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라틴어: Publius Rutilius Ruf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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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75년 이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시아 속주 스미르나 |
지위 | 에퀴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아버지) 루틸리아(누이) 리비아(아내)[1]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누두스(아들)[2] 아우렐리아 코타(조카)[3]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05년 |
전임 |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
동기 |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 |
후임 |
가이우스 마리우스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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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연설가, 역사가. 아내 리비아의 조카인, 처조카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개혁과 에퀴테스 견제 입법제안 등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누이 루틸리아가 종신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외할머니였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외종조부로 유명하다.기원전 105년 집정관에 선출된 뒤, 로마군 훈련체계와 방법을 개선하고 군율 중 악습 철폐 개혁을 벌였다. 아시아 속주에서 속주민들을 착취하는 세리, 푸블리카니들을 감찰 후 징벌했다가, 포풀라레스와 에퀴테스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모함을 받아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당해 아시아로 망명했다가 추방지에서 사망했다.
2. 생애
에퀴테스 가문인 루틸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아버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는 부유한 상인이었다고 전해진다. 누이 루틸리아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결혼하여, 딸 아우렐리아 코타를 낳았고, 아들로는 기원전 75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기원전 74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기원전 65년 집정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를 낳았다. 다만 일부 주장에 따르면 이중 아들로 알려진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루푸스의 조카 아우렐리아 코타의 사촌이라는 주장이 있다. 누이 루틸리아의 딸인 아우렐리아 코타가 종신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서, 카이사르는 루푸스의 외종손이 된다. 참고로 조카 아우렐리아 코타의 두 딸 대 율리아, 소 율리아[4]는 각각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5], 퀸투스 페디우스[6]의 어머니와 아우구스투스, 소 옥타비아의 할머니이므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역시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와는 멀게나마 혈연관계가 있는 사이이다. 또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로마 제국 최초의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의 법적 할아버지이며 혈연상 외종조부가 된,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할머니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아내 리비아의 조카이므로, 아우구스투스 일가는 모두 루틸리우스 루푸스 부부와도 혈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7]루푸스는 스토아 학파에 속하는 로도스의 파니티오스와 아파메이아의 포시도니오스 밑에서 공부하면서 그리스 문학에 통달했으며, 기원전 133년 집정관이자 폰티펙스 막시무스이며 저명한 법학자였던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의 지도 아래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많은 소송에 변호사로 참여해 연설했지만 연설가로서 호평을 받지 못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의 연설이 엄격하고 건조하며 한편으로는 가혹한 면이 많은 등 스토아 학파의 색깔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논리력이 뛰어났음에도 이성적이고 감정절제가 심하다고 인식된 나머지, 대중에게 호평은 받지 못했다고 평했다.
기원전 134~133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지휘 아래 누만티아 전쟁에 참여했다. 이후 수십 년간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다가 기원전 119년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와 함께 법무관을 맡았다. 기원전 116년에 메텔루스와 함께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메텔루스가 당선되는 동안 본인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에게 패배했다. 이후 스카우루스가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나눠줬다고 고발했지만 패소했다. 스카우루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같은 혐의로 고발했다. 스카우루스가 이 재판에서 장부 기록에 적힌 "AFPR"이라는 문자가 "actum fide P. Rutili(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에게로)"를 의미하며 이는 그가 돈을 받아먹은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하자, 그는 그 문자는 다음을 의미한다고 답했다.
"아이밀리우스는 해냈고 루틸리우스는 엮었다.(Aemilius fecit, plectitur Rutilius)"
그는 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유구르타 전쟁을 치르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 휘하 장교로 복무해 요새화된 숙영지를 건설하고 보밀카르가 이끄는 누미디아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얼마 후 메텔루스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갈등이 불거졌고, 그는 메텔루스에 의해 부사령관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107년 마리우스가 로마로 가서 집정관에 선출된 후 메텔루스의 지휘권을 확보하자, 메텔루스는 극도로 화가 나 마리우스가 오기 전에 군영을 떠나면서 그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그는 마리우스가 올 때까지 군대를 이끌었다가 마리우스가 도착하자 지휘권을 양도했다.
기원전 106년 메텔루스와 가까운 사이였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함께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카툴루스는 낙선했지만, 그는 노부스 호모인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기원전 105년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막시무스가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전임 집정관이자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총독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함께 킴브리족에게 완패했을 때, 그는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로마를 수비했다. 이때 그는 검투사를 가르치는 교관들을 고용해 군인들에게 무기 사용법을 훈련시켰다고전해진다. 이듬해 킴브리족으로부터 로마를 지키기 위해 집정관에 선출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루틸리우스의 군대가 잘 훈련된 것을 보고 이들을 주력군으로 삼았다. 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으로부터 원로원 최종결의를 선고받은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처단하기 위해 결집한 귀족 무리에 참여했다.
기원전 90년대에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의 부총독으로 부임했다. 스카이볼라는 갈수록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를 의식해 아시아 속주들의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기 위해 가능한 한 선정을 베풀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전 총독들의 묵인 하에서 막대한 돈을 속주민들로부터 착취하던 세리들을 법에 따라 엄중히 다스렸다. 세리와 속주민간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 후자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리고 세리들에게 착취한 돈을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특히 밀린 세금을 받아낸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함부로 살상한 세리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또한 로마인과 관련이 없는 경우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고유의 법에 따른 재판을 받는 것을 보장한다는 칙령을 반포했으며, 모든 관료들은 임지로 부임할 때 속주민들에게 여행 비용을 물릴 수 없고 오로지 자신의 재산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칙령도 내렸다.
루푸스는 이처럼 속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스카이볼라를 충실히 보필했다. 그러나 스카이볼라는 모종의 이유로 9개월만에 총독에서 물러났고, 그는 후임자가 올 때까지 통치를 대행했다. 기원전 92년 로마로 돌아온 루푸스는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당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세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던 로마의 에퀴테스들이 복수를 꾀했지만, 명망높은 가문 출신에 따르는 이들이 많은 스카이볼라를 직접 공격하기엔 부담이 크니 그를 타겟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대 최고의 웅변가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는 그를 위해 변호하겠다고 나섰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스스로 변호하기로 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로마 관습에 반하여 법정 앞에서 머리카락과 수염을 기르지 않았고, 배심원들의 동정심을 사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무고하다는 증거를 무미건조하게 늘어놓고 자신에게 어떤 비방이 가해지든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무죄라는 증거는 차고 넘쳤지만, 사전에 고발측에게 매수된 판사는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한다고 선언했다. 루푸스는 먼저 미틸리니로 갔다가 스미르나로 가서 아시아 속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그는 나중에 스미르나 시민권을 받고 안락하게 살았다. 훗날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르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로마로 함께 돌아가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스미르나에 남았다. 많은 학자들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기원전 91년에 호민관을 맡아서 법정 개혁을 단행한 배경에는 루푸스가 추방당한 사건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키케로는 기원전 78년에 스미르나에 여전히 살아있던 그를 방문했으며, 기원전 75년 경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를 "저명한 고인"으로 언급했다. 이로 볼 때 기원전 75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스미르나에 거주하는 동안 자서전과 로마의 역사를 그리스어로 집필했다고 전해지지만 현존하지 않으며, 단지 다른 저자들이 인용, 발췌한 부분만 전해진다.
[1]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여자형제로,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형제의 고모.
[2]
원로원 의원을 지낸 것 외에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후손 이름은 루틸리우스 크라수스라는 원로원 의원이었다고 한다.
[3]
종신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로, 카이사르의 누나인
아우구스투스의 할머니 율리아의 어머니이다.
[4]
종종 율리아 카이사리스로도 알려져 있다.
[5]
카이사르의 조카로, 외삼촌 카이사르를 따르다가 카이사르 암살 이후 외삼촌 복수를 위해 가장 적합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지한 원로원 의원이다. 이부동생 퀸투스 페디우스와 함께 외삼촌 카이사르에게 상속받은 카이사르 재산의 4분의 1을 모두 포기해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 물려주고,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아들로 정통성을 확보하는데 힘을 줬다. 안토니우스 지지자였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도 호의적이었다. 따라서 안토니우스가 아내
소 옥타비아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할 때 본인의 딸 뻘 조카를 버린 일에 분노해 사실상 지지를 철회했고,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가 군대를 보내달라고 사절을 보내자 그 자리에서 죽이면서, 공식적으로 외삼촌의 양자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 지지를 선언했다. 이후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요청으로 옥타비아누스 군에 합류해, 옥타비아누스를 도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를 멸망시켰다. 안토니우스를 지지할 때부터 소 옥타비아, 옥타비아누스 남매의 어머니 아티아와 친척이고 이들 남매를 아껴 살아생전 유언장을 통해, 외삼촌의 양자로 혈연상 친척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상속자 자격으로 재산을 물려줬다.
[6]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의 이부동생으로, 이부형 스카르푸스와 달리 외삼촌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 유언장을 통해 이모의 외손자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로 발표될 때부터 옥타비아누스를 집안어른으로 후원한 원로원 의원이자 집정관이다. 2차 삼두정 시작 전부터 지지기반이 취약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아들이라는 정통성을 심어 주고자, 카이사르에게 상속받은 재산을 포기해 옥타비아누스에게 넘겼다. 2차 삼두정 시작 전후로 병사했다.
[7]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취한 로마군 훈련 개혁 및 악습 시정, 지방 세리 감찰은, 루푸스와 가족관계를 멀게 나마 맺게 된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