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라틴어: Marcus Popillius Laen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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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조부)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아버지)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형제)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73년 |
전임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파울룰루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동기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후임 |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리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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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포필리우스 씨족은 평민들이 집정관에 한 자리를 무조건 차지하게 한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이 통과된 기원전 367년 이후 집정관에 여러 차례 이름을 올린 노빌레스 가문이다. 코그노멘인 라이나스(Laenas)는 포필리우스 가문 인사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한 별칭이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이 용어는 유피테르 신전의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가 입는 외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반면 19세기 독일의 고고학자 프리드리히 뮌처는 이 이름은 에트루리아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이고 아버지는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라고 한다. 기원전 172년과 기원전 158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있었다.기원전 180년 피사 시가 할당한 땅에 라틴 식민도시를 조직하는 임무를 맡은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76년 법무관에 선임되어 사르데냐에 부임하게 되었으나, 대 그라쿠스가 이미 이 지역의 봉기를 수습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로마에서 임무를 수해앴다. 기원전 174년 아이톨리아 동맹 내의 내전을 종식시키는 임무를 맡은 사절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지만, 아이톨리아 동맹이 중재를 거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기원전 173년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동래 집정관 포스투미우스가 캄파니아의 공유지와 사유지를 구분하는 데 전념하는 동안, 그는 리구리아에서 로마를 상대로 반기를 든 부족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스타텔라티 족을 물리친 뒤 10,000명의 부족민이 항복해오자 모두 노예로 팔고 도시를 파괴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원로원은 그가 너무 지나쳤다고 보고 노예로 전락한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재산을 반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원로원의 허락 없이 로마로 상경한 뒤 원로원에게 자신의 행위를 알린 법무관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자신의 행위를 승인하며, 감사 의식을 거행하라고 요구했다. 원로원이 이를 거부하자, 그는 임지로 돌아갔다.
기원전 172년, 그의 잔학행위에 분노한 리구리아인들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이들과 전쟁을 치렀는데, 그 과정에서 6,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이로 인해 봉기는 더욱 거세졌다. 원로원은 리구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을 조사하고 범인을 처벌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그가 로마에 오지 않으면 재판을 강행해 유죄를 선고하기로 했다. 당해 집정관이자 그의 형제인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이를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원로원의 허락을 받지 않고 포 강 북쪽 땅에 리구리아인 일부를 정착시켜서 그들을 달래려 애썼다가 원로원의 비판을 받았다. 결국 그는 임페리움을 포기하고 로마로 돌아갔고, 리구리아인들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포 강 너머의 토지에 정착했다. 그는 심각한 봉기를 유발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포필리우스 가문의 간청을 받은 법무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다음 재판을 연기했고, 이후 재판은 흐지부지되었다.
기원전 169년, 라이나스는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휘하 레가투스를 맡았다. 그는 수천 명의 군인을 이끌고 아이톨리아의 암브로키아에서 겨울을 보냈다고 전해질 뿐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못했다. 기원전 159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과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두 감찰관은 원로원 건물에 현관을 짓고 로마에 최초의 물시계를 설치했으며, 포로 로마노에 설치된 조각상들 중 지나치게 화려하고 문란한 조각상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기원전 139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