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09:12:26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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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라틴어: Gaius Terentius Varro
생몰년도 미상 ~ 미상
출생지 미상
사망지 미상
지위 플레브스
국가 로마 공화정
가족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아버지)
참전 제2차 포에니 전쟁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216년
전임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1]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동기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후임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2]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3]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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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평민 출신 집정관이자 장군.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에게 참패했다.

2. 생애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정육점 주인이었으며, 그는 아버지를 섬기며 비천한 일을 했다고 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역시 그의 집안이 정육점을 대대로 운영했으며, 가장 하찮은 환경에서 집정관이 된 인물이라고 서술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바로가 하찮은 가문에 속한다고만 기술했다. 현대 학자들은 리비우스 등이 로마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안긴 바로를 비하하는 의도로 그의 집안을 매도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가 하층 계급 출신일 가능성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229년경 재무관을 맡았으며, 나중에 검찰관, 평민 조영관, 최고 조영관의 직위를 맡았다. 그는 아버지가 모은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관직을 맡을 수 있었고, 평민을 옹호하고 귀족을 반대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끌어모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첫해인 기원전 218년 법무관을 맡았다. 학자들은 기원전 217년 6월 평민 계급의 지도자였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전사한 뒤 그가 새 지도자로 떠올랐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독재관을 맡은 이래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임한다고 비난하며, 기병대 지휘관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가 막시무스와 권력을 균등하게 가져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시키기도 했다.

기원전 216년, 로마인들은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등 일련의 패배를 안기며 이탈리아 전역을 횡행하는 한니발 바르카와 일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평민들은 신속한 승리를 외치는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를 압도적인 표로 선출했다. 한편 귀족들은 집정관 후보로 나온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렌다,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중에는 한니발을 대적할 만한 자가 없다고 보고, 파울루스에게 출마를 권고했다. 파울루스는 3년 만에 또다시 집정관에 선출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거절했지만, 귀족들의 연이은 설득에 결국 수락했다. 그러자 다른 귀족 집정관 후보들이 전부 사퇴하면서, 그는 수월하게 집정관에 선출될 수 있었다. 두 집정관은 로마 역사상 최대의 군대를 부여받았다. 폴리비오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당시 두 사람에게 주어진 병력은 총 87,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한편 플루타르코스는 92,000명의 군대가 편성되었다고 기술했다. 두 집정관은 격일간 지휘권을 맡으면서 군대를 이끌기로 결의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한니발이 칸나이로 군대를 이동시키자 그곳에 진을 치고 있던 총독들은 원로원에게 한니발과 교전할 지를 물었다. 원로원은 교전을 벌이지 말고 파울루스와 바로의 군대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양군이 서로 접근하여 전초전이 벌어졌고, 로마군이 더 많은 적병을 살상했다. 하지만 파울루스는 승리에 고무되어 바로 전면전을 벌이려는 병사들을 진정시켜서, 회전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이후 아우피드 강 계곡에 자리잡은 한니발은 바로가 지휘권을 맡았던 날 도발하여 로마군이 전투를 벌이기 위해 진영에서 나오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반면 리비우스는 다르게 서술했다. 로마군은 진군 도중에 식량을 모으고 있던 적병들과 우연히 마주쳐 큰 손실을 입혔지만, 파울루스는 매복을 두려워하여 진군을 막았다. 나중에 식량이 바닥난 한니발은 실제로 병사들을 매복시켰지만, 파울루스가 정찰병을 보내 확인하는 바람에 실패하자 칸나이로 철수하였고, 바로가 지휘권을 맡은 날 아우피드 강 계곡에서 나와 전투를 시작했다고 한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파울루스는 평원에서 한니발과 싸우면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바로는 이를 무시하고 지휘권을 잡은 날 결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을 신용하지 않는다. 폴리비오스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후견을 받고 있었는데, 파울루스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친할아버지였다. 이 때문에 파울루스를 비판할 수 없었던 그가 바로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학자들은 칸나이 전투 때 로마군의 전략은 바로 혼자서 기획한 게 아니라 파울루스를 포함해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등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장성들도 머리를 함께 맞대어 고안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양군은 칸나이 평원에서 회전을 벌였다.( 칸나이 전투) 로마군은 양익의 기병대가 버티는 사이 중앙에 포진한 군단병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붙여 적을 돌파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진형의 깊이를 높이고 각 부대 사이의 간격을 평소보다 좁혔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이러한 전략을 간파하고 보병대를 초승달 모양으로 정렬해 볼록한 면이 적을 향하게 했다. 동시에 가장 약한 부대인 갈리아 보병이 중앙에 배치되었고, 그 측면에는 한니발과 함께 악전고투하며 정예병으로 육성된 리비아와 이베리아 보병대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양익에는 누미디아 기병대와 이베리아 기병대가 포진했다. 리비우스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아이밀리아누스는 우익 기병대를 지휘하다가 적 투석병이 던진 돌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이후 벌어진 기병전에서 기병대가 허물어지자 중앙 군단병과 합세해 그들을 지휘했다고 한다. 반면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처음부터 중앙 군단병을 지휘했다고 한다. 한편 고대 역사가들은 바로의 전투 참여에 대해 거의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현대 학자들은 그가 좌익 기병대를 지휘하다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패퇴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칸나이 전투가 로마의 대재앙으로 끝난 뒤, 살아남은 로마 보병들은 카누시움에 집결했다. 그들을 인도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바로에게 연락을 취했고, 바로는 즉시 그곳에 도착했다. 이때 그가 확보한 병력은 약 15,000명이었다. 원로원은 두 집정관이 칸나이 전투 때 전사했다고 여기고 절망했는데, 바로로부터 보고서를 받자 반색하며 당장 로마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바로는 즉시 로마로 귀환했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원로원 의원과 평민들을 대동하여 도시 밖으로 나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와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그는 이후 전직 집정관으로서 군단 지휘권을 받아 활동했다. 기원전 216년 후반 아풀리아로 보내졌고, 다시 피케눔에 주둔한 1개 군단을 맡아 켈트인들이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걸 막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기원전 214년과 213년에 연이어 피케눔 주둔 군단 지휘를 맡았고, 기원전 212년 자신의 군단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넘겨주었다. 기원전 208년 로마에 대한 봉기가 발발한 에트루리아로 이동하여 봉기의 중심지인 아레티움에 군대를 보내 상황을 안정시켰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207년에도 2개 군단의 대병력을 이끌고 에트루리아에 주둔했다고 한다.

기원전 203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침략으로부터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구하기 위해 필리포스 5세의 궁정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 기원전 200년에는 카르타고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다. 같은 해 전쟁 동안 고통받았던 베누시아 시의 인구를 보충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그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에서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하면서 보결 집정관으로 발탁됨. [2] 집정관 취임 전 실바 리타나 전투에서 보이족 전사들의 매복 공격으로 전사함. [3] 원로원이 평민 출신 집정관이 두명 뽑힌 것에 반감을 품고 불길한 징조를 핑계로 마르켈루스의 취임을 무효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