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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공방전 | ||
날짜 | ||
기원전 213년~212년 | ||
장소 | ||
시칠리아 섬 시라쿠사 | ||
원인 | ||
2차 포에니 전쟁의 일부 시라쿠사의 정국 급변으로 인한 반로마화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로마 공화국 |
시라쿠사 카르타고 |
지휘관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
시라쿠사 에피키데스 히포크라테스 아르키메데스 카르타고 히밀코 보밀카르 |
병력 | 로마 4개 군단 20,000~30,000 |
시라쿠사 15,000~20,000 카르타고 28,000 |
결과 | ||
시라쿠사의 함락과 멸망 시칠리아에서 로마의 영향력 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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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13년 ~ 212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에 대한 로마군의 공성전. 명장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천재 과학자 아르키메데스의 대결로 회자되는 공방전이다.
2. 배경
시라쿠사는 기원전 8세기경 고대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식민도시로, 시칠리아 그리스계 도시들 중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이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는 아테네의 침공을 받았으나 스파르타의 구원에 힘입어 섬멸했으며, 기원전 4세기 경부터는 시칠리아 서부 일대를 장악한 고대 카르타고와 대립했다. 기원전 264년, 메시나를 장악하고 해안가와 농경지를 빈번하게 약탈하던 마메르티니 용병들을 토벌하려 했다가, 로마가 개입하여 용병들을 구원하자 카르타고와 연합해 맞서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다. 시라쿠사 참주 히에로 2세는 로마와의 초기 교전에서 패한 뒤, 그들의 힘을 실감하고 동맹국이 되기로 했고, 죽을 때까지 로마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고 충직한 동맹자로 남았다. 시라쿠사는 히에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를 유지하며 번영을 구가했다.그러나 기원전 215년 히에로 2세가 죽은 뒤 손자 히에로니무스가 등극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히에로 2세는 죽기 전에 히에로니무스의 나이가 어린 걸 염려하여 사위인 아드라노도로스와 조이포스 등 15명의 고명대신에게 히에로니무스의 보좌를 맡겼다. 그러나 히에로니무스는 아드라노도로스와 조이포스, 트라소를 제외한 중신들을 모두 해임하고 자기 뜻대로 정국을 주관했다. 이 당시, 로마는 한니발 바르카의 침략으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칸나이 전투에서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한 이래 카푸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이 대거 카르타고 편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기원전 215년 보밀카르의 지휘하에 시칠리아에 상륙한 카르타고군은 시칠리아 행정관이자 군사 사령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반격을 그럭저럭 막아내고 거점을 마련했다.
히에로니무스는 이러한 상황을 살펴본 끝에 로마와의 동맹을 단절하고 한니발과 손을 잡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풀케르는 시라쿠사에 사절을 보내 조부의 뜻을 받들어 로마와 우호관계를 이어가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히에로니무스가 시칠리아 왕국이 히메라 강으로 확장하는 걸 동의하고, 히에로 2세가 로마에 바쳤던 모든 공물을 돌려달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는 바람에 설득에 실패했다. 이후 히에로니무스는 15,000명의 군대를 소집해 카르타고군과 연합하여 시칠리아 섬을 공략하려 했지만, 기원전 214년 데이노메네스가 이끄는 공모자들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이후 집권한 아드라노도로스가 암살당하는 등 격렬한 권력분쟁이 이어진 끝에,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 형제가 최종적으로 집권했다. 두 형제는 로마와 싸우면 승산이 없다고 보고, 그해 봄에 시칠리아에 상륙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마르켈루스 역시 시라쿠사와 타협하고 한니발에 전념하고 싶기에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카르타고가 곧 원군을 보낼 거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는 마음을 달리먹고 인근 영토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수비대를 공격해 많은 이를 살육했다. 이에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에 전령을 보내 두 사람을 넘기지 않으면 전쟁 뿐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두 형제는 로마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레온티니 시로 도피했고, 시라쿠사 인들은 마르켈루스에게 레온티니에 두 사람이 피신했으니, 그들을 친다면 자기들이 돕겠다고 답했다. 마르켈루스는 전군을 이끌고 레온티니 시를 공격했고,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는 성문이 파괴되고 성벽이 공략당하자 아크로폴리스와 에르베소로 피신했다. 로마군을 돕기 위해 출진한 8,000명의 시라쿠사군은 도중에 레온티니 시 주민과 군인들이 전부 도륙당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전해듣고 심한 충격을 받고 행군을 멈췄다.
얼마 후, 로마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가 시라쿠사군을 찾아갔다. 그들은 부디 자신들을 넘기지 말고 보호해달라고 간청하면서, 로마군은 언젠가 시라쿠사도 레온티니 시처럼 만들 거라고 덧붙였다. 시라쿠사 지휘관들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라쿠사 원로원에 조언을 구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이때 히포크라테스는 편지를 가로채어 큰 소리로 읽었다. 그 편지에는 두 사령관이 마르켈루스에게 모든 용병 민병대를 넘겨서 가혹하게 다루도록 하는 대가로 시라쿠사가 독립과 자유를 보장하도록 하는 게 어떠냐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병사들은 이에 분노했고, 사령관들은 시라쿠사로 달아났다. 군대는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를 새 사령관으로 추대한 뒤 시라쿠사로 돌아왔다. 이후 시라쿠사는 잔혹행위를 자행한 로마와 끝까지 싸우기로 결의하고, 친로마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이에 로마 원로원도 시라쿠사를 응징하기로 대응하고 마르켈루스에게 도시 정벌을 맡겼다. 이리하여 2년에 걸친 시라쿠사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로마군
당시 시칠리아에는 칸나이 전투 때 살아남은 뒤 좌천성 파견을 명령받은 로마 2개 군단이 주둔했고,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지휘하는 퀸퀘레메(quinquereme)[1] 100척이 있었다. 기원전 213년 봄 시칠리아에 도착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칸나이의 패잔병들과 함께 2개 군단을 별도로 이끌었고, 부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가 함대 사령관을 맡아 시라쿠사를 해상에서 포위했다. 시칠리아 포위전에 동원된 로마군 규모는 2만~3만 명의 육군에 100척의 갤리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2. 시라쿠사군
시라쿠사는 15,000명 가량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며, 로마 함대에 필적한 규모의 함선들도 보유했다. 또한 시라쿠사는 바다 쪽과 육지 쪽 모두 완전한 방어를 보장하는 27km의 성벽을 보유했으며, 특히 해안 성벽 아래에는 절벽이 펼쳐져 있어서 접근이 매우 힘들었다. 게다가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한 최신식 방어무기를 충실히 갖추고 있었다. 로마군은 압도적인 전투력을 갖췄지만,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무기 때문에 심한 곤경에 처했다.4. 전투 경과
마르켈루스는 성벽 가까이에 진영을 세우고 참호를 파서 도시를 완전히 포위한 뒤,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엑사필론 성문 쪽으로 돌격했고, 마르켈루스 본인은 활, 슬링,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아크라디나 성문 쪽으로 이동했다. 이와 동시에,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가 이끄는 함대가 해안 성벽 쪽으로 이동하여 삼부카(Sambuca)를 활용하여 성벽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폴리비오스는 삼부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마르켈루스는 모든 배를 8척의 겔리선마다 밧줄로 서로 묶게 했다. 각각의 쌍은 그들의 노를 하나는 좌현에, 다른 하나는 우현 쪽으로 몰아놓고, 남겨진 측면마다 밧줄로 고정했다. 선원들은 남은 노를 바삐 저어 성벽 아래로 접근하였고, 뒤이어 '삼부카'라고 하는 기계를 들어올렸다.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사다리는 4피트 너비의 높이로 만들어졌고, 사다리의 양쪽은 난간으로 보호되었다. 머리 위는 덮개로 보호되었다. 이후 발이 묶인 배의 측면을 가로질러 놓이도록 놓았고, 다른 쪽 끝은 뱃머리 너머로 상당히 돌출되어 서로 닿았다. 돛대 꼭대기에는 도르래를 밧줄로 고정하고, 사다리를 사용하려고 할 때 배의 고물 위에 서 있는 선원들이 사다리 머리에 묶인 밧줄을 당기고 다른 이들은 들어올리는 걸 도왔다. 긴 막대기로 기계가 안정되도록 유지했다.
그런 다음 두 선박의 바깥쪽 노를 사용하여 배를 해안 가까이에 놓은 후 기계를 성벽에 떨어뜨리려 했다. 사다리 꼭대기에는 4명의 병사가 배치되어 삼부카가 성벽 위에 놓이는 걸 막으려는 적군과 싸웠다. 그들은 삼면이 고리버들 방패로 고정된 나무 바닥 위에 서 있었다. 만약 사다리가 벽의 꼭대기 높이 보다 높아지면, 네 사람은 고리 버들 방패를 풀고 성벽이나 답 위로 걸어 나왔다. 뒤이어 동료들이 삼부카를 타고 올라가 성벽에 이르렀다. 이 기계는 자연적인 이유로 '삼부카' 또는 '하프'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들어 올릴 때 배와 사다리의 조합이 그러한 악기의 모양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두 선박의 바깥쪽 노를 사용하여 배를 해안 가까이에 놓은 후 기계를 성벽에 떨어뜨리려 했다. 사다리 꼭대기에는 4명의 병사가 배치되어 삼부카가 성벽 위에 놓이는 걸 막으려는 적군과 싸웠다. 그들은 삼면이 고리버들 방패로 고정된 나무 바닥 위에 서 있었다. 만약 사다리가 벽의 꼭대기 높이 보다 높아지면, 네 사람은 고리 버들 방패를 풀고 성벽이나 답 위로 걸어 나왔다. 뒤이어 동료들이 삼부카를 타고 올라가 성벽에 이르렀다. 이 기계는 자연적인 이유로 '삼부카' 또는 '하프'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들어 올릴 때 배와 사다리의 조합이 그러한 악기의 모양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가 최대 발사 범위 내에서 모든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투석기들을 성벽에 배치해둔 바람에, 로마 함대는 곧 위기에 직면했다. 투석기들은 접근해오는 적 함대를 향해 바위를 정확하게 날렸고, 적이 성벽 가까이 접근해오면 더 작은 기계를 사용해 적을 향해 돌을 발사하여 모조리 파괴했다. 또, '철제 손'을 사용하여 성벽에 가까이 접근하여 삼부카를 성벽 위에 걸려던 적 함선의 뱃머리를 들어올려서 전복시켰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배들은 철제 손에 걸려 공중으로 떠오르기도 했고, 매달려 있는 동안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기도 했으며, 선원들은 모조리 내동댕이쳐졌고 몇몇은 어떻게든 밧줄을 붙들었다가 속절없이 추락했다고 한다. 문헌에 따르면, 성벽 위에 ' 아르키메데스의 거울'이라 불리는 거대한 거울을 배치해 로마 함선을 화공으로 공격했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루키아노스 등에 의해 전해진다. 육상에서도 아르키메데스가 개발한 투석기와 철제 손의 대활약으로 로마군이 만든 공성 무기는 모조리 파괴되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마르켈루스는 이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는 유리잔에 물을 길어 올리는 것처럼 배를 끌어올리고 있고, 내 삼부카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연회장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두들겨 맞는구나."
결국 마르켈루스는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해 적을 굶겨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게 3분의 2의 병력을 맡겨 도시를 계속 포위하게 한 뒤, 자신은 나머지 3분의 1을 이끌고 카르타고인들에게 넘어간 시칠리아 도시들 중 일부를 공략했다. 하지만 카르타고 사령관 히밀코가 25,000명의 보병, 3,000명의 기병, 12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헤라클레아 미노아에 상륙하여 아그리젠토의 항복을 받아낸 뒤 시라쿠사로 진군하자, 그는 일단 시라쿠사로 돌아오다가 도중에 히포크라테스의 시칠리아 기병대와 조우해 격파했다. 이후 카르타고군과 맞설 채비를 갖췄다. 얼마 후 히밀코가 도시에서 약 12km 떨어진 아나포 강 근처에 숙영지를 세웠고, 보밀카르가 이끄는 55척의 카르타고 함대도 시라쿠사 항구 앞에 도착했다.
히밀코는 적의 방비가 굳건한 걸 보고, 섣불리 마르켈루스를 치지 않았다. 보밀카르의 함대와 시칠리아 수비대와 함께 로마군을 협공한다면 충분히 승산 있었지만, 그는 끝내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마르켈루스와 합류하러 오는 로마군을 공격하려 했지만, 로마군이 해안 도로로 진군하는 동안 내륙 산간 길에서 헤매는 바람에 놓쳐버렸다.
추가 병력이 마르켈루스와 합류하자, 히밀코는 병력을 철수시킨 뒤 로마에 복종하는 이웃 도시들을 공략하기로 했다. 카르타고군이 무르간티아의 항복을 받아내어 많은 양의 곡식과 모든 종류의 보급품을 확보하자, 여러 도시가 뒤따라 로마 수비대를 추방하거나 제압하여 카르타고군에 귀순했다. 에나 시에 주둔하고 있던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휘하 로마 수비대는 시민들이 자신들을 카르타고군에게 넘겨주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 야밤에 시민들을 습격하여 학살을 자행한 뒤 마르켈루스와 합류했다. 시칠리아인들은 이 학살에 분노하여 카르타고 편에 대거 가담했지만, 정작 히밀코는 여전히 싸우길 주저하며 아그리겐툼으로 돌아갔다.
이후 로마군은 시라쿠사를 18개월간 계속 포위했고, 카르타고군은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적과 대치했다. 그러자 시라쿠사 주민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친 로마 성향의 인사들은 로마에 귀순해 궁핍해진 생활을 개선하자고 주장했고, 나머지는 끝까지 항전하자고 주장했다. 일부 시라쿠사 귀족들이 마르켈루스와 접촉해 성문을 열어주려 했지만, 곧 발각되어 모조리 처형되었다. 하지만 마르켈루스 역시 카르타고군과 시라쿠사 중 어느 한쪽을 섣불리 꺾지 못해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러던 중 시라쿠사인들이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에게 구원을 청하기 위해 보낸 사절인 다미포가 로마군에 붙들렸다. 그는 스파르타 출신의 지식인으로, 마르켈루스의 회유에 넘어가 시라쿠사의 약점을 알렸다. 그는 시라쿠사인들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기리기 위해 사흘간 기념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며, 이때 포도주를 많이 마실 거라고 밝혔다. 또한 갈레아그라라고 불리는 탑 인근의 트로길로 만 쪽이 성벽의 높이가 가장 낮아서 공략하기 쉬운 편이니, 그쪽에 특공대를 보내라고 덧붙였다. 마르켈루스는 그의 조언에 따라 시민들이 축제를 실컷 즐기고 술에 취해 곯아 떨어졌을 새벽에 1,000명의 특공대를 극비리에 보내어 다미포가 알려준 갈레아그라 탑 부근의 절벽을 기어올라 성벽을 넘게 했다. 별다른 경계를 하지 않던 보초병들은 모조리 살해되었고, 특공대는 근처 성문을 열어 아군이 진입할 수 있게 하였다.
이리하여 외곽 도시는 공략되었고, 시민과 수비대가 도주한 오르티야와 아카디나 등 내부 성채를 재외한 도시 대부분이 로마군의 손에 넘어갔다. 히밀코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시라쿠사를 구하러 출정했지만 마르켈루스의 역공으로 격파되었고, 뒤이은 전염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카르타고군과 함께 있던 히포크라테스 역시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에피키데스는 8개월간 내부 성채에서 항전하다가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시라쿠사를 버리고 카르타고로 망명했다. 결국 수비대가 최종적으로 항복하면서, 시라쿠사는 2년간의 공성전 끝에 로마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마르켈루스는 오랜 공성전을 치른 장병들이 도시를 약탈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시민들에게 신체적 피해를 입히지는 말라고 지시했다. 특히 아르키메데스를 개인적으로 흠모했고 로마에 쓸모 있는 인재라고 여겼기에 그를 꼭 살려두라고 명령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때 아르키메데스는 모래가 잔뜩 깔린 바닥에서 원을 그리는 데 몰두하고 있었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한 로마 병사가 따라오라고 (혹은 꺼지라고) 명령하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μην μου τους κύκλους τάραττε.
내 원을 망치지 마라.[2]
내 원을 망치지 마라.[2]
그러자 병사는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는 수학자에게 분노하여 그를 단칼에 베어버렸다. 정작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애석해 했으며, 명령에 따르지 않은 병사는 엄벌에 처했다고 전해진다.[3]
5. 전투 이후
500여 년간 시칠리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리스 도시국가 시라쿠사는 2년 간의 공성전 끝에 로마에게 정복되었다. 이후 시칠리아에 들어왔던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의 연이은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본국으로 축출되었다. 이로써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두 번 다시 발판을 마련할 수 없었고, 이탈리아 본토에서 로마군과 처절한 항전을 벌이고 있는 한니발 바르카에게 지원할 길이 막막해졌다. 반면 로마는 이베리아와 이탈리아 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기원전 205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프리카를 침공할 때, 시칠리아 섬은 원정군의 중요한 집결지로 사용되었다. 한편 시라쿠사는 로마의 식민도시로 전환된 뒤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극복하고 인구가 다시 늘어나서, 5세기까지 로마 제국의 중요한 도시로서 기능했다.6. 매체에서
- 이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이와아키 히토시의 유레카(일본 만화)가 있다. 적당히 극화되어 있어 실제 사건 전개와는 내용이 좀 다르다.
- 2023년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에서 위르겐 폴러가 나치 독일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안티키테라 기계로 과거로 가서 히틀러를 제거하려 한다. 허나 기계 자체가 시라쿠사 공방전 당시로 세팅되어 있었던 탓에 기원전 213년으로 이동하게 된다.[4] 폴러 일행이 탄 항공기가 하필 어두운 도색이다 보니 양측이 용으로 착각했으며, 로마 함대의 상공을 날며 사격을 가한 바람에 로마군의 표적이 되어버린다. 폴러가 패닉에 빠진 사이 클라버가 고도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람에 공격에 그대로 노출됐고, 그리 내구도가 높지 못하던 시절의 기체라 끝내 추락하고 만다. 탑승객들은 전원 사망했고 기체를 쫓아온 아르키메데스는 추락 현장에서 폴러의 시체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노획한다.[5] 다만 상륙하던 병력 중 일부를 비롯해 함대가 클라버의 무차별 기관총 난사를 받았고, 무엇보다 시라쿠사 측에서 용을 동원했다고 믿은 로마 함대가 겁먹고 공세를 중단한 뒤 및 철수하게 된다.[6]
[1]
양쪽에 각각 50개의 노가 있는
갤리선
[2]
로마 병사가 아르키메데스가 그리던 원을 밟고 있었기 때문. 판본에 따라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나 "네놈이 햇빛을 가리고 있다." 등의 내용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정확한 내용이 뭐였든지간에 일단 로마 병사의 심기를 거스르는 언사를 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3]
이 엄벌 내용도 판본에 따라 다른데, 순식간에 참수를 받았다라는 판본과 채찍형 받았다는 판본이 있다. 그리고 이 채찍형 판본도 다른데,
채찍질 항목에 나오는 수준의 채찍형을 받았다라는 판본이 있다.
[4]
시간 이동 전에 아르키메데스가 당시에 없었던 이론인
대륙이동을 계산 못한 것을 존스가 지적했지만 정작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5]
이 시계는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에 같이 놓여있었다. 정작 폴러는 그걸 확인 못했지만.
[6]
다만 역사는 바뀌지 않았다. 실제 역사에서 로마군은 철수한 뒤 보급로를 차단하는 식으로 우회 공격해 기원전 212년 끝내 시라쿠사를 함락시켰고, 이는 작중으로부터 1년 뒤의 일. 시칠리아 길거리의 인형극에서 용이 로마군을 공격하는 모습이 나오는 걸 보면 본작의 사건은 일종의 전설로 남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