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라틴어: Manius Acilius Glabri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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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조부) 가이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아버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1년 |
전임 |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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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승리했다.2. 생애
평민 가문인 아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조부의 프라이노멘은 루키우스이고 아버지는 가이우스라고 한다. 기원전 201년 호민관을 맡은 그는 당해 집정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밀어내고 자신이 아프리카 원정군 사령관이 되려 하자 동료 호민관 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와 함께 반대했다. 렌툴루스는 원로원으로부터 해상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그가 로마를 떠나기 전에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정부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무산되었다.기원전 200년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고 나라에 큰 일이 생겼을 때 이에 해당하는 예언을 찾아내고 해석해서 원로원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은 '데켐브리 사크리스 파시운디스(decemviri sacris faciundis: 10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의 일원이 되었으며, 기원전 197년 평민 조영관을 맡아 동료 조영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와 함께 로마 경기를 7일 연속 개최했고, 벌금으로 확보한 자금을 통해 수확과 다산의 여신 케레스, 다산과 비옥한 힘의 신 리베르, 포도 재배자와 포도주 양조자들을 돕는 여신 리베라의 구리 조각상을 세웠다.
기원전 196년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와 함께 법무관에 선임되어 시민과 외국인간의 사법 사건을 담당했다. 에트루리아에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2개 군단을 이끌고 에트루리아로 진군해 노예 집단을 무찌르고 많은 포로를 확보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생포된 노예들은 채찍형을 당한 뒤 지도자는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나머지는 원주인에게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기원전 192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에게 낙선했다. 기원전 191년 다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여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와 함께 당선되었다.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가 로마의 지배로부터 그리스를 해방시키겠다고 선전하며 발칸 반도에 상륙했고 아이톨리아 동맹이 이에 호응했다. 이에 원로원은 글라브리오를 사령관으로 삼아 안티오코스 3세를 막게 했다.(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그는 보병 20,000명, 기병 2,000명, 코끼리 15마리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브룬디시움에서 발칸 반도로 건너갔다. 여기엔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대 카토가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서 동행했다.
글라브리오는 테살리아의 여러 도시를 장악한 뒤 남쪽으로 진군하다가 테르모필레 계곡에서 안티오코스 3세와 아이톨리아 동맹 연합군에 저지되었다. 그는 카토와 플라쿠스에게 각각 분견대를 맡겨 우회로를 통해 적의 후방으로 접근하게 한 뒤 자신은 정면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가 한창일 때 카토의 분견대가 고지를 점거한 뒤 배후를 급습하자, 적군은 전의를 급격하게 상실하고 도주했다.( 테르모필레 전투) 리비우스에 따르면, 안티오코스가 끌고온 장병들 중 500명만 살아남아 왕과 함께 에페수스로 도주했다고 한다. 그 후 글라브리오는 포키스, 보이오티아, 에우보이아 등 여러 도시의 복종을 받아내고 그들을 온건하게 대했다. 다만 미네르바 성소에 안티오코스의 동상을 세운 코로니 주민들에게 무거운 벌금을 매겼다.
이후 아이톨리아 동맹 쪽으로 눈길을 돌린 그는 나프팍토스 시를 포위 공격했다. 2개월간 포위전이 이어지던 중,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포위된 자들이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성벽 바로 앞에서 걸어갔다. 성벽에 모인 군중은 그에게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플라미니누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손짓했지만, 글라브리오에게 로마의 동맹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가 그럴듯한 구실로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는 동안, 포위전에서 자신의 힘을 낭비할 가치가 없다고 설득했다. 글라브리오는 이에 설득되었고, 그의 중재에 따라 나프팍토스 주민들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뒤이어 아이톨리아 동맹에게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끊고 로마의 보호를 받으라고 권고했으나 무산되자 라미아를 기습적으로 공략한 후 암피사를 포위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기원전 191년 새 집정관에 선임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새 지휘관으로 부임하자 그에게 군대를 맡기고 로마로 돌아왔다.
그 후 원로원의 허락을 받아 개선식을 거행하고 집정관 때 한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성전을 건축했으며, 기원전 189년 감찰관 선거에 뛰어들었다. 이 선거엔 그 외에도 대 카토,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그리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출마했다. 이 중 최근에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던 글라브리오가 당선될 확률이 가장 높아보였다.
이때 카토가 전 사령관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횡령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두 명의 호민관이 글라브리오를 재판에 회부했고, 카토는 증인석에 서서 자신이 그리스에서 본 금은 그릇 중 일부가 개선식이 벌어지는 동안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글라브리오는 카토를 위증 혐의로 고발했지만 곧 감찰관 입후보를 취소했고, 카토에 대한 고발 역시 취소되었다. 그러나 사령관으로 모셨던 이를 가차없이 고발한 그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감이 커졌고, 결국 카토는 당해 감찰관 선거에서 낙선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의 아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데켐브리 사크리스 파시운디스를 맡으면서 기원전 181년에 피에타스 여신전에 금박을 입힌 아버지의 동상을 세웠으며, 기원전 154년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