는 증거가 없다며, 발렌티니아누스가 아내와 이혼하고 유스티나와 재혼한 게 사실과 가깝다고 본다. 발렌티니아누스가 마리나 세베라와 결별하고 유스티나를 택한 건 로마에서 명망높은 그녀의 가문을 눈여겨봤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스티나는 발렌티니아누스와의 사이에서 발렌티니아누스 2세, 플라비아 갈라, 그라타, 유스타를 낳았다. 그중 그라타, 유스타는 392년까지는 언급되었지만 결혼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볼 때 요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375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유스티나는 남편이 사망했을 때 시르미움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현지 장군 메로바우데스는 발렌티아누스 2세를 황제로 옹립했고, 그녀는 곧바로 아들을 데리고 밀라노로 이동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그라티아누스가 트리어에서 서방 황제로 등극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라티아누스는 불과 4살 밖에 안된 이복동생과 쓸데없이 다투기보다는 양보하기로 하고 발렌티니아누스가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일리리쿰의 황제가 되는 걸 용인했다.
그 후 유스티나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섭정을 맡아서 아들을 대신해 기본적인 잡무를 맡았고, 제국 서방의 전반적인 통치는 그라티아누스가 맡았다. 그러던 383년, 그라타이누스가 리옹에서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보낸 암살자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막시무스는 이탈리아로 쳐들어가려 했으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발렌티니아누스의 권리를 인정해준다면 서방의 황제로 인정해주겠다."는 제안을 해오자 이를 수락하고 384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 테오도시우스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로서 막시무스는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의 황제가 되었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일리리쿰의 황제 지위를 유지했다.
유스티나는 아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였다. 그래서 확고한 정통교회 신자였던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오와 대립했다. 서기 385년, 암브로시오는 황실의 부활절 기념을 위해 성 포르시아노 성당을 양도하라는 유스티나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격노한 유스티나는 암브로시오를 체포해 황궁으로 소환하려 했다. 그러나 병사들이 밀라노 성당에 침입해 암브로시오를 체포하려 하자 민중이 소동을 일으켰고, 유스티나는 어쩔 수 없이 명령을 철회했다. 얼마 후, 유스티나는 암브로시오를 추방하려 했다. 그러자 암브로시오의 지지자들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황제군과 대치했다. 암브로시오는 자신이 고대 순교자들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며 유스티나의 전횡에 저항할 뜻을 표명했다. 이 소식을 접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중재에 나섰고, 결국 유스티나는 암브로시오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이후 암브로시오의 정계에서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해졌다.
한편, 유스티나는 아들의 명의로 로마에 있는 모든 다신교 사원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모독을 금지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에 고무된 이교도 원로원 의원들은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를 대표로 한 사절단을 구성해 밀라노에 있는 황제에게 보내 그라티아누스가 382년에 철거했던 승리의 제단을 복원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는 암브로시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그 요청을 거절했고 로마인들의 전통 의식을 유지하자는 심마쿠스의 호소를 거부했다.
387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마그누스 막시무스 사이의 휴전이 끝났다. 막시무스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포 계곡으로 들어가 밀라노를 위협했다. 발렌티니아누스와 유스티나는 수도를 떠나 일리리쿰의 수도이자 테오도시우스의 거처였던 테살로니키로 갔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유스티나는 딸 플라비아 갈라에게 테오도시우스 1세 앞에서 그의 동정심에 호소하도록 하였다. 갈라는 아름답고 여린 용모의 소유자였고,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녀에게 홀딱 반했다. 유스티나는 이 점을 잘 활용하여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막시무스를 타도하고 아들을 복위시켜달라고 부탁했다. 테오도시우스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387년 말 갈라와 결혼했다.
388년 7~8월, 테오도시우스 1세는 프랑크족 출신의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 장군이 지휘하는 로마군을 파견해 막시무스를 공격했다. 막시무스는 테오도시우스의 강력한 군대에게 패배하고 도망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서방의 황제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스티나는 밀라노로 돌아간지 얼마 안가서 사망했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아르보가스트를 발렌티니아누스의 수호자로 임명하였으나, 아르보가스트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얼마 안가서 심각한 갈등을 벌였고, 결국 392년 5월 15일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비엔나 별장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아르보가스트는 황제가 자살했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당대 기록은 아르보가스트가 직접 황제를 죽였거나 근위대를 매수해 시해하게 했다고 추정한다. 이리하여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유스티나가 사망한지 3년여 만에 무너졌다.
1.2. 가상 인물
1.2.1. 명일방주의 캐릭터 파투스의 본명
자세한 내용은 파투스 문서 참고하십시오.한국서버에선 저스티나로 표기했으나, 일본서버에선 유스티나(ユスティナ)로 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