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라틴어: Marcus Iunius Brut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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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조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아버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아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78년 |
전임 |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 풀비아누스 |
동기 | 아울루스 만리우스 불소 |
후임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대 그라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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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4세기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약했으며 로마 왕국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후손을 자처하는 유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195년 호민관에 선임된 뒤 동료 호민관인 푸블리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1]와 함께 여성의 사치를 제한하는 오피우스 법의 폐지에 반대했다. 이 법은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에 긴축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으로, 여성들이 1/2 온스 이상의 금제 장신구를 소유하거나, 다채로운 색상의 옷을 입거나, 종교적 축제가 열리는 때를 제외하고 도시에서나 도시로부터 1마일 이내에서 마차를 타는 것을 금지했다. 당해 집정관인 대 카토 역시 이 법의 폐지를 강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오피우스 법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법의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한 여인들의 압박을 받은 로마 정치인들의 주도로 폐지되었다.기원전 193년 평민 조영관에 선임된 뒤 동료 조영관 루키우스 오피우스 살리나토르와 함께 '테베르나이 플레브니(평민 회당)'이라고 명명된 포럼을 건설했지만, 나중에 감찰관에 선임된 대 카토가 포르키아 신전을 짓는 과정에서 철거되었다. 기원전 191년 루키우스 오피우스 살리나토르와 함께 법무관에 선임된 뒤 로마에서 형사 재판을 이끌었으며, 팔라티노 언덕에 대모신의 사원을 봉헌했다.
기원전 189년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해 동방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78년 아울루스 만리우스 불소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제비뽑기 결과 리구리아를 임지로 배정받았지만, 불소가 이스트리아에서 현지인들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원로원에 의해 이스트리아로 파견되었다. 두 집정관들은 아퀼레이아에서 겨울을 보낸 뒤, 이듬해 봄에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이스트리아를 재차 침공해 이스트리아 왕 에풀로가 농성하는 네사틸리 시를 포위했다.
얼마 후 신임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현장에 와서 속히 떠날 것을 요구하자, 그와 불소는 풀케르가 로마에서 종교 서약을 제대로 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고, 풀케르는 로마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그와 불소가 네사틸리 시 공략을 완료하기 직전에 풀케르가 새로운 군대와 함께 도착한 뒤 두 사람을 로마로 돌려보낸 후 네사틸리 시와 2개 도시를 공략하고 이스트리아 전체를 평정했다.
기원전 169년 감찰관 선거에 도전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소아시아에 파견되어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세우스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을 물색했으며, 기원전 164년 카파도키아 왕국의 국왕 아리아라테스 4세와 갈라티아간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재차 사절로 파견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기원전 140년 법무관을 역임했고, 또다른 아들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는 기원전 13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1]
일부 학자들은 그의 형제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