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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라틴어: Publius Cornelius Scipio Nasica Serapi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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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82년 ~ 기원전 132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소아시아 페르가몬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조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아버지) 코르넬리아(어머니)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손자) 메텔루스 스키피오(증손자)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폰티펙스 막시무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38년 집정관 |
전임 |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
동기 |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 |
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포르키나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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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폰티펙스 막시무스. 농지개혁을 감행한, 외사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그를 공화국 보호를 명분으로 살해한 인물이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집안인 코르넬리우스 씨족 스키피오 가문의 나시카(Nasica) 지파 출신이다. 나시카 지파의 설립자는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의 아들이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사촌으로, 기원전 191년 집정관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로, 그는 "날카로운 코"를 갖췄기에 '나시카'라는 별명을 처음으로 얻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은 기원전 162년과 기원전 155년에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마케도니아 왕국과 일리리아인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다.기원전 149년 제3차 포에니 전쟁에 처음으로 투입된 마니우스 마닐리우스의 로마군에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참여했다. 카르타고인들이 평화 협약을 맺길 희망하자, 마닐리우스는 모든 무기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카르타고인들이 이에 동의하자, 마닐리우스는 나시카와 사촌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카르타고로 보냈다. 나시카와 스키피오는 총 200,000개의 갑옷과 무기, 2,000개의 투석기, 막대한 수의 화살과 다트를 도시 밖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협상은 로마의 무리한 요구로 인해 결렬되어 전쟁은 곧 시작되었고, 카르타고는 3년 만에 멸망했다.
나시카는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로마로 돌아와서 재무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나시카는 선거 운동 중에 어느 마을 주민과 악수한 뒤, 그의 손바닥이 무척 단단한 것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손으로 걷는가?"
그 주변에 있던 농민들은 이 농담에 심한 모욕감을 느끼고 그가 무척 오만하다고 여겼다. 결국 나시카는 재무관 선거에서 낙선했다고 한다. 이 일이 언제 벌어졌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141년 법무관에 선임된 그는 사부스, 드라부스, 마르구스, 다뉴브 강이 합류하는 세르비아 일대에 거주하는 스코디시(Scordisci) 족과 맞붙었다가 참패했다. 하지만 이 일로 경력에 큰 장애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그 해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공백이 생긴 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138년 평민 출신의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호민관 가이우스 쿠리아티우스가 평민들에게 값싼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정부의 곡물 구매를 제안하자, 그는 민회에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평민들에게 인내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쿠리아티우스가 따져묻자 다음과 같이 윽박질렀다.
"입 닥쳐라! 나는 공화국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안다."
또한 그는 칼라이쿠스와 함께 호민관들이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투입될 장정들 중 군 복무를 면제할 10명의 남성을 선택하는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에 가이우스 쿠리아티우스는 두 집정관이 호민관의 정당한 권리 행사를 방해한다며 일시적으로 구금했다가 풀어줬다. 그러면서 나시카가 희생제에 쓰이는 동물을 판매하는 상인과 유사하게 생겼다며, 상인의 이름을 따 '세라피오(Serapio)'라는 별명을 붙였다. 나시카 본인은 이 별명에 불쾌해 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이 별명을 코그노멘으로 사용했다.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으로서 농지법 개혁을 단행했다. 이에 많은 귀족들이 반발했는데, 그 중 가장 열렬한 반대자가 바로 나시카였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나시카는 농지법으로 인해 자신이 보유한 농지를 잃어버리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그라쿠스에 대적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기원전 162년에 두 사람의 부친간에 벌어진 한 사건에서부터 갈등이 시작되었으리라 추정한다.
티베리우스의 아버지 대 그라쿠스는 집정관 임기를 마무리하고 차기 집정관 선거를 진행했다. 원래 집정관 선거를 하기 전에는 전통적으로 복점관이라고 하는 점술가가 새가 날아가는 걸 보고 점을 쳐서 그날 투표를 할지 말지 결정했다. 당시 복점관이 불길한 징조가 보였다고 말했는데도 그라쿠스는 무시하고 투표를 강행했다. 그런데 투표 결과가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나오자, 복점관이 운운했던 불길한 징조를 새삼스럽게 거론하며 집정관들에게 사임하지 않으면 신의 분노를 살 거라고 위협했다. 결국 집정관들은 어쩔 수 없이 사임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나시카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었다. 학자들은 나시카가 부친이 이런 모욕을 당한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그라쿠스 가문에게 적대 의식을 품었으리라 추정한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나시카 등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을 감행했다. 그러던 중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3세가 사망하면서 왕국의 모든 영토와 재산을 로마에 넘기겠다는 유언장을 남기자, 그라쿠스는 이 재산을 자신이 시행한 농지법의 예산으로 쓰자고 주장해 평민집회에서 관철시켰다. 이에 원로원은 예산의 집행은 자신들의 권한인데 그가 멋대로 결정했다며 반감을 품었고, 나시카 등은 그라쿠스의 호민관 임기가 만료되는 대로 집단 고소하기로 결의했다.
그라쿠스는 정적들이 자신을 음해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호민관에 재출마하기로 했다. 로마 역사에서 호민관이 재선하는 것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호민관을 연이어 맡을 수 없다는 규정은 없었기에 선거 출마가 가능했다. 이에 격분한 귀족들은 무뢰배들을 끌어모아 유피테르 신전 인근의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호민관 선거가 치러지고 있을 때 폭동을 일으켰다. 투표장에서 격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그라쿠스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는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제스처였지만, 정적들은 그가 지지자들에게 왕관을 요구하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그들은 곧장 로마에 있던 유일한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에게 달려가서 왕이 되려하는 그라쿠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했다.
"로마 시민은 어떤 죄를 지었든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 생명을 잃을 수 없소. 폭력에 의지해 사태를 해결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무키우스가 딱 잘라 거부하자, 나시카가 주위를 돌아보며 외쳤다.
"여러분! 무키우스 집정관은 공화국을 구하기 위해 나서기를 거부했습니다. 저와 함께 조국을 구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리고는 토가의 가장자리를 머리 위로 던져서 얼굴을 가린 뒤 추종자들을 거느린 채 투표장으로 뛰어들어가 곤봉과 의자 다리로 그라쿠스의 추종자들을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그라쿠스와 300명 가량의 민중이 피살되었는데, 나시카 일당은 이 유해를 테베레 강에 던졌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추종자들의 활동을 조사하는 특별위원회에 참여한 뒤 쿰 시의 시민이자 대표적인 그라쿠스의 추종자였던 가이우스 볼시우스를 심문했다.
"티베리우스가 원로원 의사당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소?"
나시카의 이 질문에, 볼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그가 주문했다면 이행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오. 티베리우스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러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테니까."
기원전 132년,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등 그라쿠스 추종자들이 나시카를 로마 시민을 무단으로 살해한 혐의로 고발했다. 당시 여론이 매우 적대적이었기에 유죄를 모면할 길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나시카는 로마를 떠나기로 했다. 그를 심정적으로 옹호했던 원로원은 그에게 사절의 지위를 부여하고 동방으로 보냈다. 이후 페르가몬에서 여생을 보내다 기원전 132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는 기원전 111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손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는 기원전 93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증손자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대표적인 옵티마테스파 인사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대적했으나 탑수스 전투에서 패망했다.
3. 평가
당대부터 평가가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 개혁 속에서 혼란에 걸맞게, 극명하게 갈리기로, 유명했다.나시카처럼 농지법을 극렬하게 반대했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살인이 완전히 합법적으로 벌어졌다며 나시카를 옹호했다. 반면, 당대와 후대의 로마 저자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동생으로, 형보다 폭력적이고 선동적인 행동으로 이후 농지개혁 화두의 증폭을 키운,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나시카를 맹비난했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형은 최고의 남자였으며 그를 살해한 범인은 최악의 인간이다"라고 규탄했다.
이런 당대 관련 인물들의 평 그대로, 후대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나시카에 대한 평은 갈렸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원로원 최종 권고에 의해 처단된 뒤, 다수의 로마 저자들은 나시카 편을 들었다. 기원전 2세기 그라쿠스 형제 등장 이후부터의 로마 사회에서, 소위 옵티마테스로 불린 지식인, 원로원 의원들 사이에서 나시카에 대한 평이 특히 그랬다. 가령, 옵티마테스의 대표격 논객으로 평가받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나시카가 자신의 사촌을 해친 것은 공공의 이익과 공화국 아래의 질서 유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지적했다. 키케로는 간접적인 논평 속에서 나시카가 극단적으로 행동했지만, 공화국의 이익을 위해 벌인 행동은 정치적 암살이더라도 정당하다는 식으로 적었다.
누만티아를 파괴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훌륭한 인물로 뛰어난 군인이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죽인 평범한 개인 푸블리우스 나시카보다 공화국에 더 유익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는 옵티마테스 진영, 원로원 중심의 귀족 과두정 체제를 절대 이상으로 본 키케로의 입장이라고 평가될 만큼, 온건한 옵티마테스로 분류된 인사들이나 포풀라레스 전체까지 포함해 논평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포풀라레스 내에서 소위 카이사르파로 불린 진영에 속한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나시카를 평하면서, 그라쿠스 형제가 민중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고 소수의 범죄를 밝혀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다가 부당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적고, 나시카가 벌인 폭력적인 행동의 과격함과 이 행동으로 벌어진 로마 정계의 이후 영향을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이는 후대 로마세계 사람들인 그리스 학자 플루타르코스와 아피아노스의 평도 그랬다. 이들은 그라쿠스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가 저지른 범죄로 인해 로마에서 내전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