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라틴어: Gaius Lutatius Catul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20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
동기 |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
후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플레브스 출신인 루타티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아버지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기원전 242년 가문 최초로 집정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241년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카르타고 사절단과 협상한 끝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짓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기원전 220년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와 함께 집정관에 올랐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두 집정관은 알프스 산맥의 부족들을 정벌해 별다른 희생을 치르지 않고 복종시켰다고 한다. 반면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두 사람은 해상 원정을 단행했다고 한다. 기원전 218년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와 함께 크레모나와 플라켄티아 시 건설을 감독하는 위원회의 일원을 맡았다.
그러던 중 보이족이 한니발 바르카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키자, 세 위원들은 급히 무티나로 피신했다. 안니우스는 무사히 탈출했지만, 그와 게미누스는 보이족에 붙들려 15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 기원전 203년, 집정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가 보이족과 협상한 끝에 두 사람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