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라틴어: Quintus Fulvius Flacc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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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72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조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버지) 술피키아(어머니)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 풀비아누스(형제)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79년 |
전임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동기 |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 풀비아누스 |
후임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아울루스 만리우스 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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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투스쿨룸 출신이었다가 기원전 4세기 중반에 로마로 이주한 뒤 여러 고위 행정관을 배출한 노빌레스 가문인 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플라쿠스(Flaccus)'라는 코그노멘을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로, 기원전 26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37년, 기원전 224년, 기원전 212년, 기원전 209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카푸아 공방전에서 맹활약했다. 형제로 만리우스 아키디누스 가문의 양자가 된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 풀비아누스가 있었으며, 또다른 형제 퀸투스도 있었다.기원전 184년 평민 조영관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에 법무관 가이우스 데키무스 플라부스가 사망하자, 그는 법무관을 겸임하려 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지지했지만, 집정관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가 조영관과 법무관을 겸임하는 것을 불허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기원전 182년에 비로소 법무관에 선임된 뒤 가까운 히스파니아에 부임했다. 그는 이 곳에서 켈티베리아인들과 전쟁을 벌였는데, 우르비누스 시를 포위 하는 동안 여러 전투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끝내 공략했다. 기원전 181년 35,000명의 켈티베리아인을 상대로 에부르 강과 콘트레비아에서 2차례 전투를 치러 격파했으며, 여러 요새를 정복하고 켈티베리아 부족 대부분을 복종시켰다.
이윽고 플라쿠스의 임기가 만료되었을 때, 그의 군대는 그를 히스파니아에 머물게 하거나 그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오랫 동안 히스파니아에서 복무했거나 지난 원정에서 두각을 드러낸 군인들만 복귀하도록 허용했다. 후임 법무관으로 부임할 예정이던 대 그라쿠스의 도착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플라쿠스는 기원전 180년에도 군사 작전을 이끌어 켈티베리아인들을 물리치고 포르투나 에퀴타 신전을 세웠다. 이후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가 사망하면서 공석이 생긴 폰티펙스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179년 로마에 돌아온 그는 개선식을 거행한 뒤 형제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 풀비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대 플리니우스 등 후대 역사가들은 친형제가 집정관에 선출된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매우 독특한 사건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유피테르를 기리기 위한 경기를 조직했으며, 형제와 함께 리구리아인과의 전쟁을 이끌어 승리를 거두고 로마로 돌아와서 또다시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174년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두 감찰관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들이자 당해 법무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불량한 행실을 비난하고 원로원에서 제명했다. 또한 그의 형제인 퀸투스 역시 행실 불량을 이유로 원로원에서 제명했고, 그 외에도 7명의 원로원 의원을 원로원에서 축출했다. 이후 기원전 187년과 기원전 175년에 집정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179년 감찰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180년부터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맡고 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삼았다. 한편, 동료 감찰관 알비누스가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명령 없이는 어떤 건물도 짓기를 거부한 것에 비해, 그는 로마 거리의 도로를 포장하는 공사를 실시하고 여러 개의 다리와 극장을 건설했으며, 카피톨리누스 언덕 경사면, 삼중 문 뒤의 시장 및 여러 현관을 조약돌로 보강하는 등 대규모 공사를 실시했다.
기원전 173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재임했을 때 한 서약을 지키기 위해 포르투나 신전을 건설했다. 이때 그는 건설에 쓰기 위해 브루티움에 있는 유노 신전 지붕 대리석을 뜯어냈다가 원로원의 강한 질타를 받고 되돌려보냈다. 기원전 172년 일리리아에서 복무하던 두 아들 중 한 명이 사망하고 2번째 아들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중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급보를 접했다. 그는 슬픔과 두려움에 시달린 끝에 자기 침실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리비우스는 이에 대해 유노 여신이 그에게 신벌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기원전 135년 집정관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아버지는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179년 집정관과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