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라틴어: Gnaeus Servilius Gem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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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16년 |
출생지 | 미상 |
사망지 | 이탈리아 남부 칸나이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아버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동생)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17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
동기 |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1] |
후임 |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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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에게 참패하고 전사했다.2. 생애
알바 롱가에서 기원한 6개의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세르빌리 가문의 일원으로, 아버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기원전 252년과 248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는 기원전 218년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는 트레비아 전투 직후에 치러진 것이므로,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이듬해에 한니발의 예상되는 공세로부터 이탈리아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플라미니우스는 아펜니노 산맥의 서쪽 통로인 아르네 계곡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아레티움(오늘날 아레초)에 주둔했고, 그는 아드리아 해 연안 가도에 위치한 아리미눔(오늘날 리미니)에 주둔했다. 그들은 한니발이 둘 중 한 곳으로 내려오리라 보고, 한니발이 한 쪽으로 가면 다른 쪽이 즉시 달려와서 지원하기로 했다.그러나 한니발은 두 사람의 예상과는 달리 아펜니노 강과 아르노 강 주변의 거대한 늪지대를 강행 돌파하여 아렌티움 남쪽의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도착했다. 그는 플라미니우스가 보는 앞에서 수많은 농장과 마을을 약탈하고 방화를 자행해, 요새에 박혀 있는 그가 회전에 응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플라미니우스는 세르비우스가 오기 전에는 한니발과 회전을 벌이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적의 도발을 참아냈다. 이에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를 유인하기 위해 아풀리아 지방으로 남하했다.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을 추격했다가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를 따르던 로마군은 궤멸되었다.
한편, 세르빌리우스는 플라미니우스와 합류하고자 진군하고 있었다. 그는 기병 4,000명을 가이우스 켄테니우스의 지휘하에 앞서 가서 아군과 합세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기병대는 움브리아에서 마하르발이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대의 습격으로 전사하거나 항복했다. 로마는 이 일련의 패배에 큰 충격을 받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선임했다. 세르빌리우스는 그의 군대를 로마로 이끌고 가서 파비우스에게 지휘권을 양도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세르빌리우스는 호위병들과 함께 파비우스를 향해 질주하다가, "호위병 없이 혼자서 내 앞에 출두하라"는 파비우스의 지시에 순종했다고 한다. 그 후 카르타고 함대로부터 이탈리아 해안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피사에서 한니발을 지원하려던 적 함대를 격파했다. 뒤이어 아프리카 해안을 습격하여 해안가 마을을 약탈하였으나, 카르타고군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시칠리아로 퇴각했다. 그 후 전임 집정관 티투스 오타킬리우스에게 함대를 넘겨주고 로마로 떠났다.
파비우스가 6개월 임기를 마치고 독재관에서 물려난 뒤, 전임 집정관 자격으로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와 함께 한니발과 대치하면서, 한니발이 원하는 회전에 응하지 않았다. 기원전 216년 신임 집정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휘하에 들어가 군단병을 지휘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216년 여름 칸나이 전투 전날 군사 회의 때 전투를 회피해야 한다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주장을 지지한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날 회전이 감행되었고, 중앙에 밀집한 보병 본대의 지휘를 맡았다. 세르빌리우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에겐 동생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가 있었다. 가이우스는 형이 집정관을 맡던 기원전 218년 보이족에게 사로잡혀 포로 신세로 전락한 뒤 15년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의 후손에 관해서는 전해지는 기록이 없으며, 그의 조카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는 각각 기원전 203년과 20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1]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에서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하면서 보결 집정관으로 발탁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