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라틴어: Marcus Livius Drus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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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55년 ~ 기원전 109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아버지) 코르넬리아(아내)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아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아들) 리비아(딸) 성명 미상의 딸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12년 집정관 |
전임 |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
동기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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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호민관, 집정관, 감찰관. "원로원의 수호자" 칭호를 원로원, 민회로부터 받았던 옵티마테스의 거두이다.농지개혁, 법정 내 파벌 다툼 조치 등을 감행한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대적한 끝에 몰락시킨 인물이라는 점에서 대중에게는 기회주의자, 극단적인 원로원파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의 삶과 철학은 이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고, 그가 논란의 인물이라는 평 역시 일반적이지 않다.
2. 생애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대중서적, 대중매체 속에서 그라쿠스 형제와 대립구도 속 악인처럼 비춰진 인물로 그려진다. 호민관 이후 경력을 보면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점에서 그라쿠스 형제와 정반대에 선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렇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비슷한 연배인 그는 중년 이후의 완고한 이미지와 달리, 기본적으로 일평생 현실주의자였고, 검소하고 절제적인 인물이었다. 실제 그는 말년의 이미지가 옵티마테스 중 강경파 같음에도, 외손자 소 카토, 혈연상 외손자이나 법적 손자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와 달리 유연한 면이 많았다. 민회나 후일 포풀라레스로 불리는 이들에게 마냥 적대적이지 않았던 귀족이었다. 즉, 그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대립하고 그를 몰락시킨 장본인임에도 이미지와 다르게, 술라 이후의 폐쇄적인 옵티마테스와 똑같지 않았다. 이런 인물적 특징처럼 그는 호민관 당선 후, 지나칠 정도로 원로원에 적대감을 드러내고 선동정치 아래 수많은 지지자를 결집시킨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설득해 온화한 방법으로 현실책을 제안했던 전례가 있었다.기원전 2세기에 로마 정계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평민 귀족( 노빌레스) 집안인 리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다만, 그 혈통은 본래 아이밀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파트리키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이다.
할아버지는 본래 혈통적으로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 사람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이밀리아누스이다. 그는 종종 마르쿠스 리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로 통칭된 원로원 의원인데,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와 아이밀리아 테르티아[1]의 친동생이다. 리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는 부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칸나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외가 쪽 친척들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남성들이 포에니 전쟁으로 거의 대부분 전사해 멸문 직전까지 간 가정사 때문에 어릴 때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으로 입양되면서 파트리키에서 플레브스 신분이 된 사람이었다. 따라서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친증조부는 파트리키 명문가인 아이밀리우스 가문으로 칸나이 전투에서 전사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되며,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밀리우스 가문과 깊은 유대감 아래에서 사실상 한몸이었다.
아버지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기원전 147년 집정관을 맡았고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고대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는 임무를 놓고, 아버지의 친조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경쟁했으나, 경력과 실력 등에서 현저히 부족한 문제로 인해 스키피오에게 밀렸다. 그는 기원전 147년 집정관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병으로 얻은 시각장애 문제로, 사실상 맹인과 같음에도 뛰어난 변호사로 이름을 날린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였으며, 여자형제는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아내 리비아가 있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를 기원전 154년에 태어난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거의 같은 연령"이라고 지칭했다. 독일의 로마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저(Friedrich Münzer, 1868 ~ 1942)는 드루수스가 가이우스 그라쿠스보다 몇 살 더 많았을 것이라 추정했고, 미국의 학자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William Graham Sumner, 1840 ~ 1910)는 그의 출생년도를 기원전 155년으로 설정했다.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이런 배경, 상황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처음 언급되고 화제를 모은 호민관 취임 당시부터 그라쿠스 형제 중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보다 급진적이고 선동적인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따른 지지자들에게 원로원 쪽 인사로 꾸준히 의심받았다.
기원전 122년, 전년도에 호민관으로서 급진적인 농지 개혁을 단행했던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함께 호민관에 선출되었다. 이 당시, 원로원은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전년도 호민관이던 시절에 숨 쉴 틈 없이 벌인 입법 활동과 연설, 정치 활동 등 속에서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원로원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들을 골탕 먹이고 아픈 곳을 파고 들거나 선동으로 로마 사회를 양분시킨 가이우스 그라쿠스 지지세력에게 똑같이 행동하겠다고 결심했다. 더해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취지를 공감했던 원로원 인사들도 지난 1년을 경험하면서, 급격히 줄었다. 악감정이 없던 원로원 의원들도 곡물법 통과 후 벌어진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일방적인 폭언과 시비 등 때문에 이를 갈았다.
이런 상황에서 원로원은 여러 호민관 중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영향 아래 있지 않은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당시 호민관에 선출된 노빌레스 출신의 귀족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도 원로원이 접촉한 인사였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지나친 대(對) 원로원 관계로 인해 민회와 원로원의 갈등이 깊어짐을 우려한 까닭에, 그는 이 부분을 신경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이우스 그라쿠스 지지자들에게 출신 가문의 역사, 가계상 친인척 관계 등 때문에, 등장부터 계속 의심받고 있었다. 노빌레스 중 셈프로니우스 가문, 리키니우스 가문, 칼푸르니우스 가문 등과 함께 파트리키와 대등하거나 그 역사가 유구한 노빌레스 중의 노빌레스로 평가된 리비우스 가문에 속하나, 혈통은 명확하게 아이밀리우스 가문 사람인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였고, 아버지 역시 집정관 출신으로 완고한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는 활동 시작 전부터 가이우스 그라쿠스 지지자들에게 곤란한 처지였고,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설득하더라도 진의를 의심받을 상황이었다.
그라쿠스의 개혁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원로원 의원들은 이 점을 파고 들었다. 그들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호민관 리비우스 드루수스에게 자신들이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어떤 점을 우려하는지 설명했다. 이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이 볼때 원로원이 평민 전체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세력을 이간질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를 비열하거나, 이간질을 벌이려고 한 수작으로 여기지 않았고, 선례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 이유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달리 지나칠 만큼 대중선동적이고, 지지세를 활용해 극단적 형태의 수단까지 고려할 만큼, 공화정 체제를 넘어 로마 사회의 극단적 분열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호민관이 된 뒤,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설득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민회, 원로원 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선, 원로원 설득처럼 그라쿠스가 우격다짐으로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것을 막기보다는 호민관 지위를 활용해 극단으로 심화된 그라쿠스의 행보에 제동을 걸기로 했다. 그는 그라쿠스가 제정한 법안에 거부권을 무조건 행사해, 그라쿠스의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최대한 저지했다. 이어 그라쿠스에 대한 평민들의 지지 중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연설을 하면서 선동한 조치를 저지하면서, 본인이 선제적으로 그라쿠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지만 실제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개혁안을 잇따라 발표했다.
이해,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시민들이 2개의 식민지에 정착하기 위해 약간의 임대료를 지불하게 하는 법안을 상정했다. 헌데 이는 자금책을 어느 부분에서 조달하고, 식민지 원주민에 대한 손해배상을 어찌 하는지 등 세부 사항이 빠져있었기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 그렇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자신의 법안을 반대하는 이들을 비난했다. 이에 드루수스는 그라쿠스의 법안을 무색하게 만들기 위해 "12개의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임대료를 전혀 지불하지 않고 정착하게 하자"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그라쿠스의 제안을 불식시키기 위해, 원로원의 사실상 묵인 아래 이탈리아인에 대한 어떠한 체벌도 내리지 않는 법안을 상정했다. 그는 자신이 원로원과 귀족의 승인을 받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협조를 쉽게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원로원 역시 그라쿠스의 지지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드루수스의 법안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평민들은 드루수스 쪽으로 몰려들었고, 자연히 그라쿠스의 인기는 차츰 사그라들었다.
드루수스는 여세를 몰아 그라쿠스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이탈리아인의 무장 봉기를 준비하고 있으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살해했다고 비난했다. 이 주장은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이 과격한 점을 근거로 한 그라쿠스 일당 숙청을 위한 술수로,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지지를 호소하면서 반대파를 적으로 규정할 때 사용한 방법을 그대로 모방한 행동이었다. 이에 그라쿠스는 드루수스의 위선적인 행태를 비난했다. 하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비난한 이 방법은 그라쿠스가 했던 그것이라서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기원전 121년,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 선거에 재차 출마했다. 그렇지만 그는 낙선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집정관에 선출된 루키우스 오피미우스가 그라쿠스의 법안을 철회하려 했다가, 그라쿠스 지지 군중들의 공격을 받아 릭토르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로마법상 명백한 국가내란 및 혼란에 부합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이를 빌미 삼아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의했고, 오피미우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그라쿠스와 지지자 3천 명을 처형했다. 그 후 원로원은 그라쿠스 형제의 모든 법안을 폐기했는데, 드루수스가 제시했던 법안 역시 자연스럽게 묻혔다. 대신 원로원은 그라쿠스의 몰락에 큰 공을 세운 드루수스에게 "원로원의 수호자"라는 명예 칭호를 내렸다.
기원전 112년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한 뒤 기원전 111년 마케도니아 총독을 맡아 트라키아인과 스코디스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는 이 전쟁에서 상당한 전과를 거둔 뒤 기원전 110년 집정관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에게 지휘권을 양도하고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109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출되었으나 그 해에 사망했다.
그는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장남은 그의 증조부 집안에 사전에 정해진 약조에 따라, 아이밀리우스 가문으로 입적됐고,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라는 이름을 취했다. 그는 기원전 77년 집정관을 지냈다. 반면, 장남보다 1살 혹은 2살 어린 차남은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후계자가 되어 가문을 이었다.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차남인데, 그는 온건한 옵티마테스로 아버지가 극단적으로 저항한 그라쿠스 형제 중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잔재를 없애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정신을 잇는 개혁을 추진했다. 따라서 그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남긴 폐해였던 법정 배심원을 장악한 기사계급, 고리대금업자들의 증오를 받았다. 하지만 원로원을 이끈 이들은 그가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인기 회복과 안정을 위해 앞장선 모습에 칭찬을 했다. 허나 그는 이탈리아의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집정관 필리푸스, 처남이자 매제인 카이피오와 갈등을 빚었고, 호민관 임기 말인 기원전 91년 괴한의 습격을 받고 암살됐다.
차녀 리비아는 기원전 91년 법무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처음으로 결혼하여 제3차 노예 전쟁 때 대대장으로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군에 맞선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연인이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인 세르빌리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최측근이자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맹활약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아내였던 소 세르빌리아를 낳았다. 리비아는 나중에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이혼한 뒤[2],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결혼해서 소 카토와 포르키아를 낳았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장녀는 기원전 130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결혼했다. 그녀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그리고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를 낳았다. 이중 그녀의 차남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는 태어난 지 1년이 지난 직후인 기원전 92년, 어머니의 동생인 외삼촌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양자가 됐다.
[1]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내.
[2]
여러 정황상, 오빠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 암살 뒤 벌어진 현직 호민관 재판에서 남편 카이피오가 연루되면서 두 가문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일 때문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