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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15년 초,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실바 리타나 숲에서 보이 족의 기습으로 궤멸된 전투.
2. 전투 경과
기원전 216년 8월 2일,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이끄는 로마군 87,000명(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와 폴리비오스의 기록) 또는 92,000명(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이 한니발 바르카의 5만 카르타고군과 칸나이 전투에서 맞붙었으나 사상자 44,500~60,000명, 포로 19,300명에 달하는 파국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탈리아의 남부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로마의 이같은 대패에 전율했고, 카푸아 등 여러 도시가 곧 로마를 저버리고 한니발의 편으로 들어갔다.한편, 로마 원로원은 한니발을 상대로 사상 최대의 병력을 동원하는 동시에 갈리아 키살피나(이탈리아 북부)로 파견된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에게 한니발에게 가담한 켈트인들에 보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포스투미우스는 2개 로마 군단, 2개 라틴 동맹 군단을 소집해 총 2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포강 이북으로 진군하여 켈트인들의 땅을 약탈했다. 작전은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켈트인들은 로마군의 침략을 피해 숲속으로 피신했다. 칸나이 전투의 참상에 깊이 상심했던 로마인들은 그의 활약상을 전해듣고 기뻐했고, 그를 기원전 215년 집정관에 선출했다.
그러던 기원전 215년 초, 포스투미우스는 실바 리타나 숲으로 숨어든 보이족을 섬멸하기 위해 전군을 이끌고 들어갔다. 숲을 통과하는 유일한 길은 매우 좁아서 한 사람씩 줄을 지어 걸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보이족 전사들이 진군로 주변에 매복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보이족 전사들은 길을 따라 나무 줄기를 베어둬서 쉽게 넘어지도록 했다. 로마군 전체가 숲 깊숙이 들어오자, 그들은 나무들을 모조리 밀어서 적을 향해 넘어지게 했고, 이로 인해 많은 장병과 말, 마차가 나무에 깔려 사망했다. 로마군은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혼란에 빠졌고, 사방에 있던 보이족 전사들이 뛰쳐나와 그들을 맹공격했다.
나무에 깔리는 걸 모면한 병사들은 근처 다리를 건너 도망치려 했지만 건널목을 지키는 보이 분견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목숨을 건지려고 항복한 자들도 있었지만, 그동안 자신들을 핍박한 로마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보이족 전사들은 투항자들을 모두 죽였다. 포스투미우스 역시 전사하여 목이 잘렸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의 두개골은 금을 입힌 뒤 제물을 바치는 그릇으로 사용되었고, 성전의 제사장을 위한 술잔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25,000명의 병력 중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 자는 10여 명밖에 안 됐다고 한다.
226년 후, 이와 비슷한 전투가 라인강 근처에서 재현된다.
3. 영향
로마 시민들은 실바 리타나 전투 소식을 듣고 절망했다. 그들은 지난 해 칸나이 전투의 충격에서 간신히 벗어나고 있었지만, 또다시 켈트족에게 전군이 몰살당했으니 이제 로마는 끝장이라고 여겼다. 상점은 문을 닫았고,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으며, 밤에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이에 원로원은 순찰대를 시켜 거리를 돌며 가게를 다시 열게 하고 애도를 중단하게 했다. 그가 죽으면서 집정관이 공백 상태가 되자 재선거를 실시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원로원은 평민 출신 집정관이 두명 뽑힌 것에 반감을 품고 불길한 징조를 핑계로 마르켈루스의 취임을 무효로 처리하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선출했다.한편, 보이족은 빛나는 승리를 거뒀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갈리아 카살피나의 주요 식민도시인 크레모나를 공략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들 영역을 지키는 데만 관심을 뒀다. 크레모나는 본토의 별다른 지원도 못받고 켈트인들의 영역 한복판에 고립되었지만, 30개 로마 식민도시들 중 18개가 필요한 할당량의 돈과 군인들을 공급하지 못했던 기원전 209년에도 할당량을 충족시킬 정도로 정상적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