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라틴어: Publius Sempronius Tudit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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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아버지)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형제)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아들)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04년 |
전임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
동기 |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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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평민 귀족이자 장군.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와 포이니케 협약을 맺어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종식한 것으로 유명하다.2. 생애
평민 집안인 셈프로니우스 가문의 일원이며, 아버지는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이다. 형제는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로, 기원전 210년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역임했다. 그는 기원전 216년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서 칸나이 전투에 참가하였고, 참담한 패배로 끝난 전장을 가까스로 탈출해 진영으로 복귀했다. 당시 로마 잔여군은 2개의 진영으로 나뉘었다. 병사들은 아군이 궤멸되고 지휘관이 없는 상황에 겁먹어 진영에 그대로 남았다.그 중 규모가 큰 진영의 병사들은 전령을 보내 작은 진영의 병사들에게 자신의 진영에 합류하여 같이 도망치자고 하였다. 이때 그는 600명의 장병을 이끌고 그들과 합세했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남아 밤을 보냈다. 한편, 큰 진영에서도 여기에 남을 건지 안전한 곳으로 후퇴할 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고, 그는 진영에 남기로 한 자들을 내버려두고 보병 4,000명과 기병 200명과 함께 카누시움으로 후퇴했다. 그렇게 진영에 남은 병사들은 다음날 아침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이 포위하자 전부 항복했다.
이후 로마로 돌아간 그는 기원전 214년 최고 조영관을 역임하였고, 동료 조영관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와 함께 로마 역사상 최초의 4일 경마 경기를 조직하였다. 기원전 213년 법무관을 맡아, 2개 군단을 이끌고 북 이탈리아의 아리미눔 일대에서 켈트족의 남하를 저지했다. 그는 이 임무를 기원전 211년까지 수행했고, 기원전 209년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이해 프린켑스 세나투스의 직임을 놓고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경합했다. 귀족 감찰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는 그를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임하려 했지만, 그가 파비우스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양보해야 했다. 한편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등 8명을 도덕적 해이 혐의[1]로 원로원에서 추방했으며, 칸나이 전투 때 기병대로 복무했으나 적 기병을 상대로 무기력하게 무너진 자들의 말을 몰수하고 복무 기간을 늘렸다.
기원전 205년 일리리아 총독으로 부임하였고, 포이니케에서 필리포스 5세를 만나 로마 공화국과 마케도니아 왕국간의 평화 협약을 체결하였다. 기원전 204년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으며, 브루티움 전선에서 한니발과 싸웠다. 이듬해에는 전직 집정관과 브루티움 총독의 권한으로서 한니발과 계속 대적했다. 기원전 200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찾아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침략하는 필리포스 5세에게 경고한 뒤 안티오코스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연이어 협상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아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는 기원전 196년 법무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