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라틴어: Marcus Fulvius Nobili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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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226년 ~ 기원전 179년 이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노빌리오르(조부)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아버지)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장남) 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차남)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9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
동기 |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 |
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이우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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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에 참전해 아이톨리아 동맹과의 전쟁을 이끌었다.2. 생애
4세기 중반에 투스쿨룸에서 로마로 이주한 뒤 기원전 322년에 처음으로 집정관에 오른 후 여러 집정관을 배출한 노빌레스 가문인 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노빌리오르는 기원전 255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는 이름만 전해질 뿐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기원전 199년에 활동한 호민관 마르쿠스 풀비우스를 언급했다. 리비우스는 이 인물의 코그노멘을 밝히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노빌리오르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기원전 196년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함께 조영관으로 선임되었고, 기원전 193년에도 플라미니우스와 함께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이 되었고, 플라미니우스는 먼 히스파니아 총독이 되었다. 그는 켈티베리아인, 바케이인, 베토네인 연합군을 상대로 톨레도 인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기원전 191년 말에 로마로 돌아온 뒤 원로원으로부터 공공 경기장에서 대중의 갈채를 받는 오라토르(orator)를 받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기원전 190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그는 모든 후보 중 당선에 필요한 투표를 확보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이에 세 명의 귀족 후보 중 한 명을 직접 동료로 삼을 권리를 부여받고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를 선택했다.
기원전 189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연합하여 로마에 대항한 아이톨리아 동맹을 응장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발칸 반도로 출진했다. 그는 에페이로스 연맹군과 연합한 뒤 암브라키아를 포위했다. 이후 많은 공성 무기를 동원하여 맹공을 퍼부었지만 적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공략에 실패했고, 아테네의 중재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아이톨리아 동맹은 로마에 200달란트를 즉각 배상하고 6년 이내에 300달란트를 추가로 지불하기로 했다. 또한 아이톨리아 동맹은 연합을 유지하는 대가로 로마인이 정복했거나 우호적인 동맹을 맺은 도시를 합병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암브라키아는 약탈을 받지 않아도 되었지만, 노빌리오르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조각상과 그림 여러 점을 빼돌렸다. 그 후 평화 협약이 적용되지 않은 케팔로니아 섬에 상륙해 사마 시를 4개월간 공격한 끝에 함락시키고 그곳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았다. 이에 다른 케팔로니아 도시들이 그에게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복종했다. 그 후 다음 선거를 조직하기 위해 로마에 잠시 들린 그는 뒤이어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방문해 스파르타와 아카이아 동맹으로부터 로마와 우호 관계를 이어가겠다는 약조를 얻어냈다.
기원전 187년 초 로마로 돌아온 그는 개선식 거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로원에서는 개선식은 고사하고 중벌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아이톨리아 동맹과 전쟁을 벌이면서 잔혹행위와 약탈을 서슴지 않아 로마인의 명예에 먹칠했다는 것이다. 당해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노빌리오르와 불소를 탄핵하는 이들을 지원했지만, 지난날 노빌리오르와 함께 조영관과 법무관을 함께 했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집정관은 노빌리오르의 편에 섰다. 원로원은 처음에는 노빌리오르가 암브라키아인들로부터 빼앗은 재산을 돌려줘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나중에 레피두스가 갈리아 키살피나로 떠난 틈을 타 노빌리오르에게 개선식을 거행할 권리를 부여했다. 노빌리오르는 개선식을 거행한 뒤 대규모 검투 경기를 개최했다.
기원전 184년 감찰관 선거에 출마한 그는 당선 가능성이 유력한 대 카토를 떨어뜨리기 위해 다른 후보들과 연합했다. 당시 카토는 매우 급진적인 정치인으로 간주되고 있었기에, 상대 후보들은 유권자들에게 온건한 감찰관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카토는 자신이 급진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도덕 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선거 결과 카토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당선되었고, 그는 낙선했다.
기원전 179년, 그는 지난날 자신을 탄핵하는 것을 지워내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감찰관에 당선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원수 취급했지만,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의 중재에 따라 화해했다. 두 감찰관은 여러 종류의 관세 및 세금을 도입하고 투표 절차를 변경했으며, 주노, 디아나 등 여러 신전을 건설했으며, 아이밀리아와 풀비아의 공화당을 건설했다. 특히 노빌리오르는 티베르 강에 부두와 다리 공사를 감독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에게는 두 아들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와 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가 있었다. 장남 마르쿠스는 기원전 159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차남 퀸투스는 기원전 153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