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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라틴어: Gaius Servilius Gemin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80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조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아버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삼촌)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형제) 가이우스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03년 |
전임 |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
동기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
후임 |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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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기병장관, 독재관, 폰티펙스 막시무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세르빌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기원전 252년과 기원전 248년에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기원전 218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삼촌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기원전 217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기원전 212년에 다음 2개의 사건이 있었다고 밝혔다. 하나는 프리구스의 농부 마르쿠스 포스투미우스가 세금을 미납한 혐의로 고발당하자 친척인 호민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세르빌리우스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법무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레가투스였던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가 술라를 대신해 에트루리아에서 곡물을 구입한 뒤 배에 실어서 1차 타렌툼 공방전 이후 타렌툼의 해안 성채에 고립되어 있던 로마군에게 식량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대다수 학자들은 두 번째 인물이 기원전 203년 집정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동일인물일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210년, 지난해에 사망한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를 대신하여 폰티펙스에 발탁되었다. 기원전 209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와 함께 조영관에 선임되었고, 기원전 208년 독재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의 기병장관에 발탁되어 고위 행정관 선거와 검투사 경기 및 서커스를 주관했다.
그의 아버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기원전 218년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마르쿠스 안니우스와 함께 크레모나와 플라켄티아 시 건설을 감독하는 위원회의 일원을 맡았다. 그러던 중 보이족이 한니발 바르카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키자 급히 무티나로 피신했다. 안니우스는 무사히 탈출했지만, 게미누스와 카툴루스는 보이족에 붙들려 15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다. 로마에서는 두 사람이 살해당했다고 여겨졌다. 그러다 기원전 208년 무렵 두 사람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간에서는 두 사람이 켈트족에게 비굴하게 아첨하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는 비방이 일었다. 급기야 게미누스의 아들 역시 기병장관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이에 그는 원로원에 근거 없는 비방을 막아달라고 호소해 관철시켰다.
기원전 206년 법무관에 선임된 뒤 시칠리아를 통치하면서 2개 군단과 함대 30척을 이끌었다. 기원전 203년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추첨을 통해 에트루리아 지방에 부임하여 마고 바르카와 켈트족으로부터 로마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보이족과 협상한 끝에 아버지 게미누스와 카툴루스를 구해내는 데 성공했으며, 전직 집정관이며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와 함께 마고 바르카를 무찌를 준비에 착수했다.
얼마 후,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쿠스와 법무관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는 그의 지원을 받으며 4개 군단을 이끌고 마고 바르카가 있는 제노바로 진격해 인수브리아 전투에서 격돌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이 전투에서 5,000명의 병사가 전사했고 마고가 허벅지에 창이 찔려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반면 로마군은 2,300명의 병사를 잃었고 수많은 이가 중상을 입었으며, 3명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이 전사했다. 특히 기병대가 완전히 붕괴되어 더 이상 전투에 투입될 수 없었다. 이후 양자는 서로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대치하기만 했다. 한편 로마에서는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가 선거를 주관하기 위한 독재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열린 선거 결과, 그의 형제인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기원전 202년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에트루리아를 계속 통치하다가 연말에 형제에 의해 선거를 주관하기 위한 독재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를 기병장관에 선임하고 선거를 실시해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를 차기 집정관에 당선시켰다. 그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기원전 82년 독재관에 오르기 이전까지 마지막으로 선임된 독재관이었다.
기원전 201년 로마와 카르타고가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퇴역병들에게 아풀리아와 삼니움 일대의 토지를 분배하는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83년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가 사망한 뒤 공석이 된 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선임되었다. 한편, 그는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데켐브리 사크리스 파시운디스(decemviri sacris faciundis: 10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의 일원이기도 했다.
기원전 180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이 해에 사망한 삼촌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맡고 있던 '신성한 왕(Rex Sacrorum)'에 자신이 선임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돌라벨라가 로마 해군 사령관을 맡고 있는 점을 거론하며, 그 직위에서 물러나면 신성한 왕이 되게 해주겠다고 답했다. 돌라벨라가 이를 거부하자, 그는 유피테르에게 불경을 저질렀다며 벌금을 내라고 선고했다. 돌라벨라는 민회에 항소했지만, 여러 부족이 돌라벨라에게 반대하는 투표를 하자 결국 고집을 꺾고 신성한 왕이 되지 않기로 했다. 이후 푸블리우스 클렐리우스 시쿨루스(Publius Clelius Siculus)가 새로운 '신성한 왕'이 되었다. 기원전 180년 말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아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기원전 173년 조영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