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by(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ruby=SCIPIO AFRICANV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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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1] 아프리카누스 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
생몰년도 | 기원전 235년 ~ 기원전 183년 |
출생 |
기원전 235년 로마 공화국 로마 (現 이탈리아 라치오주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리테르눔 (現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나폴리현) |
지위 | 파트리키 |
칭호 | 대(大) 아프리카누스[2]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증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조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아버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삼촌) 폼포니아(어머니)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동생)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장인) 아이밀리아 테르티아(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아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아들) 코르넬리아(딸)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칸나이 전투 ┗ 일리파 전투 ┗ 자마 전투 |
관직 |
로마 공화정
집정관 프린켑스 세나투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05년 |
전임 |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
동기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
후임 |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
임기 | 기원전 194년 |
전임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대 카토 |
동기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 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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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키피오가 스페인을 침공했을 때 그곳은 즉시 그의 우방이 되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칭송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부 그의 인정과 자비가 이끌어낸 결과였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3권 21장 中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감찰관,
로마 원로원의
프린켑스 세나투스. 현대
이탈리아의
국가
마멜리 찬가에도 그 이름이 언급되는 로마 최고의 장군이다.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3권 21장 中
고결한 인품과 더불어 최고의 통솔력을 발휘하며 당대 최강의 명장이었던 한니발 바르카를 격파한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의 정복자이자, 로마가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발판을 마련한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인물을 대(大) 아프리카누스 또는 대(大) 스키피오라고도 하는데, 이 사람의 아들의 양자인 소(小) 아프리카누스와 구분하기 위해서이다.[3] 대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도 스키피오.[4] 사실 기록된 스키피오 가문 사람들 이름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등 세 가지 밖에 없다.
2. 생애
2.1. 가문과 초년기
5세기의 로마 문학가 마크로비우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지팡이를 의미하며, 눈이 먼 아버지를 지팡이 대신 이끌어 준 아들에게 이런 별명이 붙었고,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물려받았다고 한다. 이 가문은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에서도 대표적인 명문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증조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는 기원전 298년 집정관을 역임하여 북이탈리아의 켈트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기원전 280년에 감찰관을 역임했다. 조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기원전 259년 집정관을 역임해 코르시카에서 카르타고군을 쫓아냈다.삼촌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는 기원전 222년 집정관을 맡아 인수브레스족을 격파했고, 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기원전 21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어머니 폼포니아는 노빌레스 출신으로 기원전 233년 집정관에 오른 마니우스 폼포니우스 마토의 딸이다. 형제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있었다. 형제간의 우애는 매우 굳건했다고 하며, 루키우스는 형의 곁을 항상 지켰고 운명을 함께 하였다고 전해진다.
출생 시기는 그의 생애에 관한 수많은 기록 덕분에 정확한 추측이 가능하다. 가령 폴리비오스는 17세 때 아버지를 티키누스 전투에서 구해냈다고 전했으며, 24세 때 히스파니아 전쟁에 지원했다는 등의 기록이 전해진다. 이로 볼 때 기원전 236년 또는 기원전 235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236년일 거라고 본다. 실리우스 이탈리쿠스는 어머니 폼포니아가 그를 낳던 중 사망했다고 기술했고, 대 플리니우스는 그가 어머니의 자궁을 절단하여 꺼내졌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학자들은 루키우스가 푸블리우스보다 어린 나이이고 친형제인 것이 분명하므로 잘못된 기록으로 간주한다. 일부 학자들은 푸블리우스가 아름다운 긴 머리카락을 가져서 카이사르(Caesar)라는 별명으로 불린 것을 대 플리니우스가 '절단하다'라는 의미인 카이소(Caeso)로 오인했을 거라 추정한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푸블리우스는 술집에 자주 들락거리며 유흥을 즐겼다고 한다. 아울루스 겔리우스는 푸블리우스 생전에 활동했던 풍자시인 나이비우스의 아래의 시를 인용하면서 푸블리우스가 어린 시절에 한량처럼 살았다고 밝혔다.
자신의 손으로 많은 영광스러운 업적을 이룩한 사람.
그 공적이 여전히 남아있고 모든 나라가 경탄하는 사람.
아버지가 비옷을 입은 채 불량한 친구로부터 떼어놓아야 했던 사람.
그 공적이 여전히 남아있고 모든 나라가 경탄하는 사람.
아버지가 비옷을 입은 채 불량한 친구로부터 떼어놓아야 했던 사람.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평민 가이우스 라일리우스는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와 어릴 때부터 절친한 친구로서 그의 모든 행적에 동참했다고 한다. 푸블리우스도 그런 라일리우스를 무척 소중하게 여겨서, 그가 없을 때 중요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아 했다고 한다.
2.2. 초기 군사 경력
기원전 218년 로마가 고대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했을 때, 아버지 푸블리우스는 집정관을 맡았다. 추첨 결과 한니발 바르카의 본거지인 히스파니아를 정벌하는 임무를 맡게 된 그는 형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를 레가투스로 삼고 원정에 착수했다. 이때 스키피오도 동행했다. 2개의 로마 군단과 14,000명의 동맹군 보병, 1,6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원정군은 함대에 몸을 싣고 서쪽으로 이동해 마실리아(오늘날 마르세유)에 이르렀다.아버지 푸블리우스는 기병 몇 명을 파견하여 적의 행적을 조사하게 했다. 얼마 후 적 정찰병과 교전하고 돌아온 그들로부터 한니발이 이미 갈리아로 진입한 뒤 론 강에 접근했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이에 군대를 강 어귀에 상륙시킨 뒤 북쪽으로 진군하여 적군과 전투를 벌이려 했지만, 한니발은 그와의 교전을 회피하여 알프스 산맥으로 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푸블리우스는 형에게 군대를 맡겨 히스파니아에 그대로 진군하게 하고, 자신은 배를 타고 북이탈리아에 돌아간 뒤 루키우스 만리우스와 가이우스 아타리우스의 2개 군단을 통솔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그가 도착할 때쯤에 이미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갈리아 부족들 중 일부를 복속시켜서 산맥을 넘을 때 입은 손실을 보충했다.
218년 11월, 양군은 파두스 강의 좌류인 티키누스 강 부근 평원에서 조우했다. 양 진영은 5마일 정도 떨어진 채 대치했는데, 사흘째 되던 날 한니발이 기병을 이끌고 나왔고 푸블리우스는 기병과 경무장 보병을 이끌고 출진했다. 양군은 곧 격돌하여 한동안 팽팽한 접전을 이어갔지만, 누미디아 기병대가 로마군의 후방에 파고들면서 전황이 기울었다. 푸블리우스는 전투 도중 중상을 입고 거의 죽을 뻔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당시 17세였던 아들 스키피오가 기병 몇 명과 함께 말을 몰아 아버지를 죽이려는 자들을 몰아냈다. 이후 전장에서 동료를 구한 공로로 참나무 화환을 수여받았지만, "아버지를 구한 것 자체로 보상받았다"라며 거부했다. 폴리비오스는 스키피오의 절친한 친구이자 평생의 동지였던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의 증언으로 이 일을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반면 루키우스 코엘리우스 안티파테르에 따르면, 리구리아 노예가 중상을 입은 집정관을 구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노예가 구조했다는 것보다 집정관의 아들이자 훗날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과 맞붙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구했다는 이야기를 훨씬 좋아했기에, 후대에는 폴리비오스의 기록만 각광받았다.
스키피오의 행적은 이후 몇년간 전해지지 않았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가 로마군이 끔찍한 패배를 당했을 때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는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전투, 칸나이 전투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리비우스는 스키피오가 칸나이 전투에 참여했다고 밝혔지만, 폴리비오스는 이에 대해 침묵했다. 스키피오 동지들의 증언에 의존했던 폴리비오스가 침묵한 것에 대해, 일부 역사가들은 스키피오가 칸나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영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헤이스 스컬라드(Howard Hayes Scullard)는 스키피오가 칸나이 전투 인근에 위치한 카누시움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담아서 주조한 동전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것을 근거삼아 스키피오가 칸나이 전투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칸나이 전투에서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전투가 끝난 뒤 카누시움에 모인 로마 생존병들은 그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와 다른 젊은 귀족들이 로마는 이제 끝났다고 여기고 이탈리아에서 발칸 반도나 동방으로 달아나서 그곳의 통치자에게 봉사하려 했다. 스키피오는 이들의 계획을 알게 되자 검을 뽑고 공모자들이 모인 방으로 침입해 로마에 그의 모든 생애를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다른 이들에게 똑같은 맹세를 하라고 강요한 뒤 계획의 주동자들을 구금했다고 한다.[5]
스키피오 등은 초기에는 두 집정관이 칸나이 전투에서 모두 전사했다고 여겼지만,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생존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와 연락을 취했다. 바로는 곧바로 겨우 확보한 분견대를 이끌고 카누시움으로 가서 지휘권을 잡았다. 이후 원로원의 요청에 따라 로마로 가면서, 스키피오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아 카누시움을 지키게 했다.
2.3. 혜성같이 등장한 정치 아이돌
이후 스키피오는 정계에 진출하기로 마음먹고 가문과의 상의도 없이 홀로 방년 22세에 기원전 213년 조영관 선거에 출마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 고등 교육을 받고 자라난 붙임성 좋고 잘생긴 명문 귀족 젊은이는 흰 옷을 입고 나가서 입후보 선언만 했는데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와 지지선언에 휩싸였다고 한다.그런데 정치 지망생의 커리어 입문과정으로 여겨지던 조영관은 입후보를 위한 최소 연령이 27세였다. 당연하게도 당시 선거를 주재하던 호민관은 연령제한에 크게 미달한다는 점을 문제삼으며 입후보 등록을 거부했지만 스키피오는 아래와 같이 답했다고 한다.
"여기 모든 시민들이 나의 조영관 선출을 바란다면 나는 충분한 출마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
그 후 호민관은 평민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입후보 등록을 허락했고, 스키피오는 친척인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와 함께 조영관에 당선되었다. 폴리비오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형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형과 함께 조영관에 선출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학자들은 루키우스는 기원전 195년에야 조영관이 되었기 때문에 폴리비오스가 오류를 범했다고 본다. 두 조영관은 호화로운 로마 경기를 조직하고 올리브 오일을 시민들에게 보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212년, 스키피오는 카푸아 공방전에 참여했다. 그리고 기원전 211년 이전에 살리(Salii)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다.
2.4. 히스파니아 원정의 시작
스키피오가 이렇듯 경력을 쌓아가던 기원전 211년, 로마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스키피오의 아버지 푸블리우스와 삼촌 그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스페인 원주민 동맹군의 배신과 카르타고군의 매복 공격으로 참패했고 두 사람 모두 전사했다는 것이다. 원로원은 즉시 그 해의 법무관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군대를 수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네로는 6,0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 그리고 라틴 동맹에서 온 6,000명의 보병과 8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향해 타라코나에 상륙한 뒤 스키피오 형제의 잔당과 합세했다.이후 네로는 한니발 바르카의 동생이며 히스파니아의 주요 지휘관인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일루투르기스와 멘티사 사이에 있는 흑석 근처의 협곡으로 가두었다. 하스드루발은 협곡을 벗어나게 해준다면 카르타고군을 히스파니아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했고, 네로는 협상에 응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온갖 사소한 일로 협상을 질질 끌다가 야밤을 틈타 부하들을 이끌고 작은 길을 통해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날이 밝아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네로는 하스드루발을 추격했으나, 그때는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네로가 하스드루발을 놓쳤다는 소식을 접한 원로원은 그를 다른 사령관으로 교체하고 추가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누구도 이 지휘권을 맡길 원하지 않아 침묵만이 회의장을 감돌았다고 한다. 당시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의 패배로 에브로 강 이남의 로마 세력은 완전히 소멸한 상태였는데, 로마 측에서는 스페인에 파병할 병력을 증강하였으나 그 병력의 규모는 전직 집정관들인 스키피오 형제의 병력보다 규모가 작았으며, 사기도 떨어졌고 병력 구성도 신병이 많았다. 게다가 이탈리아 내에서의 전황도 대단히 심각한 상태여서 이탈리아 남부 전체가 한니발에게 넘어갔으며, 이탈리아 북부 역시 갈리아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거기에 로마의 아래에 위치해 있었던 카푸아 역시 한니발에게 넘어간 상태인 데다가 스페인에서의 로마 세력의 소멸로 인해 곧 스페인 식민지와 카르타고 본국의 원조가 한니발에게 도달할 게 자명했다.
이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히스파니아 전선에 다들 가고 싶어하지 않아 침묵만 흐르고 있을 때, 스키피오가 나섰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연단에 서서 아버지와 삼촌이 지난 8년간 히스파니아에서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것을 설명하며, 그들과 조국 모두를 위해 적의 합당한 복수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원로원은 24살밖에 안 된 그에게 이례적으로 임페리움을 수여했다.[6] 다만 그 해에 선출된 법무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에게 공식적인 지휘권을 주고 대신 실질적인 지휘는 스키피오가 위임받도록 했다.
기원전 210년, 스키피오는 실라누스, 절친한 친구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와 함께 1만 보병, 기병 1,000명, 35척의 함선을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출진했다. 그는 티베르 강 입구에서 배를 타고 출진하여 에트루리아 해안을 따라 피레네 산맥 근처까지 이동해서 군대를 상륙시킨 뒤, 여기서 해안선을 따라 육군과 해군이 나란히 진군하게 했다. 얼마 후, 스키피오는 타라고나에서 현지 군대와 합세했다. 이리하여 이베리아 전선의 로마군은 보병 25,000명, 기병 2,500명, 함선 35척으로 불어났다. 스키피오는 일전의 심각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의를 잃지 않고 에브로 강 이북의 영역을 끝까지 사수한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셉티미우스 외 병사들을 극찬하고, 자신이 조만간 이베리아를 정복할 테니 끝까지 따라달라고 요청했다. 스키피오의 탁월한 언변은 군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병사들은 스키피오 형제가 이루지 못한 사명을 그가 이룰 수 있도록 소임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스키피오는 우선 스페인 북부 타라코나에서 첫번째 겨울을 보내면서 켈티베리아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는 한편, 적군의 배치 상황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 결과 카르타고군이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3개 군대로 나뉜 채 로마군을 막을 태세를 갖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반면, 적의 본거지인 카르타고 노바가 이베리아에서 대규모 함대를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도시라는 것도 파악했고, 적은 로마군이 여기로 조기에 들이닥치지 않으리라고 여기고 3,000명의 수비대만 배치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노바를 급습하기로 작정하고, 기원전 210/209년 겨울 내내 그곳의 지형과 방어 구조 등을 철저히 조사했다. 그는 그곳에서 일했던 어부들로부터 도시 북쪽을 둘러싼 석호는 매일 저녁에 썰물로 물이 얕아지면서, 도시로 걸어서 접근이 가능할 만큼 얕은 갯벌지대가 드러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만약 카르타고 노바를 공략하는 데 성공한다면, 적이 본국으로부터 지원받을 길이 요원해지면서 이베리아 전쟁의 전환점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 노바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초기 공략에 실패할 경우 적군이 되돌아와서 로마군을 섬멸하려 들 위험성이 있었다. 여러모로 도박수였지만, 그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했다.
2.5. 카르타고 노바 공방전
기원전 209년 초, 스키피오는 모든 군대와 함선을 에브로 강 하구에 집결시켰다. 그는 병사들에게 에브로 강을 건너 3개의 카르타고군을 잇따라 격파하여 이베리아 전역을 장악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에게 일부 병력을 맡겨 에브로 강 이북 영토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을 함선에 태우고 출진했다. 스키피오는 자신의 의도를 오직 절친한 친구이며 함대 사령관을 맡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에게만 알렸기에, 다들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 중 한 장수를 먼저 공격할 거라 여겼다. 그래서 스키피오가 이베리아 해안을 따라 계속 항해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다들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고 한다.일주일간의 항해 끝에 카르타고 노바가 모습을 드러내자, 스키피오는 비로소 이곳을 공략하겠다는 뜻을 공표했다. 그는 육지에 상륙한 뒤 도시를 곧바로 포위했고, 가이우스 라일리우스는 함대를 이끌고 항구를 봉쇄했다. 스키피오는 도시 북쪽에 숙영지를 세운 뒤 참호를 파도록 지시했다. 로마군이 난데없이 나타나자, 현지 수비대 지휘관 마고는 화들짝 놀라 전선에 나가있는 3명의 장수들에게 당장 구원해달라고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다. 하지만 세 장수는 이때 카르타고 노바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7], 카르타고 노바까지 전속력으로 돌아온다 해도 10일 이상 걸렸다. 그렇지만 카르타고 노바는 천혜의 요새로서 명성이 높았다. 도시의 남쪽은 바다에 의해 직접적으로 보호되었고, 북쪽은 조수에 따라 깊이가 변하는 큰 석호에 의해 보호되었다. 육로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도시 동쪽의 육지인데 거의 250피트에 달하는 언덕이 있었으며, 도시 자체의 벽도 20피트에 달했다. 따라서 대군으로 공격한다 해도 단시일에 함락하긴 거의 불가능했다.
스키피오는 참호 건설을 마무리한 뒤 회의를 소집하여 부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이곳에 데려온 것은 단지 도시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 도시를 공격하는 것만으로 이베리아 전체를 점령하게 되리라."
그는 이베리아의 모든 부족장과 저명한 혈통의 사람들이 저 도시에 인질로 붙잡혀 있다면서, 그들이 로마인의 손에 넘어간다면 이베리아 부족들은 더 이상 카르타고를 따르지 않을 거라 설명했다. 또한 카르타고 노바는 카르타고인들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자금을 가득히 보관하고 있으며, 전쟁 기계, 무기 및 모든 종류의 전쟁 물자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성벽을 오른 사람들에게 황금 월계관을 씌워줄 것이며, 용맹을 떨친 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그는 자신이 꿈속에서 포세이돈의 계시를 받았다며, 포세이돈이 가르쳐준 방식대로 도시를 공략할 테니 지켜보라고 했다.
도시 수비대장 마고는 적군이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격할 태세를 갖춘 걸 보고 요새와 도시와 고지대에 각각 500명씩 배치하고, 나머지 병사와 주민들에게 다른 지역을 경계하면서 이변이 벌어지면 어디든 달려가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전투 개시를 알리는 나팔 소리를 시작으로 로마군이 공세를 개시했다. 로마군은 성벽에 접근해 사다리를 걸고 올라가려 했지만, 성벽이 워낙 높은 데다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해 많은 희생을 내고도 좀처럼 오르지 못했다. 한편 해상에서는 가이우스 라일리우스가 이끄는 함대가 해안 성벽을 공격했지만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나절 동안 공격을 퍼부었지만 함락될 기미가 없고 피해가 막대해지자, 스키피오는 후퇴 신호를 보냈다. 로마군이 철수하자, 수비대는 몹시 기뻐하며 3명의 카르타고 사령관들이 돌아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이것은 적을 방심시키기 위한 스키피오의 계략이었다. 그는 부상병들을 숙영지에서 쉬게 한 뒤, 숙영지에 배치되어 있던 군단병 500명을 이끌고 도시 북쪽의 큰 연못으로 향했다. 그는 곧 썰물이 되어 석호가 바닥을 드러내고 도시로 이어지는 얕은 갯벌지대가 형성된 걸 확인하고, 즉시 병사들을 이끌고 갯벌을 지나 성벽으로 달려갔다. 병사들은 포세이돈의 계시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확신하며, 스키피오의 지시에 따라 사다리를 가지고 가 북쪽 성벽에 걸었다. 사실 그쪽의 성벽은 석호를 믿고 다른 방면의 성벽에 비해 높이가 낮은 편이었기 때문에, 사다리를 상대적으로 쉽게 걸 수 있었다. 마고는 적이 북쪽 성벽을 오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급히 병력을 보내 막으려 했다. 하지만 스키피오가 사다리를 손수 설치하고 성벽을 오르는 것을 목격한 로마군이 사력을 다해 성벽을 올랐고, 결국 북쪽 성벽은 로마군에게 장악되었다. 성벽에 오른 병사들은 스키피오의 지시에 따라 승리의 나팔을 불었고, 카르타고군은 그 소리를 듣고 동요했다.
그 후 로마군이 성문을 열고 시내로 쏟아져 들어오자, 마고는 시장터로 병사들을 철수시킨 후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대다수 수비대가 전사하고 로마군이 사방에서 포위하자,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항복했다. 스키피오는 도시를 접수한 뒤 약탈을 엄격히 금지하고, 사흘에 걸친 축제를 개최해 시민들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군영을 설치하고 성벽을 수리해 카르타고군의 예상되는 반격에 대비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 노바를 장악하면서 무수한 전리품을 수집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로마군이 접수한 전리품의 무게는 600달란트(19,600kg)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276개의 금잔, 가공하지 않은 은 18,300파운드 및 수많은 은그릇, 밀, 무기, 청동 주괴, 철괴, 항해용 천, 건물 자재를 실은 63척의 수송선, 120개의 대형 투석기, 281개의 소형 투석기, 74개의 군사 휘장, 소형 발리스타와 수많은 검, 창, 활 및 다트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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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의 청년 장군 시절이 드러난 기원전 209년경 카르타헤나에서 발행된 동전 |
스키피오는 모든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눠준 뒤, 도시에 있던 카르타고에 의해 끌려온 모든 인질을 불러모은 후, 각자의 부족으로 돌아가게 했다. 또한 도시에 있는 2,000명의 장인들에게 당분간 로마를 위해 일해달라고 하면서, 전쟁이 끝나면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베리아 부족들은 아무런 대가없이 인질을 돌려주자 무척 기뻐했고, 카르타고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했다. 스키피오는 뒤이어 주변 도시들을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했다. 그러던 중 어느 도시민들이 스키피오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바쳤다. 그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감탄했지만, 단순한 군인으로서 더 환영받을 선물은 없지만 로마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는 여인에게 고향과 부모에 대해 물어본 후,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녀의 아버지에게 연락하여 그녀를 넘겨주고, 약혼자와 결혼하게 했다. 이베리아 주민들은 스키피오의 인자한 성품에 감탄했고, 카르타고에 아직 귀속되어 있는 도시들도 스키피오에게 가담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한편, 로마군이 카르타고 노바를 이틀만에 공략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가 더 이상 세력을 뻗치지 못하게 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카르타고 노바로 향했고,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주변 도시에 사절을 보내 원군이 곧 오니 이탈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마고 바르카는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와 함께 용병을 소집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하지만 섣불리 로마군과 맞붙지 못하고 전열을 가다듬기만 했다. 스키피오 역시 병력을 증강하는 데 공을 들이면서, 기원전 209년은 더 이상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채 지나갔다.
2.6. 바이쿨라 전투
기원전 208년 초, 스키피오는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그는 3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타라코나에서 남쪽으로 진군했다. 여기에 6,000에서 12,000명의 이베리아 부족민도 합세하면서, 그의 병력은 40,000~44,000명으로 늘어났다. 스키피오는 해안가를 따라 카르타고 노바로 빠르게 이동해 수많은 부족들의 복종을 받아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가 이대로 남하하는 걸 방관했다간, 가뜩이나 카르타고 노바 함락 후 동요하는 자기 부대 내 이베리아인들이 대거 이탈하리라 여겼다. 그는 2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이쿨라 언덕에 진영을 세워서 스키피오와 대적하면서,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고 바르카가 원군을 이끌고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바이쿨라는 카르타고 노바 주변의 은광이 공략된 뒤 카르타고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내에 가지고 있는 마지막 은광이 위치한 곳이었기에 매우 중요했다.스키피오가 바이쿨라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가 앞서 보낸 경기병들이 카르타고군 전초 기지를 발견하고 곧장 공격했다. 그곳을 지키던 병사들은 급히 달아나 하스드루발에게 적이 근처에 왔다고 보고했다. 하스드루발은 급히 전투 대형을 결성하게 했지만, 스키피오가 전군을 이끌고 언덕 아래에 포진할 때까지 완료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다른 2개의 카르타고 군대가 인근에 도착하여 자신을 포위 섬멸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기에, 언덕 위에서 허둥지둥하는 적을 이틀간 공격하지 않았다. 이후 인근에 사는 부족민과 정찰병들을 통해 다른 적군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그는 전투를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하스드루발이 누미디아 기병대와 경보병대를 능선으로 보내 스키피오의 부하들을 먼저 공격했다고 한다. 반면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보병대를 능선쪽으로 먼저 보냈다고 한다. 어느 쪽이 먼저 공격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초기 전투가 치열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카르타고군은 언덕을 올라오는 로마군에게 돌과 다트 세례를 퍼부었지만, 로마군은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첫번째 능선에서 격투를 벌인 끝에, 카르타고 경보병대가 패퇴했고, 로마군은 정상을 차지했다. 스키피오는 뒤이어 절친한 친구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에게 적군의 본부가 위치한 두번째 능선의 우측면을 공격하게 했고, 자신은 좌측면을 공격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이 언덕을 곧장 기어올라 공격해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방어 태세를 아직 완비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특히 코끼리들을 중앙 대열에 배치하는 작업도 완료되지 않았기에, 로마군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항전해봐야 승산이 없다고 보고, 로마군이 언덕의 양측면으로 진군해오자 더 많은 경보병대와 일부 중보병대를 파견해 최대한 저지하게 한 뒤, 전 병력의 3분의 2를 이끌고 퇴각했다. 뒤에 남겨진 카르타고군은 그대로 섬멸되거나 항복했다. 리비우스는 8,000명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었다고 기술했고, 폴리비오스는 12,000명이 죽거나 잡혔다고 서술했는데, 현대 역사학자들은 리비우스가 밝힌 수치가 좀더 믿을 만 하다고 본다.
스키피오는 언덕을 완전히 장악한 뒤 그의 숙영지를 카르타고 진영으로 옮겨 적의 구원군과 맞서 싸울 태세를 갖췄다. 며칠 후 전장에 도착한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고 바르카는 로마군이 이미 언덕을 장악한 걸 보고 전투를 회피했다. 그들은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할지 논의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 회의에서 자신이 3만 장병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과 합세할 테니, 두 사람은 히스파니아에 남아서 스키피오와 전투를 지속하라고 권했고, 두 사람 모두 동의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로마군이 점거한 피레네 산맥의 동쪽 고개를 피해 서쪽 고개를 건너 크게 우회하여 알프스로 진격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베티스 계곡으로 이동했고, 마고는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발레아레스 제도로 향했다.
스키피오는 여름 내내 바이쿨라에 머물면서 이 지역의 부족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그는 붙잡힌 모든 원주민들을 몸값 없이 풀어줬고, 족장 인디빌리스에게 적군으로부터 노획한 300마리의 말을 주고 나머지는 이베리아 병사들에게 나눠줬다. 몇몇 부족장들이 그를 "왕"이라 부르자, 그는 "나는 왕이 아니라 임페라토르다."라고 정정했다.[8] 그러다 겨울이 오자 타라코나로 돌아가서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이탈리아로 진군하는 걸 막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원로원으로부터 두고두고 비판받았다. 테오도르 몸젠 역시 스키피오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 로마가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하스드루발이 이탈리아로 데리고 간 병력의 규모와 이탈리아 내에서 그동안 로마가 감수한 피해를 고려하면 이러한 비판이 나오는 것도 사실 당연하다. 당시 로마의 지구전법으로 한니발을 상당히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니발은 남부 이탈리아를 자기 발 아래에 두고 있었으며 로마는 이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탈리아 안에 있는 동맹시들의 인적, 물적 자원도 점차 고갈되고 있는 상태였고, 사기 측면에서도 로마 시민들은 또다른 하밀카르의 아들이 알프스를 넘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공포에 떨었다. 이 상황에서 한니발이 한 번이라도 성공적으로 대규모 지원을 받게될 경우, 그동안 로마가 수년에 걸쳐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 시행한 지연전술의 성과가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이탈리아 전장의 상황이 단번에 뒤집힐 수도 있었다. 괜히 현대 전사가들이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전환점이 된 전투로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 지원군을 전멸시켰던 메타우루스 전투를 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스키피오 입장에서는 카르타고군의 후방 기습을 우려해서 그랬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인식과 다르게 그때까지 스페인의 카르타고 세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리하게 하스드루발을 추격했을 경우 하스드루발, 마고, 기스코에게 3면에서 공격받아 전멸당할 위험이 컸다. 그렇게 된다면 하스드루발을 저지하기는커녕 이탈리아까지 먼 거리를 행군해야 하는 적군의 사기만 올려주는 상황이 된다. 결국 스키피오는 마고와 기스코의 부대를 상대하는 선택을 했고 이로써 적의 추가적인 지원은 저지할 수 있었다. 스키피오의 선택과 집중이 없었더라면 최악의 경우 본인의 부대가 참패한 후 스페인에서 이탈리아로 카르타고군의 지속적인 지원까지 가능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스페인에서 로마군이 사라지고 카르타고 세력만 남게 된다면 마고와 기스코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병력과 물자를 얼마든지 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로원의 비판이 자신들 사정만 생각한 측면은 있다. 애초에 위에 서술되었듯이 스페인에서의 전황은 사령관을 맡으려는 지원자가 나오지 않을 만큼 매우 불리했고 원로원이 스키피오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네로가 스페인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스키피오의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병력이 전멸당한 적이 있다. 그 결과로 스키피오 형제의 10년간의 스페인에서의 노력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갔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만약 아버지와 삼촌의 전철을 밟는다면 스페인에서의 로마군은 그걸로 끝이었다. 당시 로마는 더 이상의 스페인 원정군을 보낼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키피오로서는 최대한 병력을 보전하는 안정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결과적으로 하스드루발의 원정군은 적지인 이탈리아에서 패배하고 전멸하기에 하스드루발의 선택은 오히려 스페인 방위에 투자될 수 있었던 병력과 자금을 빼내어 이탈리아에 투자했다가 스페인까지 몽땅 날려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한니발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던 개전 초와는 달리 하스드루발의 진군 당시 로마는 25개 군단 이상을 총동원할 체제를 갖춘 상태였으며, 이탈리아 남부의 한니발과 합류하는 난이도까지 고려하면 하스드루발의 위협은 충분히 로마 본국에서 대처 가능한 범위에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갈리아인들의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갈리아를 통과하여 이탈리아 내부로 진입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그의 진입로를 예측하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이 이탈리아에 진입했을때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가 이끄는 3만의 로마군이 하스드루발을 기다리고 있었고, 여기에 한니발을 상대하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리비우스를 지원하러 젊고 건장한 체격의 병사들로만 구성된 중무장보병 6천 명과 기병 1천 기를 급히 이끌고 와서 합류했다. 이후 벌어진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의 군대가 완전히 궤멸되었다. 하스드루발 군대의 소멸로 스페인내에서는 2개의 부대,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고 바르카의 군대가 잔존하였다. 이들은 스키피오가 머무는 카르타고 노바를 공격하지 않고 그 해를 보냈는데, 아마도 카르타고 본국이 보낼 병력의 증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7. 일리파 전투
기원전 207년, 스키피오는 재차 이베리아 반도 남쪽으로 진군했다. 마고 바르카가 아프리카에서 파견된 한노와 함께 켈테베리아에 들어와서 용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키피오는 부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에게 1만 병력을 줘서 이들을 몰아내게 했다. 실라누스는 극비리에 오롱기에 주둔한 적에게 접근해, 두 진영 중 켈테베리아인들이 몰려 있는 진영 하나를 습격하여 대부분의 적군을 섬멸했으며, 다른 진영에 있던 카르타고군도 마저 물리쳤다. 한노는 사로잡혔고, 마고 바르카는 간신히 탈출하여 카디스에 있는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합세했다. 스키피오는 여세를 몰아 베티스 남부를 정복하려 했지만, 각 도시에 강력한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어서 일일이 공략하기엔 희생이 많이 따를 거라는 걸 파악하고 타라고나로 철수했다.한편,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고 바르카는 거듭된 패배로 이베리아 부족들의 이반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최후의 한판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206년 봄, 그들은 각지의 도시에 흩어져 있던 병력을 끌어모아 일리파에 집결했다. 그들은 언덕에 올라가서 진영을 치고, 스키피오가 오기를 기다렸다. 스키피오 역시 한판 승부로 카르타고군을 이베리아에서 완전히 몰아내길 희망했기에, 그들의 도전장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로마군이 일리파 평원에 도착한 뒤 진영을 건설하느라 분주하자, 마고 바르카와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는 기병대를 이끌고 이들을 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이를 사전에 예상하고 근처 언덕 뒤에 이탈리아 기병대를 숨겨뒀다. 적 기병대가 몰려들 때, 숨어있던 이탈리아 기병대가 갑자기 뛰쳐나와 그들을 덮쳤다. 격전 끝에 카르타고 기병대가 물러섰다. 그들은 처음에는 전열을 유지한 채 후퇴했지만, 거듭된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이후 양측은 며칠간 평원에 전투 대형을 치고 소규모 접전을 벌이면서 상대방을 살폈다. 이때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적군이 항상 중앙에 군단병을 배치하고 양측면에 이베리아 부족민들을 배치하는 걸 확인하고, 본격적인 전투를 벌일 때도 그렇게 배치할 거라 판단하고 이에 따른 대응을 준비했다. 한편,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항상 아침 늦게 군대를 전장에 내보내는 걸 확인했다. 그는 새벽에 병사들에게 아침 식사를 제공하도록 한 뒤, 식사를 마치자마자 평원으로 진군해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그리고는 기병과 경보병들을 보내 적의 전초 기지에 접근해 투창과 돌멩이를 던지라고 지시했다. 적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깜짝 놀란 카르타고군은 급히 진지에서 뛰쳐나와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중앙의 로마 군단병에 대응하고자 리비아 중보병대를 중앙에 배치하고, 용병으로 고용한 이베리아 부족민들은 전투 코끼리와 함께 양측면에 배치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이날만큼은 딴판으로 배치했다. 즉, 이베리아 동맹군을 중앙에 배치하고, 로마 군단병을 양측면에 배치한 것이다. 이 로마 군단병은 각각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셉티미우스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맡았다.
이윽고 적과 1km도 채 남지 않을 만큼 가까이 접근했을 때, 스키피오는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군단병들은 이베리아 동맹군과 격돌하여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했고, 전투 코끼리들은 벨리테스의 투창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패주하면서 카르타고군 대열을 혼란에 빠뜨렸다. 한편 리비아 중보병대는 팔랑크스 전열을 갖춘 채 천천히 진군했고, 로마군의 중앙 대열에 선 이베리아 병사들은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양익이 격파당하자, 중앙의 리비아 병사들은 포위섬멸될 위기에 몰렸다. 그들은 처음에는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식사도 안하고 뛰쳐나와 힘겨운 격전을 치르느라 체력이 바닥나자 무거운 갑옷과 무기, 방패를 죄다 내팽개치고 진지로 도주했다.
스키피오는 이들을 추격하여 완전 섬멸하려 했으나, 폭우가 갑작스럽게 내리는 바람에 더 이상 추격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다음날 새벽, 카르타고의 생존자들은 몰래 진영을 떠나 베티스 강으로 이동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스키피오는 즉각 추격했고, 알자라페 언덕에서 적을 따라잡았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요새화된 도시에서 농성했다고 한다. 반면 리비우스에 따르면, 언덕에 임시 진영을 세웠다고 한다. 그들은 며칠간 포위되어 맞섰지만 끝내 섬멸되었고, 6,000명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전장을 이탈했다.
2.8. 히스파니아 전쟁 말기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고 바르카는 소수의 측근만 거느린 채 카디스 인근 해안에 배를 타고 하데스로 도주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곧 모든 걸 포기하고 카르타고로 돌아갔지만, 마고는 이베리아를 탈환하기 위해 카르타고 원로원에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베리아 상실을 기정사실로 보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가능한 한 많은 갈리아인을 모집하여 한니발 바르카와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마고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돈을 받았고, 하데스에서 찾은 모든 금과 은을 몰수했다. 이후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 공격해봤지만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하데스로 귀환했을 때 도시에 들어가는 게 허용되지 않자, 도시의 최고 관리들을 유인하여 십자가형에 처한 뒤 이베리아를 완전히 떠났다. 이리하여 카르타고는 이베리아를 영원히 상실했다.한편,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고 바르카가 이베리아를 떠난 걸 확인한 뒤 절친한 친구이자 가장 신뢰하는 부관인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와 함께 누미디아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에게 가서 막대한 선물을 건네며 로마와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고, 시팍스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이후 카르타고 노바로 돌아온 스키피오는 아직도 로마에 귀순하지 않은 일루지아와 카스탁스 시를 공략하기로 했다. 카스탁스와 일루지아 시는 쉽게 항복했고, 그는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셉티미우스에게 베티스 강에서 버티고 있는 아스타파를 공략하게 하고 자신은 카르타고 노바로 돌아갔다. 그러나 셉티미우스가 아스타파에 도착하기 직전에, 아스타파 시민들은 모든 재산을 파괴하고 집단 자살했다.
그 후 스키피오는 셉티미우스에게 카르타고의 마지막 이베리아 요새인 하데스를 육로로 공격하게 했고, 라일리우스에게 7척의 삼단노선과 1척의 대형 겔리선을 이끌고 해상에서 공격하게 했다. 한편, 그는 에브로 강 북쪽의 기지에 3,000명의 병력을 배치했고, 지중해 연안에 카르타고 함대의 접근을 감시하기 위해 8,000명의 병력을 주둔했다. 이제 카르타고 노바에는 스키피오와 7,000명의 병력, 그리고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수크로 기지에 주둔한 병사들 사이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폴리비오스, 리비우스 등 스키피오에게 호의적인 고대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기지에서 오랜 기간 동안 활동하지 않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느라 돈을 낭비했기에, 규율이 깨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 해에 일리파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고, 이후의 소탕 작전도 수행했기에, "오랜 기간 활동하지 않았다"는 설명은 모순된다. 그들의 불만은 스키피오가 약탈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은 데 있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노바 공방전을 시작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년간 작전을 수행하면서 이베리아 주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이기 위해 온건 정책을 시행했다. 카르타고가 잡아뒀던 인질을 아무 대가 없이 풀어줬고, 그들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권리를 존중했으며, 그들의 일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은 이베리아 주민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약탈할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는 그에 대한 병사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그들은 오랜 기간 집을 떠나 머나먼 이베리아에서 힘겨운 전투를 연이어 치렀으니, 승자로서 마땅한 권리를 챙겨야 하는데 스키피오가 막는다고 여겼다. 봉급이 몇 년이나 연체되면서 돈이 부족한 점도 이들의 불만을 부추겼다. 여기에 식량이 부족해서 처벌받을 위험을 감수하고 야간에 진영을 이탈하여 시골로 가서 식량을 가져와야 하는 사정 역시 병사들이 스키피오에게 반감을 품은 원인이었다. 또한 수크로의 많은 병사들은 기원전 218년 또는 217년 이래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복무 기간이 11년 또는 12년에 달했다. 이제 카르타고군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되었으니, 속히 제대하여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수크로의 군인들은 처음에는 트리부누스 밀리툼들에게 자신들의 뜻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들은 사적인 모임에서 설득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정식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트리부누스들이 요구를 들어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스키피오에게 자신들의 뜻을 알려달라는 요청도 거부하자, 병사들의 반감은 증폭되었다. 병사들은 노골적으로 불복종했고, 급여와 보급품을 즉시 지급하고 제대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장교들은 순찰 중에 공격당했고, 규율은 무시당했으며, 장병들은 낮에 노골적으로 군영을 떠나 마을을 돌며 물자를 강제로 빼앗았다. 그러던 중 카르타고 노바에 있던 스키피오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병사들은 이런 상황이라면 스키피오가 자신들을 조기에 어찌하지 못하리라 여기고,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가이우스 아트리우스와 가이우스 알비우스 등 반란 주모자들은 집단 회의를 소집해, 스키피오를 여전히 따르기로 한 7명의 트리부누스들을 추방하고 새 트리부누스들을 선출하며, 스키피오의 통제를 더 이상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면서 스키피오가 사망하여 새 지휘관이 로마에서 부임할 때, 그와 협의하여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로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스키피오는 중병에 걸려 몸져 누워 있으며, 카르타고 노바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실라누스에게는 고작 7천 명 밖에 안되는 병력만 있고, 나머지 군대는 멀리 떨어진 하데스나 에브로 강 북쪽 기지에 있었다. 여기에 이베리아 부족장 인디발리스와 만도니우스가 스키피오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반란을 일으켰으니, 수크로의 일을 신경쓸 여유가 없을 것이었다. 따라서 스키피오 또는 스키피오의 후임자는 자신들을 감히 어찌하지 못하고 타협하려 들리라 예상했다.
스키피오는 수크로에서 추방되어 카르타고 노바로 도망친 7명의 트리부누스들로부터 반란 소식을 접했다. 당시 그에게는 7천 명의 병력만 있었고 이베리아 부족장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섣불리 진압하러 갈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는 7명의 트리부누스들을 다시 수크로로 돌려보내 병사들과 대화를 차분하게 나누도록 했다. 트리부누스들은 반란 행위에 대한 논의를 피하고, 가급적이면 평온한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반란을 일으킨 장병들의 분위기가 상당히 가라앉았다. 그들은 곧 카르타고 노바로 돌아가 반란군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스키피오는 이베리아의 여러 도시에 사절을 보내 반란군에게 필요한 돈과 보급품을 보내게 했다. 돈과 보급품이 충분히 모이자, 수크로의 반란군이 보낸 사절에게 이걸 보여주면서, 그들이 이를 수령할 날짜까지 정해줬다. 반란군은 이에 기뻐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걸 곧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반란군을 방심케 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그는 비밀리에 카르타고 노바에서 7명의 투리부누스들로부터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들에 관한 정보를 전해듣고, 이들을 유인하기로 했다. 먼저, 카르타고 노바에 주둔했던 7천 병사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인디발리스와 만도니우스를 공격하는 명분으로 이동하게 하고, 자신은 홀로 7명의 트리부누스와 호위병만 데리고 수크로로 향해, 반란군이 "병약한 스키피오 혼자서 우리를 맞이하러 오는구나"라고 여기고 완전히 방심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면서 7명의 트리부누스가 각각 다섯 명의 반란 주모자를 밝히게 한 후, 이들을 연회에 초대하게 했다. 가이우스 아트리우스, 가이우스 알비우스 등 35명의 반란 주모자들은 아무런 경계도 품지 않고 저녁 연회에 기꺼이 응했다가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해졌을 때 스키피오의 지시를 받은 트리부누스와 호위병들에게 체포된 뒤 족쇄에 채워진 채 감옥에 수감되었다.
다음날 아침, 스키피오는 8천 명의 수크로 반란군을 한 자리에 소집시켰다. 그들은 중병에 걸렸다던 스키피오가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크게 놀라며, 그제야 중병에 걸렸다는 게 헛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때 이베리아 부족들을 토벌하러 간다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이끄는 7천 장병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이들을 에워쌌다. 실은 극비리에 방향을 틀어 수크로 주변에 매복한 것이었다. 주모자들이 모조리 체포된 데다 스키피오에게 여전한 충성을 바치는 장병들이 검으로 방패를 내리치며 위협하자, 반란군은 겁에 질렸다. 스키피오는 그들이 공포에 떠는 가운데 35명의 주모자들을 일일이 끌어내어 몽둥이 세례를 받게 한 뒤 기둥에 묶은 채 참수형에 처했다.
그 후 스키피오는 자신이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이베리아를 정복해 모두에게 영광을 안겨줬거늘 반란을 일으킨 그들을 질책하면서, 밀린 급료를 주겠지만 그 전에 군대의 휘장을 도끼로 모조리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스키피오에게 압도당한 반란군 장병들은 충성을 재차 맹세했고, 스키피오는 더 이상의 처벌을 하지 않았다. 이후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이베리아 부족장들을 토벌하러 출진하자, 인디발리스와 만도니우스는 잘못된 정보만 믿고 경솔하게 행동한 점을 사과하면서 귀순했다. 스키피오는 이번에도 그들을 너그럽게 용서해줬다.
이리하여 수크로 반란을 무사히 수습한 뒤, 스키피오는 히스파니아에 잔존한 카르타고 세력을 소멸시키고자 공세를 취한 끝에 히스파니아 최남단의 하데스를 공략하면서 작전을 완수했다. 또한 스키피오는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와 협상해 앞으로는 로마에 맞서지 않을 것이며 부족 지도자들과 협의해 카르타고와의 동맹을 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후 로마로 얼른 돌아가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기를 원했던 스키피오는 정복한 부족의 땅에 수비대를 두지 않고 무장 해제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인질도 잡지 않았다. 이로 인해 스키피오가 떠난 직후 히스파니아 부족들이 로마의 간섭을 거부하며 반기를 들었다. 스키피오의 정적들은 이 점을 들어 스키피오가 권력욕에 사로잡혀 마땅히 취해야 할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후임자들을 힘들게 했다고 비판했다.
2.9. 첫번째 집정관, 그리고 아프리카 원정의 시작
기원전 206년 말 로마로 귀환한 스키피오는 4개의 적군을 격파하고 히스파니아를 평정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개선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원로원은 공식적인 지휘권은 그가 아니라 실바누스에게 있었다며 거부했다. 스키피오는 단지 황소 100마리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의식인 헤카툼을 통해서만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학자들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등 스키피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품은 원로 의원들이 이러한 결정을 주도했다고 본다.원로원 의원들이 이렇듯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 것과는 달리, 로마 시민들은 스키피오를 기쁘게 맞이했다. 모든 군중이 그의 집에 모여서 그의 이름을 연호했고, 그가 적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 아프리카로 나아가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 확신했다. 이렇듯 민심이 쏠린 덕분에, 스키피오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와 함께 집정관에 쉽사리 당선되었다. 크라수스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이유로 이탈리아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브루티움을 배정받았고, 스키피오는 제비 뽑기 없이 시칠리아를 배정받았다.
스키피오는 당선 후 원로원 회의에서 카르타고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해 아프리카 원정을 감행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에 파비우스가 격렬히 반대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파비우스는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을 무너뜨리는 것뿐이며, 아프리카 원정은 레굴루스의 패배를 되풀이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등도 파비우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스키피오가 민중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아프리카 원정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단언하며 민회를 설득했고, 전쟁을 얼른 끝내고 싶었던 민중의 열띤 호응 덕분에 스키피오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다만 원로원은 해외 원정을 승인하면서도 징병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직 칸나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탈리아로 돌아갈 권리를 박탈당한 채 시칠리아에 보내진 부대와 자원병들만 이끌어야 했다. 스키피오는 자원병 7,000명을 모으고 에트루리아인들로부터 많은 식량, 함대 건설을 위한 목재, 무기 및 군사 장비를 제공받았다. 이후 시칠리아로 건너가 주민들의 지원을 얻었고, 시칠리아에서의 전쟁 도중에 손실된 재산을 그리스인들에게 돌려줬다. 한편, 라일리우스는 스키피오를 따라간 뒤 시칠리아에 주둔한 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해안을 급습하여 약탈하는 한편 적의 방비를 정탐했다. 또한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를 만나 동맹을 맺고, 스키피오가 상륙할 때 기병대를 이끌고 합류하도록 했다. 시팍스는 스키피오에게 자신이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으며 아프리카에 상륙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스키피오는 이를 모두에게 숨겼다.
그러던 중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던 데켐브리(Decemvir)들은 "이다 신들의 어머니를 로마로 모셔와서 로마를 돕게 한다면 낯선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추방될 것"이라는 예언이 예언서에 적혀 있다고 발표했다. 이에 원로원은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축출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키벨레의 상석을 프리기아에서 모셔오기로 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204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의 주관하에 키벨레의 상석을 로마로 가져오는 사절단이 결성되었다. 이때 상석을 직접 대면할 '국가의 가장 합당한 시민'으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가 뽑혔다. 아직 최하위 행정관인 재무관도 맡지 않았을 정도로 나이가 어린 그가 선출된 이유에 대해, 리비우스는 "그 경위는 고대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며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밝혔다.
현대의 여러 학자들은 당시 히스파니아 전선을 마무리하고 로마로 귀환하여 집정관에 선출된 뒤 아프리카 원정을 준비하던 스키피오가 신들이 이번 원정을 보증한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각인시키고 스키피오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사촌인 나시카가 뽑히도록 유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세속에 때묻지 않은 젊은이가 여신의 상석을 짊어진다면 신께서 용납해주실 거라는 로마인들의 믿음도 한 몫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오스티아로 가서 키벨레의 상석을 직접 가져와 클라우디아 또는 발레리아라는 귀족 여인에게 넘겼다. 그는 훗날 키벨레 여신을 위해 신전을 세웠다.
그런데 원정 준비가 착실하게 이뤄지던 와중에 불상사가 발생했다. 로크리 사절들이 로마에 찾아와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레가투스인 퀸투스 플레미니우스가 자기들 도시에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규탄한 것이다. 이에 파비우스는 스키피오가 군대의 기강을 엉망으로 이끌고 약탈자들을 양성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로마로 소환하고 지휘권을 박탈하는 안건을 민회에 제안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당장 조치를 취하는 대신 위원회를 조직해 이 문제를 조사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필요하다면 스키피오를 체포하고, 이미 아프리카로 출발했다면 돌아오라고 지시하려 했지만, 위원회 내의 친 스키피오 인사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스키피오는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은 게 분명하며, 큰 전쟁을 눈앞에 둔 장군을 압박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원로원은 이에 동의해 스키피오가 아프리카 원정을 계속 이어가게 했다.
2.10. 우티카 전투
기원전 204년 여름, 스키피오는 수백 척의 수송선에 약 35,000명의 병사를 싣고 카르타고에서 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 파리나 곶에 상륙했다. 이후 마시니사가 합류하기를 기다렸지만, 얼마 후 상황이 급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카르타고 원로원은 시팍스를 회유하기 위해 마시니사와 약혼했던 소포니스바를 시팍스와 강제 결혼시켰다. 이에 시팍스는 카르타고와 손을 잡기로 하고, 장인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함께 마시니사가 이끄는 마실리 부족을 협공해 단숨에 제압하고 누미디아 전역을 석권했고, 마시니사는 몇몇 부하만 이끌고 사막에 숨었다. 그러다가 스키피오가 상륙하자 그들을 이끌고 스키피오에 가담했다. 스키피오는 이 사실에 실망했지만 침공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스키피오는 인근의 여러 마을에 습격대를 보내 마음껏 약탈하게 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더 이상의 약탈을 막고 적군의 이동을 저지하고자 기병대를 파견했지만, 로마군은 살라에카 마을 인근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여기에 마시니사가 합세하면서, 로마군 기병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상당한 전리품과 노예를 확보한 뒤, 스키피오는 우티카로 진군했다. 그는 우티카를 공략하여 전초 기지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공성 무기를 총동원하고 해군까지 투입했는데도 공격이 실패하자, 우티카를 포위하여 시민들을 말라 죽이려 했다.
며칠 후, 하스두르발 기스코와 시팍스의 대군이 밀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리비우스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3만 명 이상이었고 시팍스의 군대는 그 두배였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숫자는 과장되었다고 보지만, 어떻게든 로마군을 본토로부터 몰아내고 싶었던 카르타고와 누미디아가 총력전을 벌였을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스키피오는 일단 우티카에서 멀지 않은 카스트라 코르넬리아 곶으로 후퇴한 뒤, 그곳을 요새화하고 시칠리아, 사르데냐, 이베리아에서 온 식량과 방한복을 가지고 겨울 동안 숙영하기로 했다. 하스드루발과 시팍스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숙영지를 세우고 로마군과 대치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함대를 동원해 해상을 봉쇄하여 로마군의 보급로를 끊으려 한다는 걸 알고 선제 공격을 할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적군이 워낙 많아서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상황을 지켜봤다. 그러던 중 시팍스가 협상 중재를 해주겠다고 제안하자, 이에 응해 사절단을 카르타고군에 보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로마와 카르타고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침공군을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스키피오는 이걸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협상을 계속 이어갔다.
그는 처음에 시팍스에게 귀속된 마시니사의 옛 부하들을 회유하려 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사절을 계속 보내서 협상을 벌이는 척하면서 적진의 방비가 어떤 지를 알아내게 했다. 얼마 후, 사절들은 적진의 위치와 방비 체계를 보고했는데, 특히 카르타고군과 누미디아군의 두 숙영지가 나무, 갈대 및 불에 잘 타는 재료로 지어진 오두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스키피오는 야밤에 습격하여 화공을 가하기로 마음먹고, 전군에 전투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스키피오는 우티카 인근의 언덕으로 2,000명의 부대를 이동시켜 도시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내비쳐 적의 정찰병을 속였다. 또다른 소규모 분견대는 우티카 수비대의 공격으로부터 로마군 진영을 보호하기 위해 남겨졌고, 나머지 군대는 야밤에 10km 이상 행군하여 동이 트기 전에 하스드루발과 시팍스의 진영에 도달했다. 스키피오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라일리우스와 마시니사의 지휘를 받게 한 뒤, 시팍스의 진영에 불을 지르고 파괴하도록 했다. 이 화공에 누미디아 진영 전체가 불탔고, 수많은 누미디아군이 도주하려다가 적에게 살육되거나 서로 짓밟혀 죽었다. 카르타고인들은 이웃 진영이 불타고 있는 걸 보고 사고가 났다고 여겨 불을 끌려 하다가 스키피오군에게 공격당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하스드루발과 시팍스를 보호하는 소규모 부대 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아피아노스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스키피오는 시팍스가 하스드루발에게 도움을 주는 걸 막기 위해 마시니사와 기병대를 분리시켜 시팍스를 견제하게 했다. 이후 전군을 이끌고 하스드루발의 진영을 공격해 적진에 불을 지르고 혼란에 빠진 적을 살육했다. 시팍스는 이웃 진영에서 불길이 치솟는 걸 보고 이변이 생겼다고 판단해 기병대를 파견했지만 마시니사에게 패배했다. 이후 스키피오가 자신마저 처리하러 들까 두려워하여 진영을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3만에서 4만 가량의 카르타고군이 죽었고 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대다수 문헌은 로마군의 손실은 지극히 미미했다고 기술했지만, 디오 카시우스는 뒤늦게 도착한 이베리아 용병부대가 다음날 아침에 공격하여 방심한 로마인 다수를 살상한 뒤 돌아갔다고 기술했다.
2.11. 대평원 전투
우티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스키피오는 전의를 상실한 우티카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얼마 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고용된 4,000명의 켈티베리아 용병대가 카르타고에 도착하자, 카르타고인들은 스키피오의 군대가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진격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전투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시팍스 역시 누미디아에서 병력을 규합하여 카르타고군과 합세해, 총 3만의 군대를 확보했다. 기원전 203년, 스키피오는 본국으로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휘권을 유지한다는 통보를 받은 뒤 우티카에서 출진해 카르타고로 진격했다. 양군은 50여 년전 로마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겼던 바그라다스 평원에서 조우했다.카르타고군 사령관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누미디아 왕 시팍스는 켈테베리아 용병대를 중앙에 배치했고, 카르타고-누미디아 보병과 기병을 측면에 배치했다. 스키피오는 이에 맞서 하스타티가 전열에, 프린키페스가 중간에, 트리아리가 후방에 배치되는 대열을 편성하고, 기병대를 본대에서 약간 떨어진 양측면에 배치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 기병대는 적의 측면에 배치된 카르타고-누미디아 기병대를 향해 맹돌격하여 단숨에 무너뜨리고, 중앙 대열에 포진한 켈테베리아 용병대의 측면을 공격했다. 그러나 용병대가 맹렬히 저항하는 바람에 상당한 손실을 입고 패퇴했다.
이에 스키피오는 라일리우스에게 보병대를 이끌고 용병대를 쳐부수라고 명령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가 용병대와 전면에서 맞붙는 사이, 트리아리가 용병대의 측면으로 이동하여 공세를 퍼부었다. 용병대는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귀순을 청했다. 그러나 앞서 그들에게 입은 손실이 큰 것에 분노한 스키피오는 섬멸 명령을 내렸고, 용병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극소수 외에 전멸했다.
전투에서 완패한 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카르타고로 달아났고 시팍스는 키르타로 도피했다. 스키피오는 본대를 이끌고 카르타고를 압박했고,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와 마시니사는 키르타로 쳐들어갔다. 시팍스는 키르타 부근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였으나 끝내 패배했고, 도주하려다가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로마군에게 체포되었다. 마시니사는 키르타에 입성한 뒤 누미디아의 군주로 재등극했다. 이후 약혼녀였던 소포니스바와 재회하자마자 결혼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사로잡힌 시팍스로부터 자신이 로마를 배신한 것은 소포니스바가 자신을 유혹했기 때문이며, 그녀는 마시니사더러 카르타고와 손잡으라고 설득할 것이라는 경고를 접한 후 그녀에게 경계심을 품었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에게 소포니스바가 시팍스의 배신에 연루되었으니 로마로 끌고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며 그녀를 넘길 것을 요구했다. 마시니사는 자비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자신이 그녀를 처리할 테니 말미를 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냈다. 그 후 마시니사는 충직한 하인에게 독약과 전말을 설명하는 편지를 건넨 후 소포니스바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소포니스바는 하인으로부터 이를 전달받은 직후 독약을 마셨다. 소포니스바가 자살한 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를 누미디아의 유일한 왕으로 선포했고 로마 원로원도 이를 추인했다. 그 후 마시니사는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로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맹세했다.
대평원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시 인근의 투네트에 진을 쳤다. 이에 압박감을 느낀 카르타고 정부는 스키피오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요청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과 마고 바르카 형제를 카르타고에 귀환시키고 히스파니아를 완전히 포기하며, 탈영병 및 로마에서 도망쳐 온 노예를 돌려보내고, 포로를 교환하며, 해군은 20척으로 축소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등의 조건을 제시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고 로마에 사절을 보내는 한편, 한니발과 마고에게 조속히 돌아오라고 촉구했다.
이후의 상황에 대해 리비우스와 아피아노스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인들이 한니발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스키피오에게 전쟁을 지속하라고 명령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원로원은 스키피오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뒀고 스키피오는 평화를 이루기로 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인들이 폭풍으로 피해를 입은 로마 함대를 공격하고 스키피오의 사절을 모욕하면서 휴전이 깨졌다고 한다. 이후 한니발이 도착하자,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이라면 스키피오를 거뜬히 물리칠 수 있으리라 여기고 전쟁을 감행했다.
2.12. 자마 전투
기원전 202년 12월 중순,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자마 평원에서 조우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한니발이 회담을 요청했고 스키피오는 받아들였다.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당신이 이긴다 한들 당신의 명예에는 그닥 중요한 것이 더해질 것도 없을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일을 그르치면 당신은 여태까지 이룬 모든 영예를 잃게 되오. 그러면 여태까지 당신을 설득하려 한 나는 뭐가 되겠소?"
한니발은 이와 더불어 시칠리아, 사르데냐, 이베리아, 리비아와 로마 사이에 가로놓인 모든 섬들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카르타고가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로마인들이 이미 한니발이 거론한 영토를 모두 통제하고 있으며 최근에 카르타고인들이 사절들에게 모욕을 가했기 때문에 조약이 더 엄격한 조건으로 체결되어야 한다며 거부했다. 결국 회담은 결론없이 끝났다.
자마 전투에 투입된 양군의 보병은 각각 로마군 2만 3천+누미디아 보병 6천 대 카르타고군 4만 1천명이었다. 로마군은 누미디아 기병 4천 명을 포함한 강력한 기병대를 보유했지만, 카르타고군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 한니발은 시팍스의 아들로 누미디아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던 베르미나로부터 지원 약속을 받았지만, 베르미나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이에 한니발은 전투 코끼리 80마리와 오랫동안 자신을 따라 수많은 전장에서 활약한 숙련병들의 위력에 운명을 맡기기로 했다. 스키피오 역시 코끼리를 경계해, 평소처럼 체커판 패턴이 아닌 직선 행으로 전투 대열을 정렬했고, 부대 사이사이의 간격을 넓게 둬서 전투 코끼리가 돌진하다가 그 빈 공간을 그대로 통과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한편 한니발은 보병대를 3열로 배치하여 경험이 가장 적은 부대를 맨 앞에 배치하고 숙련병들을 후방에 배치했다.
전투는 전투 코끼리의 돌격으로 시작되었다. 이 코끼리들은 로마 병사들이 제때에 피하는 바람에 빈 공간을 그대로 통과했다가 벨리테스에 제압되었고, 일부는 거듭되는 투창 세례에 흥분한 나머지 좌측면에 있는 카르타고 기병대로 달려가서 타격을 입혔다. 로카 기병대는 이 상황을 보고 즉시 출격해 적 기병대를 공격했다. 이에 사전에 한니발의 지시를 받은 카르타고 기병들은 잠시 저항하는 척 했다가 일부러 멀리 후퇴했고, 로마 기병대는 그런 그들을 추격하느라 상당한 시간 동안 전장을 떠나야 했다.
그 후 양군 보병대가 격돌했다. 로마의 하스타티는 카르타고의 첫번째 대열을 돌파했지만 카르타고의 두번째 대열 앞에서 막혔고, 카르타고의 첫번째 대열은 즉시 수습되어 측면으로 이동했다. 이후 카르타고인들은 하스타티의 돌격을 잘 막아냈고, 뒤이어 한니발을 오랫동안 따른 숙련병들이 투입되어 로마 보병대 중앙으로 진격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군 1, 2열을 양익에 투입하여 스키피오가 이들을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로 상대하게 하고 중앙에 하스타티를 배치하게 유도하여 중앙 돌파를 하려했지만, 스키피오는 하스타티를 양익으로 투입한 뒤 프린키페스, 트리아리를 중앙에 투입해 전투 대열을 길게 늘어서게 함으로써 하스타티의 안전과 중앙돌파의 위험을 사전에 방지했다.
이후 수 시간 동안 이어진 격전으로도 양군은 서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그 때 라일리우스와 마시니사의 기병대가 적 기병대를 멀리 쫓아내고 돌아와서 카르타고 보병대의 후방을 공격했다. 폴리비오스는 만약 그들이 더 늦게 전장에 나타났다면, 한니발이 이겼을 거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니발에게 애석하게도 운명은 그를 외면했고, 이후의 전투는 로마군의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한니발은 부하들의 헌신 덕분에 전장에서 빠져나왔지만, 카르타고군 최소 2만 여 명 이상이 이날 전사했고 나머지도 대부분 포로로 잡히며 전멸했다. 로마군의 사상자는 1,500 ~ 2,500명, 누미디아군은 2,500명 정도였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한니발을 오래도록 따랐던 숙련병 전원은 한 명도 빠짐없이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2.13. 전쟁 종결
스키피오는 자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레가투스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육군을 맡겨 카르타고 시를 포위하게 했고, 자신은 해군을 이끌고 항구로 접근했다. 이때 카르타고 사절이 찾아와서 평화 협상을 재개하자고 요청하자, 스키피오는 투네트를 협상 장소로 지정했다. 다음 날, 스키피오는 시팍스의 아들로 사전에 자마 전투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가 한참 후에야 도착한 베르미나의 누미디아군을 공격해 15,000명을 사살하고 12,000명을 생포했다. 베르미나는 소수의 기병만 이끌고 탈출에 성공한 뒤 사막에 몸을 숨겼다.[9]한편, 로마에서는 집정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원로원에 스키피오가 너무 많은 명성을 챙기게 내버려두면 위험하다며 아프리카 방면 임페리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민회는 스키피오가 원정군을 계속 지휘하게 하기로 결의했지만,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티베리우스는 5단 노선(Quinquereme) 50척에 군대를 태워서 아프리카에 상륙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정을 준비했다. 그러다 함대가 출항하기 전, 한니발 바르카가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는 카르타고가 항복을 선언하기 전에 군공을 세우기로 마음먹고 출항해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거쳐 아프리카 해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두 번의 폭풍을 겪고 칼리아리에서 배 수리에 전념해야 했다. 스키피오는 이 소식을 접하자 임페리움을 잃기 전에 카르타고와의 평화 협약을 서둘러 체결하기로 하고 요구 조건을 비교적 온건하게 설정했다.
1. 카르타고는 아프리카의 모든 소유물을 유지하며 법을 유지할 수 있다. 로마 수비대는 아프리카에 주둔하지 않는다.
2.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 없이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칠 수 없다.
3. 삼단노선 10척을 제외한 모든 해군을 로마에 넘긴다.
4. 은화로 10,0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마시니사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넘긴다.
5. 종전의 협약 대로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의 지배권을 로마에 완전히 넘기고 다시는 이 지역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2.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 없이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칠 수 없다.
3. 삼단노선 10척을 제외한 모든 해군을 로마에 넘긴다.
4. 은화로 10,0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마시니사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넘긴다.
5. 종전의 협약 대로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의 지배권을 로마에 완전히 넘기고 다시는 이 지역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카르타고인들은 의회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강경파는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지만, 한니발이 강경파 한 명을 연단에서 강제로 끌어내린 뒤 이제 더는 승산이 없으니 평화 협약을 이대로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협약을 맺는 쪽으로 의견이 쏠렸다. 이리하여 협약이 성립된 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함대를 끌어내어 불태웠고, 4천 명의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카르타고로부터 넘겨받은 탈영병들 중 이탈리아인들을 참수하고 로마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레기움에서 육로를 통해 로마로 이동하면서 수많은 군중의 환호를 받았다. 로마에 도착한 후 화려하고 웅장한 개선식을 사흘간 거행하고 아그노멘인 '아프리카누스(Africanus: 아프리카 정복자)'를 수여받았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일각에서는 그를 '스키피오 대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2.14. 로마 최강의 권력자
스키피오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종결 직후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그의 퇴역병들은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에서 복무한 해마다 유게룸(Jugerum: 고대 로마의 토지 측정 단위. 소 한 마리가 밭을 갈 수 있는 범위) 2개를 받았고, 토지 할당을 담당하는 위원회는 스키피오 지지자들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기원전 190년대에 등장한 대부분의 집정관과 법무관은 스키피오와 가까운 인사들에게 돌아갔다. 로마 시민과 군대 모두 스키피오를 존경했기 때문에, 다수의 정치인들은 그와 친분을 맺으려 노력했다.게다가 그는 전쟁 과정에서 대단한 부자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신진 인사들을 거리낌없이 후원해 자기 사람으로 삼았다. 기원전 199년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으며, 동료 감찰관으로부터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정되었다. 두 사람은 원로원이나 에퀴테스 중 단 한 사람도 추방하지 않았고 단 한 건의 비판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감찰관 임기가 만료된 후, 스키피오는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지적 활동에 집중하면서도 로마 정계에 영향력을 유지했다.
이렇듯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그는 기원전 195년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해에 카르타고 정부에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힘을 합쳐 로마를 도모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한니발의 인도를 요구하자는 안건이 올라오자, 스키피오는 이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퀸투스 테렌티우스 쿠리오가 카르타고로 가서 한니발의 인도를 요구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한니발이 동방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또한 기원전 195년에 스키피오를 경계하는 파비우스 분파의 저명한 대표자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와 플라쿠스의 후견인인 대 카토가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카토는 아프리카 원정 중 재무관을 역임하면서 스키피오의 사치 행각 때문에 병사들이 타락했다며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었다. 스키피오는 그런 그를 이탈리아로 돌려보냈고, 이후로 두 사람은 평생 다투었다. 카토는 1년간 집정관 임기를 수행한 뒤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로마에 복종하지 않는 마을들을 파괴하기 위해 여러 차례 원정을 감행해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스키피오는 카토가 히스파니아에서 잔혹행위를 서슴지 않는다고 규탄하며 로마로 즉각 소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본인이 히스파니아 주민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그들이 로마를 따르게 만들었는데 카토가 무력으로 그들을 살육하는 것에 반감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로원은 스키피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임기를 마치고 귀환한 카토가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기원전 194년, 스키피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의 위협이 가시화된 상황 덕분에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히스파니아를 임지로 배정받기를 바랐다고 한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마케도니아를 배정받아서 안티오코스 3세와 대결하길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쪽에도 부임하지 못했고 단지 이탈리아에서 동료 집정관과 함께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스키피오는 이탈리아 남부 해안지대에 7개의 식민도시를 건설해 안티오코스 3세와 한니발이 상륙을 시도하는 것을 막게 했다. 또한 로마 경기에서 원로원 의원에게 특별 좌석을 할당했다. 이 조치는 평민들 사이에 불만을 일으켰고, 스키피오의 인기는 조금씩 떨어졌다.
기원전 193년, 스키피오는 다른 두 귀족과 함께 카르타고와 누미디아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났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사절들은 문제를 조사하고 논쟁자들의 말을 들은 뒤 어느 쪽이든 옳고 그름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그대로 두었다. 이는 아프리카가 불안정한 것이 로마에 유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키피오는 그러면서도 자신과 협력했던 마시니사를 은근히 두둔했고, 마시니사는 이후로 40여 년간 로마 정부의 방조에 힘입어 세력을 크게 확장하며 카르타고를 압박했다. 스키피오는 로마에 돌아온 뒤 집정관 선거에서 사촌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와 절친한 친구 가이우스 라일리우스를 지원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둘 다 선거에서 패배했고,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기원전 193년 말,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가 이끄는 사절단이 안티오코스 3세를 찾아가서 그리스로 넘어오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무시당했다. 리비우스, 아피아노스, 플루타르코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도 이 사절단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이때 사절들은 에페소스에서 한니발과 접촉했다. 리비우스는 두 사람간의 대화를 이렇게 묘사했다.
스키피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요. 적은 병력을 가지고 대군을 무찔렀고 인간이 일찍이 가보지 못한 세상의 끝까지 갔으니까.
스키피오: 두 번째로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에페이로스의 피로스요. 그는 진영을 잘 짜는 방법을 처음 생각해냈소. 지형에 따라 군대를 잘 활용하기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소. 그는 사람들의 지원을 잘 얻어냈고 그래서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에도 이탈리아 사람들의 지원을 받았지. 그들이 그 땅에서 잘 살아왔는데도.
스키피오: 세 번째로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그건 당연히 나요.
스키피오: (웃음을 터트리며) 만약 당신이 자마에서 나를 이겼다면?
한니발: 나의 위대함이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능가했겠지.[10]
한니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요. 적은 병력을 가지고 대군을 무찔렀고 인간이 일찍이 가보지 못한 세상의 끝까지 갔으니까.
스키피오: 두 번째로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에페이로스의 피로스요. 그는 진영을 잘 짜는 방법을 처음 생각해냈소. 지형에 따라 군대를 잘 활용하기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소. 그는 사람들의 지원을 잘 얻어냈고 그래서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에도 이탈리아 사람들의 지원을 받았지. 그들이 그 땅에서 잘 살아왔는데도.
스키피오: 세 번째로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그건 당연히 나요.
스키피오: (웃음을 터트리며) 만약 당신이 자마에서 나를 이겼다면?
한니발: 나의 위대함이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능가했겠지.[10]
플루타르코스는 이 때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에페소스에서 다시 만났고, 함께 걸을 때 한니발이 앞서 갔다. 명예의 자리는 승자인 스키피오에게 더 적합했지만, 스키피오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침묵하고 걸었다. 그는 장군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스키피오가 최고의 장군이 누구냐고 묻자, 한니발은 장군들 중 최고는
피로스이고 스키피오가 그 다음이며, 자신을 세 번째로 지명했다. 스키피오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가 당신을 이기지 못했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한니발이 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을 세 번째가 아니라 첫번째가 될 거라고 생각하오."
"내가 당신을 이기지 못했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한니발이 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을 세 번째가 아니라 첫번째가 될 거라고 생각하오."
2.15.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기원전 192년 로마와 셀레우코스 제국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191년 스키피오의 사촌인 나시카가 집정관에 선출되었지만 안티오코스를 상대할 임페리움을 얻지 못하고, 다른 집정관인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가 발칸 반도로 출진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격파하고 아시아로 도피하게 만들었다. 이때 스키피오의 정적인 대 카토가 맹활약하면서 위상이 급격히 상승했다. 그 후 기원전 190년 집정관으로 스키피오의 친구 라일리우스와 형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선임되었다.이후 벌어진 일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원로원은 라일리우스가 동방 원정을 맡아야 하고 루키우스 스키피오는 그리스에 남아서 물자를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에 라일리우스는 제비뽑기를 하지 말고 원로원에 결정을 맡기자고 제안했다. 그때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나서서 항의하자 민심이 격앙되었고, 원로원은 어쩔 수 없이 루키우스 스키피오에게 원정을 맡겼다고 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제비뽑기 결과 라일리우스가 동방 원정을 맡게 되었지만,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의 설득에 따라 루키우스 스키피오에게 원정을 넘겨줬다고 한다. 키케로에 따르면, 제비뽑기 결과 루키우스가 동방 원정을 맡게 되었지만, 원로원은 그를 군사적으로 무능한 인물이라 여겨 반대했다. 그때 푸블리우스가 나서서 동생을 옹호했고, 결국 그의 뜻대로 관철되었다고 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결국 절친한 친구보다 동생을 우선시했던 셈이다.
스키피오는 형제 루키우스의 레가투스에 선임된 뒤 동생과 함께 보병 8,000명과 기병 300명을 모집했다. 여기에 4천 명 가량의 아프리카 원정 참전 용사들이 자원하여 군대에 입대했다. 이후 코르넬리우스 형제는 아폴로니아에 상륙하여 에페이로스를 거쳐 테살리아로 진군했다.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었던 아이톨리아 동맹은 스키피오에게 접근해 평화를 요청했다. 스키피오는 그들을 격려했지만, 루키우스는 사절들에게 완전히 항복하거나 1,0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아이톨리아인들은 6개월간의 휴전을 맺기로 했고, 그리스에서의 전투는 끝났다.
이후 글라브리오의 2개 군단과 합세한 스키피오 형제는 헬레스폰트를 향해 이동했다. 한편 로마의 동맹국인 페르가몬 왕국과 로도스는 안티오코스 3세의 해군 제독들을 상대로 일련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문에 셀레우코스 해군이 로마군이 아나톨리아 반도에 상륙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고, 스키피오 형제는 별다른 방해 없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건너갔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오니아와 아이올리스에서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안했지만, 로마인들은 타우루스 산맥까지의 모든 땅을 포기하고 배상금을 요구했다. 셀레우코스 왕실 사절 헤라클리데스는 스키피오에게 접근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생포된 그의 아들 루키우스를 몸값 없이 석방하고, 스키피오 본인에게 최대한 많은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스키피오는 아들을 석방한 것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돈을 받기를 거절하고, 대신 아래의 조언을 해주겠다고 답했다.
"모든 조건에 동의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로마인과 싸우지 마시오. 왕이 우리 군대의 아시아 진출을 막지 못했고, 속박될 뿐만 아니라 안장에 얹혀진 지금, 동등한 조건으로 평화 제안을 하는 것은 실패로 끝날 것이며, 스스로에게 속는 짓이오."
결국 안티오코스 3세는 전투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190년 12월, 로마군과 셀레우코스군이 마그네시아 전투를 치렀다. 리비우스와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이 전투 전에 병에 걸려서 엘레아에 있었고,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에게 자신을 대신해 루키우스를 돕게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전투에 불참한 것은 레가투스인 자신 때문에 동생 루키우스의 영광이 희석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참패한 뒤, 안티오코스 3세는 재차 평화를 요청했다. 스키피오는 아시아에 상륙한 직후와 똑같은 요구 사항을 제시하면서도, 한니발을 포함한 로마의 적을 넘기라고 덧붙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동의했고, 기원전 188년 아파메이아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그 후 스키피오 일행은 에게해를 순회하면서 소아시아 서부의 유명한 도시인 크레타와 멜로스를 방문한 후 로마로 귀환했다. 루키우스는 '아시아티쿠스(Asiaticus: 아시아 정복자)'라는 칭호를 수여받고 카르타고와의 평화 이후에 치렀던 것보다 더 장엄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2.16. 몰락
스키피오는 셀레우코스 전쟁을 끝낸 뒤 2년여간 로마를 떠났다. 그 사이에, 그의 정적인 카토는 코르넬리우스 파벌에 속한 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를 비난했다. 테르무스는 동맹국을 잔인하게 대우했고 거짓 승리를 보고했으며, 글라브리오는 전리품 상당부분을 횡령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아냈지만, 카토의 공세는 갈수록 거세졌다.그러던 기원전 187년, 스키피오의 동생 루키우스는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선불금으로 받아낸 돈을 횡령했다는 고발을 받았다.[11] 루키우스가 호민관의 고발에 해명하려 할 때, 스키피오가 개입했다. 폴리비오스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원로원의 누군가가 그에게 평화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안티오코스로부터 받은 돈을 군대의 급여를 지불하기 위해 사용한 내역을 요구했다. 푸블리우스는 자신이 보고를 받았지만 누구에게도 보고할 의무는 없다고 답했다. 적들이 청구서를 보여달라고 고집하자, 푸블리우스는 형제에게 청구서를 가져오라고 요청했다. 청구서가 전달되자, 푸블리우스는 그것을 의원들에게 보인 뒤 모든 사람 앞에서 찢고 정적들에게 그것을 단편적으로 다시 작성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왜 그리도 3천 달란트를 누구에 의해 썼는지에 대한 청구서를 찾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안티오코스에게서 받은 15,000달란트를 어떻게, 누구를 통해 받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시아, 리비아, 이베리아의 주인이 되었는지 묻지 마시오."
이 말에 모든 원로원 의원은 할 말을 잃었고, 보고를 요구하는 사람은 침묵했다.
"안티오코스에게서 받은 15,000달란트를 어떻게, 누구를 통해 받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시아, 리비아, 이베리아의 주인이 되었는지 묻지 마시오."
이 말에 모든 원로원 의원은 할 말을 잃었고, 보고를 요구하는 사람은 침묵했다.
아울루스 겔리우스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고발문과 회계장부를 찢어버린 뒤 고발자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고발하는 자의 기소 이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로마 시민에게 어울리는 행위라고 생각되지 않소. 이 스키피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스키피오를 고발하는 자들도 고발할 자유는커녕 육신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오."
스키피오의 이같은 행위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로마 시민들은 스키피오가 교만해져서 왕처럼 군다며 비난을 퍼부었고, 정적들은 이를 빌미삼아 형제들을 계속 몰아붙였다. 원로원은 "안티오코스의 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립했다. 호민관 가이우스 미누키우스 아우구리누스가 이 문제를 맡아 루키우스에게 막대한 벌금을 매겼다. 루키우스가 벌금을 내길 거부하고 결정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자, 미누키우스는 그를 쇠사슬로 묶으라고 명령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스키피오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8명의 호민관들에게 선처를 호소했지만 무시당했고, 10번째 호민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만이 거부권을 행사해 루키우스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벌금을 내야 했다. 원로원은 더 이상의 갈등을 막기 위해 루키우스를 명예 사절로서 동방에 파견하여 안티오코스 3세와 에우메네스 2세 사이의 협상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대 카토는 여기서 일을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기원전 184년 루키우스가 감찰관 선거에 출마하자, 카토는 투표일이 열리기 전에 호민관 퀸투스 네비우스를 설득해 스키피오를 반역죄로 고발하게 했다. 이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안티오코스 3세와의 전쟁 때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았고, 그 대가로 포로로 잡은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을 몸값을 받지 않고 풀어주고 안티오코스 3세에게 매우 관대한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이는 루키우스의 표심을 깎아내기 위한 정치 공세였다.
스키피오는 축제 옷을 입고 많은 친구와 클리엔테스를 거느린 채 법정에 섰다. 그는 연단에서 머리에 월계관을 씌우고 연설했는데, 자신에게 걸린 혐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오늘은 자마 전투가 일어났던 날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아래의 말을 덧붙였다.
"퀴리테스(로마 시민)여, 오늘은 내가 아프리카 땅에서 최악의 적인 푸닉인 한니발과의 대전투에서 승리하여 평화와 놀라운 승리를 가져온 날임을 기억하시오. 그러므로 신들에게 배은망덕한 태도를 취하지 마시오. 내 생각에 우리는 이 게으름뱅이(퀸투스 네비우스)를 떠나 곧장
유피테르에게 갈 것이오. 우리는 그 곳에서 가장 선하시고 가장 위대하신 유피테르에게 감사를 표할 것이오."
스키피오는 말을 마친 뒤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을 향해 이동했다. 스키피오를 따라 온 무리는 고발자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를 따랐고, 서기관과 관료들까지 호민관을 떠났다. 연단에서 피고인을 불러낸 종들과 전령 외에는 호민관과 함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로 인해 재판은 중단되었고, 스키피오는 그 직후 로마를 떠나 자신의 영지인 리테르눔으로 낙향했다. 이후 재판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지만, 루키우스는 이 여파로 감찰관 선거에서 낙선했고 카토가 감찰관에 당선되었다. 카토는 스키피오의 동생 루키우스와 스키피오의 추종자 마닐루스를 포함한 원로원 의원 7명을 제명했다.
2.17. 최후
스키피오는 리테르눔 시 인근의 자신의 별장에 은거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어느 날 강도 무리가 별장에 침입했다. 스키피오는 이들을 물리칠 준비를 했지만, 강도들은 별장의 주인이 스키피오라는 것을 알게 되자 무기를 던져버리고 스키피오에게 면담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스키피오는 그들을 집안에 들어오게 했고, 강도들은 스키피오의 손에 키스하고 선물을 남긴 뒤 돌아갔다고 한다. 세네카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망명 중에 자신의 손으로 땅을 경작했다고 한다. 한편,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스키피오가 말년에 여노예와 성관계를 맺었고, 아내 아이밀리아 테르티아는 이 사실을 알았지만 참고 넘겼다고 전했다.기원전 183년, 건강이 악화된 스키피오는 자신을 로마가 아닌 이 별장에 묻어달라고 요청한 뒤 눈을 감았다.[12] 그래서 그의 유해는 로마의 가족 묘지가 아닌 리테르눔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아래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배은망덕한 조국이여, 내 재가 당신을 떠나게 하소서."
3. 장군으로서의 평가
3.1. 전술
리델 하트를 비롯해서 소수이지만 한니발보다 스키피오가 더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포위전을 먼저 실현한 지휘관이 한니발이라는 점에서 대부분 한니발을 한 수 위로 평가한다.[13] 한니발을 상대하기 전까지 로마군의 전술은 적군을 아군의 중심으로 몰아넣는 데 집중하는 등 전술적으로 경직된 모습을 자주 보였지만, 스키피오와 그 이후 로마 장군들은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포위전술을 펼쳤으며 이것만 봐도 한니발이 얼마나 로마군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물론 적의 전술을 배워서 써먹는 것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며, 결국 자마에서 한니발을 이겼으니까 스키피오가 더 낫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고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한니발을 더 칭송하고 있다. 애시당초 망치와 모루 전술을 완성한 사람이 한니발인지라 이러한 평가를 뒤집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리고 전투를 지휘한 횟수도 한니발이 더 많고 일반적으로 전적이 많을수록 높게 평가받기 마련이다.
스키피오를 위로 놓는 사람들의 반론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포위섬멸에 있어서 한니발이 모범을 보여 후대에 귀감이 된건 사실이지만, 전투에서 포위전술이란 건 까마득한 옛날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전투에서도 보이는 병법이다. 즉, 한니발이 포위섬멸전의 정석을 보여준 건 맞지만 한니발이 포위섬멸전을 '발명'했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애당초 선사시대 인류가 매머드 같은 거대한 짐승을 사냥하는 주된 전법부터가 소수의 인원이 매머드를 유인한 뒤 매복해 있던 다른 사냥꾼들과 합세하여 한꺼번에 에워싸서 투창질을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전술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도 생각보다 명확하지는 않다. 실제 스키피오의 전술전개를 봐도 한니발의 카피버전인지, 아니면 본인의 독창성이 발휘된 결과인지 애매하다. 확실한 것은 포위섬멸전을 목표로 했던 것은 한니발과 같으며, 큰 틀에서는 한니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한니발과 다른 조건에서 다른 전술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상술했듯 일리파 전투나 자마 전투에서 실제로 스키피오가 구사한 전술은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펼쳤던 전술과는 다르며, 무엇보다 포위섬멸전(혹은 망치와 모루 전술) 자체는 알렉산드로스와 한니발을 거치며 정형화되었다고는 할 수 있어도 그 둘 중 한 명의 '발명품'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보면 스키피오의 전략, 전술은 한니발과 유사한 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며 적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스키피오를 한니발의 제자처럼 말하는 것도 역사적으로 검증된 입장은 아니라는 것. 더군다나 언제나 로마보다 기병 전력에서 우세한 상황이었던 한니발과 다르게 스키피오는 자마 이전까지 카르타고보다 기병 전력에서 열세로 싸웠다는 점도 고려해볼만 하다.[14] 지휘관의 질적 차이가 있을지언정 매회 전투마다 각기 다른 전술로 상대를 이겨야 했다는 점에서 스키피오도 한니발 못지 않게 고생했다.[15] 게다가 아프리카 침공 때는 로마에서 풍부한 지원을 해준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 병사를 모아서 가야했을 정도였으며 누미디아 내전에서의 적절한 개입으로 현지에서 동맹국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로부터 스키피오보다 한니발을 한수위로 쳐줬던 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스키피오보다 한니발을 윗줄로 놓은 것은 로마인들 자신이기도 했다. 분명히 전술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총사령관의 역량뿐만 아니라 이를 직접 수행하는 병사와 간부들의 역량도 매우 중요한데 이 점에서 스키피오와 한니발에게 주어진 조건의 차이는 상당히 컸다고 보아야 한다. 한니발도 한니발의 정예라 불리는 중보병들의 역량은 우수했으나 카르타고 본국 병사들의 훈련도는 높지 않았고, 그들 이외의 나머지 군대들은 말도 통하지 않고 훈련도, 장비 면에서도 보잘 것 없는 이베리아, 켈트 계열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스키피오 역시 누미디아 기병을 운용했으나 그 외에는 대부분 로마 시민이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게다가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국력차, 전적차를 살펴보면 상황이 더욱 명확해진다. 스키피오가 로마군에서 가장 눈부신 업적을 쌓아 올린 것은 사실이지만 로마군에는 스키피오 이외에도 괜찮은 전적을 보유한 장군들도 많았고, 스키피오가 물러난 이후에도 로마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한다. 반면 카르타고 군은 한니발 본인이 직접 지휘하지 않았을 경우 로마군에게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한니발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승리한 베티스 고지의 전투는 전술의 승리가 아니라 전략, 정치의 승리, 그것도 '매수'라는 한계가 있는 방법에 의존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군 자체에서 전반적인 역량 차이가 명확했다는 것. 게다가 한니발 이외의 카르타고 지휘관들의 역량도 전반적으로 떨어졌다. 물론 이들 지휘관들 중 한니발과 함께 종군하며 그의 승리에 기여한 자들도 많았으나, 이들은 한니발의 지시 하에서 부관급의 역할을 맡았을 때 빛을 발했지, 스스로가 지휘권을 잡은 경우에는 로마의 지휘관들을 이기지 못했다. 한니발이 아닌 다른 지휘관의 경우, 병력 수 등 전술적으로 확실히 우위를 점하지 못한 전투는 물론,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 전투에서도 로마에게 대부분 패배했었고, 카르타고 군뿐만 아니라 동시기 다른 나라들도 로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켈트 족이나 게르만 족에게 패배하는 시기는 포에니 전쟁 이후의 세대들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포에니 전쟁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로마군의 역량은 정말 대단했다.
자마 전투의 경우 보병 전력은 숫자로만 따지면 한니발 쪽의 우위이나, 정예는 이탈리아에서 데리고 온 1만 5천 명에 불과했으며, 나머지는 골족과 리구리아족 용병, 그리고 카르타고 시민 징집병으로 구성된 형편없는 전력이었다. 기병에서는 스키피오 쪽이 2천명대 초반 가량 우위에 있었는데[16], 누미디아와 이탈리아 기병으로 구성된 스키피오와 달리, 한니발의 기병은 일부가 누미디아 기병은 그렇다쳐도 나머지 기병은 전투경험이 없는 카르타고인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한니발 측에서 먼저 강화를 신청한 것은 당연하다. 물론 한니발이 '당신이 날 이긴다는 보장은 없으니 이만하고 강화하자'는 표현을 했으나, 굳이 먼저 강화를 청한 것은 객관적 전력에서 오히려 스키피오 쪽이 우세했다는 것 이외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카르타고 쪽은 숫적으로는 우세해보이지만, 정예병과 기병 수는 턱없이 부족했으며, 코끼리 병종은 지난 전쟁에서 무수한 약점을 노출해왔다. [17] 스키피오 군이 코끼리 부대를 손쉽게 물리쳤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18]
즉, 스키피오는 분명히 엄청나게 뛰어난 지휘관이고 한니발을 전투에서 꺾은 업적도 있지만, 여기에는 스키피오 자신의 천재성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군의 저력도 있었던 것이다. 군 자체의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전쟁이 오직 지휘관의 역량만으로 이루어진다고 오판하면 스키피오 > 한니발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병사들의 역량을 고려한다면 스키피오를 한니발보다 윗줄로 두긴 어렵다.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이라 하더라도, 주어진 병사의 질이 형편없다면 할 수 있는 건 적어지기 때문이다.
3.2. 전략
버나드 로 몽고메리나 리델 하트가 자신들의 저서에서 썼듯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위대한 면은 바로 그 전략성에 있다. 그가 한니발을 로마에서 끌어내기 위해 단계적으로 수립하고 시행한 전략은 탁월하다고밖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요약해 보면,1. 한니발의 실질적인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남부 지방(한니발의 가문인 바르카 가문의 본성이 있었다)의 카르타고 세력을 일소한다. 이것은 한니발의 잠재적 보급로 하나를 영구히 차단하는 것이자, 동시에 그의 퇴각로를 카르타고 본국으로 한정시키는 의미도 있었다. 이 시도는 멋지게 성공했고,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또한 이 과정에서 한니발을 지원하러 로마로 오다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2. 북아프리카로 진군해 카르타고의 유력한 동맹국이었던 누미디아를 로마 편으로 끌어들인다.[19] 이 때문에 카르타고는 고립되었고, 그 결과로 인해 부수적으로 한니발은 자신의 군단에서 유력한 전력 중 하나였던 누미디아 기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게 되었다. 참고로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 편으로 들어온 누미디아 기병은 시팍스의 잔당들이 가담하며 지원한 것이었으며 그나마도 수적으로 많이 부족했다.
3. 최종적으로 카르타고 본국을 목전에 두어, 본국을 구하기 위해 한니발이 별 수 없이 귀환하도록 만들어 결전 혹은 강화를 강요한다. 이것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함이었고, 나아가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낸다는 로마의 최종적 목표를 이루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완벽히 성공했다.
상대의 손발을 묶고 행동을 강제한다는, 전략의 기본 목표를 충실히 실행했다는 점에서 이보다 더 이상적인 케이스는 많지 않다. 한니발이 자신의 최종적 목표였던 '로마 연합의 해체'를 끝끝내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스키피오의 이러한 전략적 성공은 빛나 보일 수밖에 없다. 한니발의 화려한 전술적 성공은 높이 평가하면서, 스키피오의 전략적 성취를 폄하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러한 성공의 모든 공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최종적으로 끝낸 것이 스키피오의 위대한 전략 때문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프리카누스가 이러한 활약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많은 이들의 활약과 더불어 시작부터 로마에게 유리한 요소들이 있었다. 한니발을 상대로, 후세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파비우스 전략으로 그의 군대를 소모시키고 전쟁의 모든 판을 짠 '지연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시라쿠사 공방전으로 카르타고의 시칠리아 교두보를 상실시키고[20], 파비우스 전략의 일환으로 한니발 군을 추격하며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한 '로마의 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스키피오가 추격을 중단한 탓에 형 한니발과 합류를 시도한 하스드루발을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물리친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등 로마에는 스키피오를 돕거나, 그의 실수를 보완해 줄 역량있는 인물들이 많았다. 그에 반해 한니발은 자신을 돕거나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역량을 지닌 아군 지휘관이 없었다. 그리고 한니발 군단이 가지고 있었던 극복하기 어려운 여러 약점들[21]역사적으로 을 생각해 볼 때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를 온전히 스키피오에게 돌리는 것은 어려워보인다.
양 측 군대의 구성원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카르타고의 군대는 전문 지휘관들의 명령을 받는 용병들이 중심이었고, 카르타고의 토착민들이 파견되어 지휘하는 형식이었다. 역사적으로 카르타고의 군대는 굉장히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는데, BC 216년의 한니발 군대를 놓고 보면 주로 아프리카인들(발레아레스인들Balearics을 포함한)과 에스파냐인들, 알프스 남부 갈리아 출신의 켈트족들이 중심이 되었다.[22] 훗날의 스위스 용병처럼 용병자체가 생업이 아니고, 동맹과 매수를 통해 끌어들인 용병이니만큼 투지가 상대적으로 떨어졌고[23],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통솔하는 건 여간 골치아픈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카르타고 본토인이 '파견'되어 지휘하는 형태라면, 이들 용병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평상시에 훈련시켜두는 것도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로마군의 핵심은 공화국 유산계급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보병, 즉 '징집병'들이었다. 로마 공화국에서 병역의 의무는 사회적 책임임과 동시에 개인의 영광이면서 정치적 권리가 주어진 시민권이란 지위의 상징이기도 했다.[24] 따라서 조국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 용병보다 싸움에 절실하게 임하리라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게다가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는 BC 225년에 오로지 로마와 캄파니아에서만 25만의 보병과 2만 3천명의 기병을 충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25] 이는 그만큼 로마의 동원력이 카르타고에 비해 압도적이었다는 걸 뜻한다. 이 때문에 티키누스 전투를 시작으로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 그리고 전설적인 칸나이 전투로 한니발이 로마군을 일방적으로 학살했음에도 로마가 견뎌낼 수 있었다. 이러한 동원력은 로마가 파비우스 전략이라는 소모전과 장기전을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로마가 버틸 수 있었기 때문에 스키피오의 출현이 가능했고 그의 원정도 가능했던 것이다.
아프리카 전역에서조차, 비록 스키피오가 원로원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자원병 외에도 공식적으로 제 5군단과 6군단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그들은 칸나이 전투의 패배에 대한 징계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으나, 가장 오랫동안 복무한 로마군 중 하나이며, 칸나이에서 살아남은 비겁자라는 불명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지에 불타고 있었다.[26] 그리고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불리한 결전을 강요해낼 수 있었던 것은 스키피오 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파비우스를 위시한 수많은 로마 지휘관들이 한니발을 견제해온 덕분이다. 그들이 한니발을 붙들어 매면서 그의 전력을 소모시키고, 한니발이 떠나는 즉시 그가 점령했던 동맹시를 재탈환하며,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본거지 로마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스키피오의 이베리아 평정과 아프리카 원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27]
이처럼 스키피오가 한니발에 비해 유리했던 점은 전략 측면에서도 많은 요인들이 있었다.
3.3. 결론
분명히 고대 서양사에서 손에 꼽을만한 명장이건만, 비교대상이 하필이면 전략의 아버지[28]인 한니발이라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데다가, 역사상의 위치도 한니발의 적이기에 별로 인기가 없는 편이다. 현대인들은 물론이고 당대, 그것도 모국인 로마인들까지도 한니발이 스키피오보다 낫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이는 나폴레옹을 워털루 전투에서 물리친 영국의 웰링턴을 연상시킨다.[29][30][31][32]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승자는 엄연히 스키피오이다. 한니발이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졌기에 결과적으로 한니발이 스키피오에 비해 전략적으로 실책을 남겼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한편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전술을 배워서 써먹었다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선 자마 전투 당시 스키피오가 쓴 전술은 한니발이 쓴 전술과 확연히 다르다. 애초에 자마 당일 스키피오가 전술적으로 한니발한테 밀렸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설사 상대의 전술을 배워서 써먹었다 한들 그것이 흠이 될 수도 없다. 심지어 '군인에게는 비겁하단 말이 칭찬이다'란 말도 있을 정도인데, 상대를 알고 그의 장점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건 비겁한 행위조차 아닐 뿐더러, 지피지기를 제대로 실천했단 뜻이므로 군인에게 있어서 이 이상의 칭찬이 없을 것이다.
다만 한니발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단순히 그의 비극적인 인생에 대한 동정론에 기한 게 절대 아니다. 당시 로마와 카르타고는 국력의 차이가 상당했다. 제해권, 인구수, 종합적인 경제력 등, 가지고 있는 선택지가 한니발에 비해 스키피오가 훨씬 많았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질도 로마군이 우월했으며, 전반적인 지휘관들의 능력치도 로마군 측이 더 우월했다. 애초에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고대 로마인들은 물론이고 중세, 근대의 명장들, 그리고 현대 역사학자들까지 불리한 입장에서 싸운 한니발에게 좀 더 높은 평가를 주는 것이다.[33]
뿐만 아니라, 자마 전투에서 쓴 전술이 한니발이 썼던 전술과 달랐다는 위의 견해와 달리, 스키피오가 벌인 전투 전반에서 한니발의 영향이 짙게 느껴진다는 견해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우선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한데 그가 기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점이나 기병대를 활용한 방법을 볼때, 한니발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가 기병을 사용한 방법은 알렉산드로스와 한니발이 정착시킨 전형적인 방법 그대로였고, 그가 일리파Ilipa에서 펼친 초승달 대형은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펼친 대형과 거의 같았다."[34]라면서,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기병운용 방식에 영향을 받았음을 주장했으며, 프리츠 하인켈하임은 "그(스키피오)는 기존의 로마군단의 밀집 대형을 포기했다. 기존의 로마 군단은 3열 횡대로 배치되고, 각 횡대는 10개 중대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무거운 대형은 전진할 때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지만, 회전이나 방향 전환을 쉽게 할 수 없었고, 따라서 칸나이 전투에서처럼 측면 공격에 취약했다. 또한 전체로서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고 병사 개개인이나 소규모 단위 병력이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일 수가 없었다. 스키피오는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새로운 대형을 채택했다. 그것은 필요할 경우 신속하게 전개하거나 응집할 수 있는 대형이었다."[35]라며 스키피오의 보병 운용이 한니발의 영향 하에 있다고 서술했다. 한편 상대의 전술을 배워서 써먹는 건 지피지기란 측면에서 매우 우수한 자질임이 분명하나, 그것이 선구자의 전술을 능가하지 못했다면[36], 그 자신이 우수한 것과 별개로, 과연 선구자보다 우수하다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자마 전투 당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와 멀리 떨어진 자마까지 한니발을 유인했다. 한니발은 당연히 카르타고 인근에서 싸우고 싶어했으나, 스키피오가 동맹시들을 두드리는 바람에 한니발이 성화에 떠밀려 나온 것이다. 전투 시작 직후 한니발의 코끼리 러쉬도 완벽하게 파훼했다. 이 점은 확실히 스키피오에게 높은 평가를 줄만한 요소다.
그러나 상술한 몽고메리의 평과 현대 역사가들의 연구 결과처럼, 자마 전투에서는 카르타고 측의 군세가 질적으로 월등히 열세에 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병력 수 자체는 로마보다 1만명이 많았다지만, 정예군이라 할 병력은 1만 5천[37]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애국심도 투지도 없는 용병[38]과 훈련도 제대로 안된 시민 징집군이었다. 기병수는 2천가량이 차이나는데다, 그 조차도 전부가 누미디아 기병이 아니라, 절반가량은 전투경험이 전무한 카르타고인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코끼리 숫자는 80마리라지만, 급하게 모았으며 이들의 약점은 로마군도 이미 경험했다.[39]
명장들의 능력이라는건 누가 누구보다 낫다고 일방적으로 평가하기가 여러모로 난해하고, 전투에서의 변수는 넘쳐난다. 그러나 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붙은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이 불리한 전력을 가졌다는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조건을 조성한 건 스키피오의 공로라고 변론할 수 있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과감하게 아프리카 원정을 실행 가능했던 것, 그리고 한니발이 겨우 1만 5천을 데리고 급히 귀환하게 된 데에는 위의 전략 문단에서 서술했듯이 수많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그 요인들 중 스키피오의 기여도를 얼마만큼으로 볼 것인지[40] 는 수많은 논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41]
정리하자면, 한니발은 스키피오보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엄청난 전략 전술적 역량을 발휘해서 로마를 궁지에 몰았을 만큼 명장이었고, 스키피오 역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가며 최후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명장이다. 물론 전략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스키피오에게 유리한 조건이 갖춰져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42] 한편 '스키피오가 불리한 조건이었다면 그가 반드시 패한다'는 보장 또한 없다. 역으로 한니발 이상의 독창성을 발휘하여 로마를 구원했을 지도 모른다. 단지 이는 실제 역사에 없었던 일이므로 증명하지 못할 뿐이다. 두 사람의 우위는 양자를 동등한 조건에 둘 수 없다는 현실적 문제 때문에 산술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다소 뻔한 결론이지만, 현대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료에 철저히 기반하여, 누군가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43] 끝없이 논쟁하는 것 뿐이라 할 것이다.
4. 인품
스키피오는 대단히 신사적이고 자비로운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며칠 후, 병사들이 포로로 잡혀있던 처녀 한 명을 그에게 데려왔다. 보기 드문 미모를 지닌 그 처녀는 가는 곳 어디에서도 모든 이들의 눈을 사로잡아 끌었다. 그녀의 고향과 가문에 대해 알아내는 중에 스키피오는 다른 사실들 사이에서 그녀가 알루키우스라는 젊은 갈리아 귀족과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그녀의 부모와 그가 알기로 그녀를 죽을 만큼 사랑하는 그녀의 약혼자를 불렀다. 약혼자가 도착하자 스키피오는 흔히 아버지들이 쓰는 말투보다도 더욱 사려깊게 말했다.
“저도 젊습니다. 그런 제가 그대에게 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모든 겸양은 제쳐두고 편히 이야기합시다. 그대의 약혼녀께서 병사들에게 끌려왔을 때 저는 그대가 그녀를 무척 사랑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녀의 미모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제가 제 나이에 어울릴 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허락되는 지위에 있었다면, 나랏일에 몰두하는 대신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순수하고 정당한 사랑에 빠지는 일 말입니다. 지금 저에겐 다른 사람의 사랑, 바로 그대의 사랑을 빼앗을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의 약혼녀는 제 보호 하에 들어온 이래로 부모에게서 받을 만한 보살핌을 받아 왔습니다. 그녀는 우리 둘 모두에게 가치를 지닌 더럽혀지지 않은 선물로 그대에게 선사되기 위해 남겨져 있습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저는 그대에게 로마의 친구가 되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곳 민족들이 제 아버지와 숙부님이 고결하고 정직한 사람이란 것을 경험했던 것처럼, 그대도 저를 그같은 사람이라 믿어주신다면, 로마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그대의 부족에게 우리 로마만 한 친구가 없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그 청년은 부끄럽고도 기쁨에 겨웠다. 그는 스키피오의 손을 잡았다. 스키피오가 보여준 친절함에 상응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차는 보답을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그는 스키피오에게 보답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십사 하고 모든 신들에게 기도했다.
잠시 후에 그 처녀의 부모와 친척들이 불려왔다. 그들은 그녀의 몸값으로 막대한 양의 금을 가져왔는데, 그녀가 몸값 지불도 없이 자유롭게 풀려나자 스키피오에게 황금을 선물로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그가 선물을 받아주는 일이 그 처녀가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반환된 것에 대한 크나 큰 감사의 의미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선물을 받으라고 집요하게 재촉하자 스키피오는 선물을 받겠노라고 말하고 그것을 자신의 발 아래에 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알루키우스를 부른 후 “그대는 미래의 장인어른으로부터 받게 될 결혼 지참금 외에도 저의 결혼 선물로 이 황금도 받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알루키우스는 그 금을 받아서 소중히 보관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스키피오에게서 받은 선물과 명예로운 대접에 대단히 기뻐하며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의 귀를 스키피오가 받아 마땅한 찬양으로 채웠다. 그는 단언했다. 그 젊은이는 그가 거느리고 있는 부대의 힘만큼이나 유별난 관대함과 동정심으로 인하여 그가 가는 길 어디에서든 승리하면서 마치 신처럼 그들 곁으로 올 수 있었다고.
그는 그를 따르는 자들 중에서 병사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수일 후에 1,400명의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스키피오에게 돌아왔다.
리비우스의 <로마사> 26권 50장
“저도 젊습니다. 그런 제가 그대에게 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모든 겸양은 제쳐두고 편히 이야기합시다. 그대의 약혼녀께서 병사들에게 끌려왔을 때 저는 그대가 그녀를 무척 사랑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녀의 미모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제가 제 나이에 어울릴 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허락되는 지위에 있었다면, 나랏일에 몰두하는 대신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순수하고 정당한 사랑에 빠지는 일 말입니다. 지금 저에겐 다른 사람의 사랑, 바로 그대의 사랑을 빼앗을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의 약혼녀는 제 보호 하에 들어온 이래로 부모에게서 받을 만한 보살핌을 받아 왔습니다. 그녀는 우리 둘 모두에게 가치를 지닌 더럽혀지지 않은 선물로 그대에게 선사되기 위해 남겨져 있습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저는 그대에게 로마의 친구가 되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곳 민족들이 제 아버지와 숙부님이 고결하고 정직한 사람이란 것을 경험했던 것처럼, 그대도 저를 그같은 사람이라 믿어주신다면, 로마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그대의 부족에게 우리 로마만 한 친구가 없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그 청년은 부끄럽고도 기쁨에 겨웠다. 그는 스키피오의 손을 잡았다. 스키피오가 보여준 친절함에 상응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차는 보답을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그는 스키피오에게 보답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십사 하고 모든 신들에게 기도했다.
잠시 후에 그 처녀의 부모와 친척들이 불려왔다. 그들은 그녀의 몸값으로 막대한 양의 금을 가져왔는데, 그녀가 몸값 지불도 없이 자유롭게 풀려나자 스키피오에게 황금을 선물로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그가 선물을 받아주는 일이 그 처녀가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반환된 것에 대한 크나 큰 감사의 의미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선물을 받으라고 집요하게 재촉하자 스키피오는 선물을 받겠노라고 말하고 그것을 자신의 발 아래에 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알루키우스를 부른 후 “그대는 미래의 장인어른으로부터 받게 될 결혼 지참금 외에도 저의 결혼 선물로 이 황금도 받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알루키우스는 그 금을 받아서 소중히 보관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스키피오에게서 받은 선물과 명예로운 대접에 대단히 기뻐하며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의 귀를 스키피오가 받아 마땅한 찬양으로 채웠다. 그는 단언했다. 그 젊은이는 그가 거느리고 있는 부대의 힘만큼이나 유별난 관대함과 동정심으로 인하여 그가 가는 길 어디에서든 승리하면서 마치 신처럼 그들 곁으로 올 수 있었다고.
그는 그를 따르는 자들 중에서 병사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수일 후에 1,400명의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스키피오에게 돌아왔다.
리비우스의 <로마사> 26권 50장
훗날 마키아벨리는 그의 역작 <로마사 논고> 3권에서 이 일화를 인용하며, 한니발은 '두려움을 얻는 장군'이었고 스키피오는 '사랑을 받는 장군'이었으며 두 명장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승리와 명예를 획득했다고 평했다.
로마인들은 무기로 이탈리아에서 피로스를 몰아낼 수 없었지만, 파브리키우스는 관용으로 그렇게 했다. 파브리키우스는 피로스의 노예 중 한 사람이 그(피로스)를 독살하겠다는 제안을 해온 것을 거부하고 그 사실을 피로스에게 알려 주었던 것이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신(新) 카르타고를 파괴할 때 한 젊고 아름다운 처녀를 진상 받았으나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그 약혼자에게 돌려보내는 고결함을 보임으로써 스페인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이 행동이 입소문을 타자 그는 스페인 전역에서 우방을 얻었다.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들에게서 이런 자질을 정말로 바란다는 것을 이 사실로 잘 알 수 있다. 또한 군주의 삶을 서술하고 군주가 어떻게 처신해야만 하는지를 규정하는 역사가나 저술가들이 그런 자질을 얼마나 칭송하는지도 분명하다. 그런 이들 중에서도 크세노폰은 키루스가 친절하고 인도적이었음은 물론 자만, 잔혹함, 탐욕, 그 외에 인생을 더럽히는 악덕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가 이런 모습을 통해 얼마나 많은 명예, 승리, 업적을 성취했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한니발은 위와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엄청난 명성을 얻고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은 다음 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중략)
스키피오가 스페인을 침공했을 때 그곳은 즉시 그의 우방이 되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칭송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부 그의 인정과 자비가 이끌어낸 결과였다.
반면에 한니발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그와는 정반대의 방법을 활용했다. 그는 잔혹함, 폭력, 약탈, 그 외의 온갖 기만술을 사용했지만 스키피오가 스페인에서 성취한 것과 같은 결과를 성취했다. 이는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가 한니발의 편을 들어 반란을 일으키고 모든 사람이 그를 따랐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략)
사람은 두 가지 주된 자극에 이끌리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과 두려움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사랑이나 두려움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을 쉽게 휘어잡을 수 있다.
(중략)
사랑을 받으려는 열망이 너무도 강력한 사람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면 비열한 사람이되고, 두려움을 안기려는 열망이 너무도 거대한 사람은 중도를 넘어서게 되면 불쾌한 사람이 된다. 정확히 중용을 지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본성이 그런 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니발과 스키피오처럼 월등한 능력으로써 지나친 사랑 혹은 지나친 두려움에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삶의 방식으로 칭송받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했다.
두 지휘관의 영광은 이미 언급했다. 스키피오는 스페인에 있던 그의 군대가 동맹의 일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피해를 보았다. 이 일이 발생한 원인은 그가 두려움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야망으로 통하는 문이 조금이라도 열리면 그 즉시 인정 많은 지도자를 향한 사랑은 깡그리 잊어버리게 된다. 자신의 병사들과 동맹이 그런 모습을 보였기에, 스키피오는 그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그동안 피해 왔던 잔혹한 조치를 일부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그의 잔혹함과 기만으로 인해 손해를 본 특정한 사례는 없다. 하지만 나폴리와 많은 다른 도시들이 로마 인들에게 충실한 채로 남은 것은 그의 잔혹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의 무자비한 삶의 방식을 경험하고 그 어떤 적보다 그를 혐오했다. 피로스가 이탈리아에 군대를 이끌고 침입했을 때 로마인들은 피로스를 독살해 주겠다는 인물을 오히려 피로스에게 알려 주었지만, 한니발만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군대를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도 로마인들은 끝까지 추적하여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따라서 한니발은 무자비하고, 신뢰할 수 없고, 잔혹했다는 이유로 이런 불이익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모든 역사가가 칭찬했던 막대한 이득을 얻기도 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다양한 부류의 병사들로 구성되었지만, 서로 간에 알력이 일어나거나 한니발 본인에게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이런 현상은 한니발이 안겨준 두려움이 그 원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 자체도 너무나 큰데, 한니발의 출중한 능력이 가져온 명성까지 더해지니 병사들은 압도되어 단결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두 위대한 지휘관 중 한 사람은 선한 행동으로, 한 사람은 악한 행동으로 같은 결과를 달성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3권 中
(중략)
스키피오가 스페인을 침공했을 때 그곳은 즉시 그의 우방이 되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칭송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부 그의 인정과 자비가 이끌어낸 결과였다.
반면에 한니발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그와는 정반대의 방법을 활용했다. 그는 잔혹함, 폭력, 약탈, 그 외의 온갖 기만술을 사용했지만 스키피오가 스페인에서 성취한 것과 같은 결과를 성취했다. 이는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가 한니발의 편을 들어 반란을 일으키고 모든 사람이 그를 따랐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략)
사람은 두 가지 주된 자극에 이끌리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과 두려움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사랑이나 두려움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을 쉽게 휘어잡을 수 있다.
(중략)
사랑을 받으려는 열망이 너무도 강력한 사람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면 비열한 사람이되고, 두려움을 안기려는 열망이 너무도 거대한 사람은 중도를 넘어서게 되면 불쾌한 사람이 된다. 정확히 중용을 지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본성이 그런 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니발과 스키피오처럼 월등한 능력으로써 지나친 사랑 혹은 지나친 두려움에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삶의 방식으로 칭송받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했다.
두 지휘관의 영광은 이미 언급했다. 스키피오는 스페인에 있던 그의 군대가 동맹의 일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피해를 보았다. 이 일이 발생한 원인은 그가 두려움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야망으로 통하는 문이 조금이라도 열리면 그 즉시 인정 많은 지도자를 향한 사랑은 깡그리 잊어버리게 된다. 자신의 병사들과 동맹이 그런 모습을 보였기에, 스키피오는 그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그동안 피해 왔던 잔혹한 조치를 일부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그의 잔혹함과 기만으로 인해 손해를 본 특정한 사례는 없다. 하지만 나폴리와 많은 다른 도시들이 로마 인들에게 충실한 채로 남은 것은 그의 잔혹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의 무자비한 삶의 방식을 경험하고 그 어떤 적보다 그를 혐오했다. 피로스가 이탈리아에 군대를 이끌고 침입했을 때 로마인들은 피로스를 독살해 주겠다는 인물을 오히려 피로스에게 알려 주었지만, 한니발만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군대를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도 로마인들은 끝까지 추적하여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따라서 한니발은 무자비하고, 신뢰할 수 없고, 잔혹했다는 이유로 이런 불이익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모든 역사가가 칭찬했던 막대한 이득을 얻기도 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다양한 부류의 병사들로 구성되었지만, 서로 간에 알력이 일어나거나 한니발 본인에게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이런 현상은 한니발이 안겨준 두려움이 그 원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 자체도 너무나 큰데, 한니발의 출중한 능력이 가져온 명성까지 더해지니 병사들은 압도되어 단결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두 위대한 지휘관 중 한 사람은 선한 행동으로, 한 사람은 악한 행동으로 같은 결과를 달성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3권 中
참고로 말하자면, 카르타고 노바의 함락은 BC 209년이다. 즉 한국 나이로 고작 28살의 청년이 저런 고결함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포에니 전쟁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아직 기원전도 지나지 않은 먼 고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스키피오의 인격적인 부분을 알 수 있다.
고대의 전쟁에서 전투 후 약탈과 살육은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로마군은 이 약탈에서 극도로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존 키건의 저서에 따르면 로마군이 점령한 도시에서 약탈을 벌이면 마주치는 남자는 죄다 노예로 만들거나 아니면 팔다리를 잘라 잔인하게 죽이고 심지어 마주치는 모든 동물들조차 사지를 토막내고, 대개 약탈은 지휘관이 정해준 기간이 지나거나 아니면 시내에 살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안 남을 때까지 진행했다고 하니 그 악명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잔혹한 일에 대해서 다르게 대처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 바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할 때 부하 병사들에게 그런 약탈을 아주 철저하게 엄금시켰다. 이미 도시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성벽을 오르는 자에게 황금 월계관을 씌워주겠다는 등 갖은 보상을 약속할 때에도 약탈만은 철저하게 금지시켰고, 자신은 이 도시에 잡힌 모든 이베리아 부족 인질들을 확보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기도 했다.
5. 기타
- 정치가로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대머리에 마른 몸을 가진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젊었을 적에는 꽤나 미남이었다고 한다. 누구나 격의없이 대하는 호인이라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 칸나이 전투의 패장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딸 아이밀리아 테르티아와 결혼하였다.[44] 맏딸 코르넬리아는 아프리카누스의 5촌 조카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과 결혼, 이후 스키피오 나시카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막내딸 코르넬리아는 그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현명하고 담대한 여인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맏아들 푸블리우스와 차남 루키우스는 모두 건강이 좋지 못해 후손을 남기지 못했고, 장남의 아들로 입양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또한 후손을 남기지 못해 아프리카누스의 직계 가문은 단절되었다. 키케로에 따르면 장남 푸블리우스는 지적인 교양 면에서는 아버지보다 뛰어났다고 하며 그가 공직을 맡지 못한 것이 국가에 손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45] 하지만 차남 루키우스는 나쁜 건강에 더해 방탕함으로도 악명높았다고 한다.
-
로마인들 사이에서 자국을 대표하는 명장이라는 스키피오의 이미지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전환된 이후는 물론 동로마 시대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되찾은
성십자가를 앞세운 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선식을 거행한
이라클리오스 황제에게
원로원이 부여한 칭호가 '새로운 스키피오'였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예시를 제정도 아니고 아예 공화정 시절의 스키피오로 들었다는 것에서 짐작이 되듯이 이 당시의 7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동로마와 종래의 라틴·이탈리아적인 고대 로마의
연결고리는 확실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이탈리아인에게도 스키피오는 이탈리아 역사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영웅이다. 현대 이탈리아의 국가 <이탈리아인들의 노래>에 dell'elmo di Scipio(스키피오의 투구를 쓰고선)라는 가사가 1절 시작에서 나온다.
- 스키피오닉스라는 공룡의 속명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속명의 뜻은 스키피오의 발톱이다. 아 사람의 이름도 들어보면 인명이라기 보다는 생물의 학명과 더 비슷하다.
-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트라야누스 황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직계조상들이 각각 스키피오 휘하 베테랑 군단병, 직속 휘하 백인대장이었다. 이중 스키피오와 인연이 깊었던 쪽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본가였다. 하드리아누스의 직계조는 백인대장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였는데, 그는 스키피오의 명으로 퇴역병 정착 식민도시 이탈리카 건설 후 가족들과 터를 잡고 살면서, 스키피오와 그의 일가에게 이 도시 보고 업무를 담당할 정도로, 스키피오에게 신임받은 자였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 황제 집안인 아일리우스 가문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를 신임한 스키피오의 후원 아래 로마 중앙정계와 연줄을 만들고, 일찌감치 에퀴테스로 지위가 상승했고, 그 손자인 마눌리누스[46] 이래 공화정 말 카이사르의 내전에 자연스레 로마군 장교로 합류하게 됐다. 물론 이 시절이 되면 스키피오 가문의 후원은 미약했다. 그렇지만 마눌리누스는 직계조가 스키피오의 휘하 백인대장 중 신임한 인물이라는 후광으로 다른 이탈리카 출신 로마인 장교보다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고조부 이래, 그 일가는 옥타비아누스 추천을 받는 기회를 얻고, 연달아 4대에 걸쳐 원로원 의원이 되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절부터는 귀족 반열에 올라 가세를 크게 넓히게 됐다.
6. 가계
-는 결혼 관계를 뜻함.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조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큰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아버지) - 폼포니아(어머니)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남동생)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장인)
아이밀리아 테르티아(부인)[47]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장남)
-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장남의 양자)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차남)
-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장녀)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첫째사위)
-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 아프리카나(차녀) - 대 그라쿠스(둘째사위)
- 그라쿠스 형제(외손자)
[1]
이탈리아어 표기법으로는 스키피오가 아닌 시피오가 맞다.
마멜리 찬가에서 등장하는 발음을 들어보면 시피오 또는 쉬피오 정도로 발음이 들린다.
[2]
아프리카를 정복한 자라는 뜻이다.
[3]
참고로 소(小) 아프리카누스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사람이다.
[4]
스키피오는 가문 이름, 즉 성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단, 아프리카누스와 그의 부친은 성 뿐만 아니라 별호를 제외한
이름까지 완전히 똑같아 대 스키피오와 소 스키피오로 구분되었다.
[5]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214년 '푸리우스'라는 귀족이 원로원에 이 일을 고발했고, 감찰관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는 메텔루스 등의 말을 몰수하고 도덕적 문제로 더 높은 세금을 내야 하는 계층인 아에라리(aerarii) 계급으로 낮췄다. 이에 원한을 품은 메텔루스는 기원전 213년
호민관에 선임된 직후 두 감찰관을 재판에 회부하려 했지만, 다른 호민관 9명이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6]
사실 이런 상황이 당대 로마에 매우 이례적인 것은 아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실력있는 지휘관이 필요한 상태였고 따라서 종종 의외의 인물이 지휘권을 받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고작 백인대장에 불과했던
마르쿠스 켄테니우스 페눌라는 로마가 속한 주인 라티움의 바로 밑에 위치한 캄파니아 주의 지역을 잘 안다는 이유를 들어 로마 원로원에게 군단 지휘권을 요구하였고 로마 원로원은 이를 승인한 바 있었다. 단 그는 4개 군단, 1만 6천 병력을 이끌고 행군하다 근처에 있었던 한니발의 본대의 정찰에 의해 동향이 파악되었고 한니발은 자신이 직접 이끄는 군대를 행군로에 매복시킨 뒤
실라루스 전투에서 이들을 전멸시켰다.
[7]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사군툼 인근에 있었고,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루시타니아에 있었고, 마고 바르카는 카스툴로 근처에 있었다.
[8]
훗날 제정시대때 황제를 프린캡스 혹은 임페라토르라고 불렀지만 공화정 시기 임페라토르는 원로원의 명에 따라 해당 군단의 지휘권을 부여받은 최고 사령관이라는 의미였다
[9]
베르미나는 기원전 200년 사절을 로마로 보내 사면을 요청했고, 원로원은 위원들을 보내 마시니사와 협의했다. 그 결과, 그는 누미디아 서부의 일부 지역을 양도받는 조건으로 마시니사에 충성했다.
[10]
참고로 이 발언은 기록자 리비우스에 의하면 한니발이 스키피오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렉산드로스보다 뛰어난 자신을 이긴 명장이 스키피오라는 의미에서 대답한 카르타고식 화술이었다고 한다. 즉 한니발이 스키피오를 다른 장군들이 비교할 수조차 없는, 아예 순위 자체를 벗어난 최고의 자리에 올려주었다는 의미.
[11]
리비우스는 500달란트라고 밝혔고, 폴리비오스는 3천 달란트라고 기술했다.
[12]
한니발이 사망한 시기도 기원전 183년-181년으로 추정되니 서로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13]
이 전술이 바로
망치와 모루 전술로, 이것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그 완성자가 바로 한니발이다. 자세한 건 해당 항목으로.
[14]
스키피오가 거의 유일하게 카르타고보다 기병 전력에 있어 우위에 있었던 전투는 자마 전투이다.
[15]
특히 칸나이 전투에 비견될 정도로 대승인 일리파 전투에서 스키피오는 기병 전력의 열세를 절묘한 타이밍과 전술로 역전시켰다. 하스드루발의 코끼리 부대와 누미디아, 아프리카 기병들이 급하게 나오느라 전투 대형을 갖추지 못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기병들을 우회시켜 급습, 난전을 유도하였고 결국 코끼리들을 날뛰게 만들어 같은 기병들을 팀킬함은 물론, 누미디아 기병의 장기인 기동력도 활용하지 못하게 했다.
[16]
양측의 기병 수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영문 위키백과에서 인용한 Lazenby, Hannibal's War에선 6,100 대 4,000기라고 소개한 반면,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저술한 전쟁의 역사(책세상, 1995), 137쪽에서는 한니발의 기병이 2천명인데 반해, 스키피오의 기병은 4천명이 넘는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어느 쪽을 따르든, 양 진영의 기병 전력 차는 2천기 초반대로 동일하다.
[17]
16년 전 기원전 218
트레비아 전투에서도 로마군이 투창을 퍼붓자, 코끼리는 피아구분 없이 날뛰는 모습을 보여줬다. 비슷하게 자마 전투에서도 일부 코끼리가 한니발 군의 진영의 좌익으로 돌진하여 진영을 흐트려놓는 사태가 벌어진다.
[18]
"한니발의 보병들 상당수는 거의 훈련되지 않았고, 기병은 수적으로 심각하게 열세했다. 그래서 그는 예전에 늘 승리를 안겨주었던 포위전술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코끼리를 이용하여 모험을 해야했고, 코끼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모든 승패가 달려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코끼리는 한니발을 처참하게 저버렸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1995), 141쪽
[19]
이 과정에선 상당한 행운이 따르긴 했다. 당시 누미디아는 마실리 족과 마사이실리 족으로 나뉘어 시팍스와 마시니사가 주도권 독점을 놓고 다투고 있었는데 이것을 스키피오가 잘 이용한 것이었다. 이후 마시니사를 지원하고 후에 누미디아의 왕이 된 마시니사의 지원을 받게된다.
[20]
당시 카르타고 군은 제해권이 없던 탓에, 한니발에 대해 해상을 통한 빠른 보급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차선책으로 시칠리아를 장악한 후, 이곳을 경유해서 보급을 할 생각이었는데 이것이 완벽하게 틀어졌다.
[21]
제해권은
제1차 포에니 전쟁때 상실한 탓에 아프리카~이베리아 반도~알프스~이탈리아 반도로 이어지는 육로를 통해 길게 돌아서 보급해야 했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시칠리아 섬을 교두보로 삼으려 했으나 상술했듯이 마르켈루스에게 저지당했다. 뿐만 아니라 카르타고군은 인구도 적고 그로 인해 주로 용병에 의존하는 탓에 시민군과 동맹시군 위주인 로마군보다 역량이 떨어졌던데다, 지휘관들의 전반적인 능력마저도 낮은 탓에, 한니발의 본대를 제외하고는
베티스 고지의 전투를 제외하면 야전에서 이긴 전투가 없다.
[22]
마크 힐리, 칸나이 BC 216(플래닛 미디어,2007), 45쪽
[23]
실제로 자마 전투에서는 한니발군 1열의 골족들이 패할 기미를 느끼자 전투를 포기하고 선두대열을 이탈한 일이 있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1995), 140쪽
[24]
마크 힐리, 칸나이 BC 216(플래닛 미디어,2007), 53쪽
[25]
마크 힐리, 2007, 53쪽
[26]
B.H.리델하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사이, 2010), 152쪽
[27]
로마인들은 막대한 인력과 자원 때문에 한니발을 저지할 있었을 뿐 아니라 배반한 도시들을 재정복 할 수도 있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지 않는 한 이탈리아의 동맹국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자신의 군대를 보호할 수 없었다. 그는 로마가 자신의 새로운 동맹국들을 하나씩 재정복하는 상황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속수무책은 그의 위신을 높여주지도 못했고 다른 도시들에게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조장하지도 못했다. 프리츠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현대지성, 2017), 326-327쪽
[28]
영어로는 father of strategy. 이 말은 Ayrault Dodge, Theodore라는 미국의 전쟁사 전문가의 저서인 Hannibal: A History of the Art of War Among the Carthaginians and Romans Down to the Battle of Pydna, 168 BC. With a Detailed Account of the Second Punic War에 나온다.
[29]
물론 양자의 구도는 얼핏 비슷해보이지만 그 위상은 확연히 다르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 전역을 자신이 주도했으며, 그 덕분에 한니발은 휘하의 병력 중 오직 1만 5천만 데리고 급히 아프리카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자마 전투에서, 비록 병력의 질에서 앞서긴 했지만, 자신이 주도해서 승리를 쟁취했다. 반면에 웰링턴은 워털루 전역 초기, 나폴레옹의 기만에 낚여 그의 장기인 중앙배치전략을 허용했으며, 그 때문에 프로이센군과 단절된 탓에, 프로이센군이
리니 전투에서 패하는 것을
카트르브라 전투에 가로막혀서 막지 못했다. 게다가 건강 악화에 시달린채 온갖 실수를 저지른 나폴레옹을 상대로 패배직전까지 가다가,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에게 구원받아 가까스로 승리한다. 실제로 웰링턴은 해당 전투 저녁에 "밤을 주시든지 블뤼허를 주십시오. (Give me night or give me Blücher)"라고 기도했다. (프랭크 매클린, 나폴레옹 야망과 운명 (교양인, 2016), 1001쪽) 그 말을 할 당시엔 이미 프로이센군의 뷜로와 피르히의 군단이 프랑스군의 우익인 플랑스누아를 공격해 나폴레옹의 최종 예비대를 끌어들인 시점이었음에도 말이다. (제프리 우텐, 워털루 1815 (플래닛 미디어, 2007), 146쪽)
[30]
이처럼 스키피오와 웰링턴 양자를 비교해볼때, 스키피오는 전략면에서 자신이 설계한대로 아프리카 전역을 실행했고, 전술면에서도 한니발에게 밀리지 않았다. 그에 반해 웰링턴은 전략면에선 완패했다 볼 수 있으며, 전술측면에서도 그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공교롭게도 마치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군이 1만명 더 많았듯이 나폴레옹군도 5천명이 더 많긴 했으나, 자마 전투의 3만 5천 vs 4만 5천과 워털루 전투의 6만 8천 vs 7만 3천을 비교해봤을땐 후자가 더 미미한 차이이며, 당시 웰링턴은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즐겨쓴, 경사면 배후사면을 활용한 방어를 펼칠 수 있는 몽상장(Mont Saint-Jean) 언덕에 위치해있었다. 거기에 당시 나폴레옹은 위궤양, 치질, 그로 인한 수면부족에 시달렸었고, 때문에 중간 중간 수면을 취하러 전장을 이탈하는 등 전투를 세밀하게 감독하는데 실패했고 나폴레옹의 부재시 휘하에서 뛰어난 지휘력을 보여주었던 28인의 원수들은 완전히 흩어져 있었던 상황으로, 이러한 이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본다면 웰링턴이 전술면에서도 밀렸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러한 내막 때문에 한니발과 스키피오와 달리, 나폴레옹과 웰링턴을 진지하게 동등히 놓고 비교하는 전사학자는 전무한 실정이다.
[31]
잘 알려져있다시피 기병에는 잼병이었던 네는 영국군 방진으로 기병 돌격을 시전하여 근위기병대를 말아먹었고 나폴레옹 휘하 원수 중 최고의 기병술을 선보였던 뮈라는 나폴레옹을 배신했던 전적 때문에 합류하지 못했으며 그루시는 3만3천의 소중한 병력을 블뤼허의 미끼를 쫓아다니느라 낭비해버렸고 술트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예하 부대에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없이 혼자 전략적 판단을 해서 전장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다부는 파리에 남아있었고 마세나는 합류하지 않았다. 이정도 막장에서도 웰링턴을 관광태울 뻔한 나폴레옹의 전술적 능력은 가히 천재적이었던 것이 맞다
[32]
다만 이는 워털루 전투 한정이고, 이베리아 전역에서 웰링턴이 보여준 전략안을 폄하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학계에서 웰링턴을 명장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워털루가 아닌, 이베리아 전역에서의 활약 때문이다. 그는 보급과 민심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수비와 청야전술, 유격전 등의 방법으로 나폴레옹의 병력을 소모시켰다. 그 결과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부터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하고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갈 때까지 이베리아 전선에 상시로 최소 20만명의 병력을 주둔시켜야 했고, 이는 나폴레옹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이베리아 전역의 웰링턴은 쿠투조프와 더불어 나폴레옹의 발목을 잡을 전략안은 충분했다.
[3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는 7대 명장으로 스키피오가 아닌 한니발을 넣었다. 한편 동시대의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도 나폴레옹을 '한니발,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와 동급인 역대 최고의 지휘관'이라 평했는데, 여기서도 스키피오의 이름은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이들의 견해가 진리라고 할 순 없지만, 전쟁사에 손꼽힐만한 명장들의 견해이니만큼 무시하고 지나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34]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1995), 141-142쪽
[35]
프리츠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현대지성, 2017), 331-332쪽
[36]
상술했듯이
자마 전투에서는 한니발의 병력이 전적으로 열세였다. 때문에 이 전투에서의 승리가 스키피오의 우월성을 명확하게 입증해주진 못한다.
[37]
단 최근 연구 결과에서는 2만까지 보는 학자들도 꽤 많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병은 한니발이 우위였다고 볼 수 있다
[38]
"골족은 패배할 기미를 느끼자 싸움을 포기하고 선두대열에서 뒤로 빠져버렸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1995), 140쪽
[39]
물론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의 대응은 매우 훌륭했다.
[40]
예를 들어 '
파비우스 전략이나
로마의 부유함이란 전제조건이 없었어도 스키피오는 한니발에게 불리한 조건을 조성하는게 가능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41]
프리츠 하인켄하임은 아예 승리의 제1 공로자를
파비우스에게 돌리고 있다. "혹시 한니발이 자마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더라도 카르타고는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비록 트라시메네와 칸나이에서 승리했을지라도 로마의 동맹을 깨뜨리지 못함으로써 전쟁의 승패가 일찌감치 결정되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동맹을 깨뜨리는 것이 한니발의 전쟁 전략 가운데 최우선적인 목표이자 그가 성취하려고 했던 궁극적인 승리였던 것이다. 로마에게 승리를 안겨준 일등 공신은 자마 전투의 승자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니라 지연자 파비우스 막시무스였다. 그가 즐겨 사용한 지연과 고갈 전술이 한니발의 구도를 무력화시키고 로마의 막대한 전쟁 동원력이 가동될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다. 그는 지연함으로써 국가를 구했다.(cunctando restituit rem)."프리츠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현대지성, 2017), 341쪽
[42]
로마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공정하고 서로에게 유익한 동맹 체제로부터 카르타고와는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한 인적·물적 자원을 공급받았고, 그것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그 자원을 활용한 로마의 의지와 합하여 한니발의 패배를 이루어냈다. 프리츠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현대지성, 2017), 341-342쪽
[43]
이 문서에서 여러 번 언급된
리델 하트나
몽고메리, 프리츠 하이켈하임 등의 견해에 대해서도 학술적 의구심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
[44]
당시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과 굳건한 동맹관계에 있었다.
[45]
만년의 대
카토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가이누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에게 노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상황을 가정한 키케로의 글로, 역사적 신뢰성은 불확실하다. 아들 푸블리우스가 얼마나 건강이 나빴는지 대놓고 ‘건강이라는 게 아예 없는 수준’이라고까지 표현했다.
[46]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고조부이다. 이탈리카 출신의 첫 원로원 의원으로
노부스 호모였다. 이 사람의 아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신임 아래 원로원 의석 세습 전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직을 잠시 맡았다.
[47]
'아이밀리아 파울라'라고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