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라틴어: Quintus Caecilius Metel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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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덴테르(조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아버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형제)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형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아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06년 |
전임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
동기 |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
후임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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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기병장관, 독재관.2. 생애
라치오 인근의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시를 건설했다는 전승이 전해지는 불카누스(Volcanus, 불의 신)의 아들 카이쿨루스의 후예로 전해지는 노빌레스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덴테르는 기원전 284년 가문 최초로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기원전 251년과 기원전 247년에 집정관을 맡았으며, 파노르무스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형제로 기원전 213년 호민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기원전 206년 법무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있었다.기원전 22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장례식을 공개적으로 거행하면서 아버지를 기리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라틴어 산문으로서 대 플리니우스의 < 박물지>에 인용된 부분이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전사이자 훌륭한 연설가이자, 용감한 사령관이 되기 위해, 그의 지도 아래 가장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 종교적 영예를 향휴하기 위해, 최고의 지혜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정직하게 많은 재산을 얻고. 많은 자녀를 남기고. 동료 시민들 사이에서 영광을 얻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웅변가에 대하여>에서 연설문의 내용이 탁월하다며 그를 훌륭한 웅변가라고 평가했다.
기원전 216년 푸블리우스 스칸티니우스가 사망한 후 공석이 된 폰티펙스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209년 평민 조영관에 선임되었으며, 기원전 207년 레가투스로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로마군에 배속된 뒤 메타우루스 전투에 참전해 대승에 일조한 뒤 로마에 파견되어 승리 소식을 원로원에 전달했다. 이후 고위 행정관 선거를 주관하는 독재관을 잠시 맡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에 의해 기병장관에 지명되었다. 이 선거 결과, 그와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가 기원전 206년도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두 집정관은 브루티움에 틀어박힌 한니발을 상대했지만, 한니발이 별다른 군사적 행동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대치하기만 했다. 임기가 만료될 무렵 두 사람 중 누가 브루티움에 있을 지를 놓고 제비뽑기를 한 결과, 메텔루스가 브루티움에 계속 남고 필로는 로마로 돌아가서 차기 집정관 선거를 주관하기로 했다. 기원전 205년 말, 당해 집정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아프리카 원정에 착수했고 또다른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는 한니발과 대치하고 있던 터라서 선거를 주관하기 어려웠다. 이에 크라수스는 그를 독재관에 선임해 선거를 주관하게 했다. 그는 동료 집정관이었던 필로를 기병장관에 발탁해 선거를 함께 진행했다.
그 후 그는 로마에 있으면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추종자들을 이끌었다.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레가투스인 퀸투스 플레미니우스가 이끄는 분견대가 로크리에서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원로원은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를 조직했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등이 참여한 위원회는 필요하다면 스키피오를 체포하고, 이미 아프리카로 출발했다면 돌아오라고 지시하려 했다. 그러나 역시 위원회에 참여한 그가 스키피오는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은 게 분명하며, 큰 전쟁을 눈앞에 둔 장군을 압박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원로원은 이에 동의해 스키피오가 아프리카 원정을 계속 이어가게 했다. 기원전 201년 전쟁이 끝난 뒤 스키피오를 따라 원정갔던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위원회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기원전 193년 집정관 루키우스 로크넬리우스 메룰라와 레가투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으며, 기원전 185-184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 필리포스 5세에게 테살리아, 페레비아, 트라키아 정복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필리포스가 끝까지 거부하자, 그는 다른 사절들과 함께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가서 아카이아 동맹과 스파르타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자 했으나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원전 179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가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두 사람은 기원전 187년 레피두스가 노빌리오르를 " 아이톨리아 동맹과 전쟁을 벌이면서 잔혹행위와 약탈을 서슴지 않아 로마인의 명예에 먹칠한" 혐의로 기소한 일 때문에 서로를 원수로 여겼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이 감찰관으로서 서로 협조하지 않고 반목할 거라는 우려가 세간에 퍼졌다. 이에 그가 직접 나서서 두 사람을 중재했고,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하고 감찰관 역할을 잘 수행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두 아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를 두었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는 기원전 143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아카이아 전쟁, 누만티아 전쟁에서 활약했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는 기원전 142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 후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은 기원전 2세기와 기원전 1세기에 고위 행정관을 대대로 역임하면서 로마 정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