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 라틴어: Gaius Atilius Regulus Serr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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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조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아버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아들)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57년 |
전임 |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파테르쿨루스 |
동기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 |
후임 |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 퀸투스 카이디키우스 |
임기 | 기원전 250년 |
전임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이우스 푸리우스 파킬루스 |
동기 |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 |
후임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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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그는 아프리카 원정에 착수했다가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참패해 생포된 후 카르타고에서 사망한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의 형제라고 한다. 하지만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 모두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한 데 비해,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의 조부는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 이로 볼 때 두 사람은 조부가 다른 친척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그노멘인 '세라누스(Serranus)'는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대 플리니우스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원로원 사절들이 집정관 선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찾아왔을 때 들판에서 씨를 뿌리고 있었다고 한다.기원전 257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시칠리아의 틴다리스 시를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로마 함대가 틴다리스 만에 정박하고 있을 때 하밀카르가 이끄는 카르타고 함대가 전투 대형을 펼치지 않은 채 인근 해역을 지나가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레굴루스는 즉시 출격 명령을 내렸지만, 먼저 준비가 된 10척의 배만 이끌고 적을 향해 진격했다. 카르타고 함대는 적이 자신들을 향해 뛰쳐나온 것을 보고 일순간 당황해 후퇴하려 했지만, 곧 적의 공세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당시 로마의 대다수 함대는 선원들의 탑승이 완료되지 않아서 육지에 정박해 있었고, 레굴루스의 기함은 사실상 단독으로 카르타고 함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즉시 뱃머리를 돌려 무모하게 돌진하고 있는 적선들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9척의 로마 함선들이 적군의 충각 전술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지만, 레굴루스의 기함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빠른 항해"와 "훌륭한 선원" 덕분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후 나머지 로마 함대가 전장에 도착해 전투 대형을 갖추고 적을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카르타고 함대는 서둘러 철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10척이 나포되고 8척이 침몰되었다. 나머지 함대는 리파리 섬으로 피신했다. 그 후 틴다리스는 로마군의 공세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 틴다리스 해전)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아틸리우스'라는 인물이 리파리와 몰타 섬을 공략해 심하게 약탈했다고 한다. 이 인물은 기원전 257년 집정관 아틸리우스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이후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50년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그는 시칠리아에 상륙한 뒤 릴리바이움 공방전를 착수해 맹공을 퍼부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카르타고 수비대가 악천후를 이용해 성밖으로 뛰쳐나와 공성 무기를 모조리 파괴해버리자, 그는 더 이상의 공세를 중단하고 포위를 이어갔다. 릴리바이움 공방전은 그의 임기가 만료된 후에도 8년여간 지속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는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을 때 법무관을 맡아 보이족의 공격을 받은 동료 법무관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를 구원한 뒤 만리우스와 함께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임페리움을 넘겼다. 이후 기원전 216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