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5 19:39:40

우티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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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1. 개요

기원전 203년,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로마군이 우티카에서 하스드루발 기스코, 시팍스의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과 격돌한 전투.

2. 배경

기원전 206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일리파 전투에서 하스드루발 기스코 - 마고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이베리아 반도를 평정했다. 이후 로마로 귀환한 그는 기원전 205년 집정관에 선출되면서, 북아프리카를 공격해 카르타고를 굴복시켜 전쟁을 끝내겠다는 뜻을 밝혔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등 원로들은 기원전 255년 아프리카 원정을 감행했던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휘하 로마군이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크산티푸스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에게 완패하고 사로잡혔고, 로마 함대가 패잔병들을 이끌고 본국으로 탈출하다가 해난 사고로 막심한 인명 피해를 입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지금은 한니발을 무너뜨리는 데 집중해야지 아프리카를 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물러서지 않고 한니발이 브루티움에서 버티는 상황에서 그를 무너뜨리는 건 기약할 수 없다며,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질 테니 아프리카 원정을 맡겨달라고 요구했다. 민심 역시 오래도록 지속된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고 싶었기에 스키피오의 주장을 열렬히 지지하자, 원로원은 장고 끝에 스키피오를 시칠리아로 파견해 원정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나 별다른 정규군을 맡기지 않았기에, 스키피오는 칸나이 전투 및 여러 전투에서 패전 후 징벌의 의미로 시칠리아에 보내져 근무하고 있던 로마 패잔병들을 끌어모아 1년간 훈련시켰다. 그러면서 절친한 친구이자 부관인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에게 해군을 맡겨 아프리아 해안가를 약탈하게 했다. 이에 카르타고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사절을 보내 필리포스 5세에게 시칠리아를 침공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필리포스 5세는 이미 로마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며 거절했다. 여기에 마고 바르카를 제노바에 상륙시켜 한니발과 가세하게 했으나, 그 역시 인수브리아 전투에서 저지당하고 제노바에서 농성했다.

스키피오는 전통적으로 카르타고에 적대적이었던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와 손잡고 카르타고를 치려 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원로원이 마실리 부족의 왕자 마시니사와 약혼했던 소포니스바를 시팍스와 강제 결혼시키자, 시팍스는 카르타고와 손을 잡기로 했다. 이후 시팍스는 장인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함께 마실리 부족을 협공해 단숨에 제압하고 누미디아 전역을 석권했고, 마시니사는 몇몇 부하만 이끌고 사막에 숨었다. 스키피오는 이 소식을 듣고 실망했지만, 침공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는 수백 척의 수송선에 약 35,000명의 병사를 싣고 카르타고에서 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 파리나 곶에 상륙했다. 그는 인근의 여러 마을에 습격대를 보내 마음껏 약탈하게 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더 이상의 약탈을 막고 적군의 이동을 저지하고자 기병대를 파견했지만, 로마군은 살라에카 마을 인근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여기에 마시니사가 합세하면서, 로마군 기병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상당한 전리품과 노예를 확보한 뒤, 스키피오는 우티카로 진군했다. 그는 우티카를 공략하여 전초 기지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공성 무기를 총동원하고 해군까지 투입했는데도 공격이 실패하자, 우티카를 포위하여 시민들을 말라 죽이려 했다.

며칠 후, 하스두르발 기스코와 시팍스의 대군이 밀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3만 명 이상이었고 시팍스의 군대는 그 두배였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숫자는 과장되었다고 보지만, 어떻게든 로마군을 본토로부터 몰아내고 싶었던 카르타고와 누미디아가 총력전을 벌였을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스키피오는 일단 우티카에서 멀지 않은 카스트라 코르넬리아 곶으로 후퇴한 뒤, 그곳을 요새화하고 시칠리아, 사르데냐, 이베리아에서 온 식량과 방한복을 가지고 겨울 동안 숙영하기로 했다. 하스드루발과 시팍스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숙영지를 세우고 로마군과 대치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함대를 동원해 해상을 봉쇄하여 로마군의 보급로를 끊으려 한다는 걸 알고 선제 공격을 할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적군이 워낙 많아서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상황을 지켜봤다. 그러던 중 시팍스가 협상 중재를 해주겠다고 제안하자, 이에 응해 사절단을 카르타고군에 보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로마와 카르타고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침공군을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스키피오는 이걸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협상을 계속 이어갔다.

그는 처음에 시팍스에게 귀속된 마시니사의 옛 부하들을 회유하려 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사절을 계속 보내서 협상을 벌이는 척하면서 적진의 방비가 어떤 지를 알아내게 했다. 얼마 후, 사절들은 적진의 위치와 방비 체계를 보고했는데, 특히 카르타고군과 누미디아군의 두 숙영지가 나무, 갈대 및 불에 잘 타는 재료로 지어진 오두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스키피오는 야밤에 습격하여 화공을 가하기로 마음먹고, 전군에 전투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3. 전투 경과

폴리비오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우티카 인근의 언덕으로 2,000명의 부대를 이동시켜 도시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내비쳐 적의 정찰병을 속였다. 또다른 소규모 분견대는 우티카 수비대의 공격으로부터 로마군 진영을 보호하기 위해 남겨졌고, 나머지 군대는 야밤에 10km 이상 행군하여 동이 트기 전에 하스드루발과 시팍스의 진영에 도달했다. 스키피오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마시니사의 지휘를 받게 한 뒤, 시팍스의 진영에 불을 지르고 파괴하도록 했다. 이 화공에 누미디아 진영 전체가 불탔고, 수많은 누미디아군이 도주하려다가 적에게 살육되거나 서로 짓밟혀 죽었다. 카르타고인들은 이웃 진영이 불타고 있는 걸 보고 사고가 났다고 여겨 불을 끌려 하다가 스키피오군에게 공격당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하스드루발과 시팍스를 보호하는 소규모 부대 만이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시팍스가 하스드루발에게 도움을 주는 걸 막기 위해 마시니사와 기병대를 분리시켜 시팍스를 견제하게 했다. 이후 전군을 이끌고 하스드루발의 진영을 공격해 적진에 불을 지르고 혼란에 빠진 적을 살육했다. 시팍스는 이웃 진영에서 불길이 치솟는 걸 보고 이변이 생겼다고 판단해 기병대를 파겨내했지만 마시니사에게 패배했다. 이후 스키피오가 자신마저 처리하러 들까 두려워하여 진영을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4. 결과

고대 문헌에 따르면, 3만에서 4만 가량의 카르타고군이 죽었고 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대다수 문헌은 로마군의 손실은 지극히 미미했다고 기술했지만, 디오 카시우스는 뒤늦게 도착한 이베리아 용병부대가 다음날 아침에 공격하여 방심한 로마인 다수를 살상한 뒤 돌아갔다고 기술했다. 이리하여 완승을 거둔 스키피오는 우티카의 복종을 받아낸 뒤 카르타고로 진군하다가 바그라다스에서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과 다시 맞붙는다.( 바그라다스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