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에부르누스 라틴어: Quintus Fabius Maximus Ebur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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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노체라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친조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양조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아버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16년 |
전임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 |
동기 |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게타 |
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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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아버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는 본래 기원전 169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아들이었다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에게 입양되었다. 이후 기원전 142년 집정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141년부터 140년까지 먼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아 루시타니아 전쟁에 참전했지만 비리아투스가 이끄는 루시타니아군에게 연이어 패한 뒤 비리아투스를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자"로 인정하고 루시타니아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며, 그 대가로 루시타니아인들이 더이상 로마의 지배를 받는 히스파니아 영토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맺었다.고대 화폐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는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와 함께 기원전 134년에서 기원전 124년 사이에 공동으로 화폐를 주조했다고 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기원전 132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가 제1차 노예 전쟁을 진압할 때 사위인 '퀸투스 파비우스'가 타우로니움 수비를 맡았다가 노예 반란군의 급습으로 그곳을 잃은 뒤 호된 질책을 받고 시칠리아를 떠났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116년 집정관과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121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라고 주장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코그노멘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쪽이 옳은 지 알 수 없다.
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180년 최고 행정관 간의 취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에 따라 기원전 119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17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당대의 탁월한 웅변가이자 정치인으로 각광받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가 집정관으로 당선될 거라 여겼지만, 그가 스카우루스를 꺾고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게타와 함께 기원전 116년도 집정관에 당선되자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가 집정관으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108년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게타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에우트로피우스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는 감찰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어느 유부녀와 간통한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감찰관 권한으로 추방한 뒤 나중에 아들이 가족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권한으로 죽였다고 한다. 키케로에 따르면 기원전 104년 법무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에 의해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자 노체라로 망명해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