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 라틴어: Appius Claudius Caude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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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조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아버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형)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64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루키우스 마밀리우스 비툴루스 |
동기 |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후임 |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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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서막을 연 인물이다.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일족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트리키 계급으로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아피우스,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으며, 아버지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형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라고 한다. 본래 코그노멘은 크라수스이나, 대체로 로마 시민으로 알려진 서명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가이우스의 아들, 카우덱스(Appivs Claudivs C.f. Cavdex)"이다.카우덱스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야기에 따르면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첫 번째는 그가 해군을 이끌면서 얻었다는 이야기, 두 번째는 그가 해군을 이끌면서 명성을 얻었지만, 그가 멍청했다면서 얼간이, 멍청이라는 별명 아래 카우덱스라는 코그노멘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와 아울루스 겔리우스는 각각 자신들의 저서에 그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형제라고 적고 있다. 이 주장은, 카이쿠스가 그보다 1~2세대 간격을 두고 활약했기 때문에 현대 학계에게 한때 의심을 받았다. 그래서 1960년대 로버트 브로턴 같은 사람들은 카우덱스를 카이쿠스의 손자로 보는 경우도 있었고, 학계 역시 대 플리니우스가 카이쿠스의 차남 풀케르를 조카로 기술한 점 등을 이유로 고대 기록에서 오류를 범했을 확률이 미약하게 있을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포로 로마노에서 형제로 주장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와 이들 형제의 아버지로 알려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로 추정된 비문 등이 발굴됐고, 해석 후 관련 고대 기록을 살펴본 학계는 이 의심에서 벗어나, 과거처럼 카우덱스를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의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동생으로 소개 중이다. 이유는 다자녀 가족의 경우, 친형제 중에 맏이와 막내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일반적이며, 고대 로마 시대의 경우에는 영유아 사망이 높더라도 자녀가 생존할 경우에는 심할 경우 부모가 10대에 낳은 자녀와 30대에 낳은 자녀의 나이 차이가 많은 것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통상적으로 로마인 부부가 10대에 결혼해 늦게는 30대 후반 ~ 40대 초반까지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 점, 두 사람의 아버지로 알려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두 번 결혼했다면 전처의 자녀, 후처의 자녀 사이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도 있어, 단순히 나이 차이만으로 현대 사회를 기준으로 단정지어 서술하는 것은 무리가 많다는 지적이 많다.
기원전 264년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하기 전의 생애는 알려진 바 없다. 그렇지만 그는 형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뒤, 안정적인 경력을 쌓았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이, 카우덱스는 형 카이쿠스의 장남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고, 조카 루수스보다 연장자이나 조카가 집정관을 지내고 4년 뒤 집정관에 올랐다.
그가 집정관에 선임되었을 무렵, 메사나를 근거지로 삼고 시칠리아 각지를 약탈하던 라틴인 용병 마메르티니(Mamertini)가 시라쿠사 참주 히에로 2세의 공격을 받아 궤멸될 위기에 놓이자 카르타고에 구원을 요청했다.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즉시 출격해 시라쿠사군을 물리치고 도시에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러나 마메르티니의 상당수 인사들은 카르타고가 메사나를 완전히 지배하려 들 거라 여기고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다.
많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마메르티니가 이전에 저지른 악행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남부의 패권을 쥐기 위한 긴 전쟁을 이제 막 완료하고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데 시칠리아에 군대를 보내서 카르타고와 시칠리아를 상대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무익하다고 여겼기에 이 요청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부 지중해 최강국인 카르타고가 이탈리아 본토 코앞인 메사나를 장악한다면 안보가 위태로워진다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원로원 내에서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메사나에 군대를 파견하는 안건은 민회에 회부되었다. 당해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는 이 기회에 군공을 세워서 아욱토리타스(Auctoritas)[1]를 쌓고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평민들에게 풍부한 전리품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평민들은 이에 감화되어 마메르티니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이후 제비뽑기를 통해 집정관들의 임지를 정한 결과, 플라쿠스는 에트루리아로 가서 볼시니족과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카우덱스는 메사나를 배정받았다. 그는 2개 군단을 이끌고 메시나 맞은편 해안 도시인 레지아에 이르렀다. 이후 사촌이며 대대장을 맡고 있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소규모 분견대를 맡기고 바다를 건너게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바다를 성공적으로 건넌 뒤 마메르티니가 내부에서 호응한 덕분에 메사나를 장악했고, 한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도주했다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시칠리아를 양분하던 카르타고와 시라쿠사 모두 로마가 메사나를 장악한 것에 분노와 위협을 동시에 느꼈다. 그들은 힘을 합쳐 로마인들을 몰아내기로 하고 임시 동맹을 맺었고, 폴리비오스가 "한니발의 아들"로 언급한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히에로 2세가 이끄는 시라쿠사군이 연합해 메사나를 포위했다. 또한 함대를 메사나와 레지아 사이의 바다에 배치해 로마군이 메사나에 추가로 오는 것을 막았다. 카우덱스는 협상을 제안했지만 무조건 철수하라는 답변만 받을 뿐 별다른 성과가 없자, 야밤에 적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전 군대를 수송선에 싣고 바다를 건넜다.
해가 뜰 무렵 상륙을 완료한 로마군은 즉시 시라쿠사 진영을 공격했다. 시라쿠사군은 평원으로 나와서 회전을 벌였다가 보병대가 격파당하자 진영으로 철수했다. 로마군은 적 진영을 공략하려 했지만 적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쉽사리 이루지 못했고, 그 사이 시라쿠사 기병대가 로마 기병대를 격파하고 후방을 위협하자 철수했다. 그 후 히에로 2세는 로마군이 바다를 완전히 건넌 것에 낙담한 데다 시라쿠사 내부에서 변란이 일어날 조짐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시라쿠사로 철수했다. 다음날, 카우덱스는 카르타고군을 공격해 손쉽게 물리치고 메사나 포위를 풀었다.
그 후 카우덱스는 시라쿠사를 침공해 에체틀라(Echetla) 요새를 함락한 뒤 시라쿠사를 포위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시라쿠사를 완전 포위할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았고, 함대 없이는 바다를 봉쇄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많은 손실을 보고 메사나로 철수했다.[2] 이듬해인 기원전 263년 두 집정관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와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에게 임페리움을 넘긴 뒤 로마로 귀환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
한 사람이 지닌 사회적 명예와 능력, 영적인 힘 등을 종합한 개념. 이것을 많이 쌓은 자들은 신들의 총애를 입어 가문 대대로 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겨졌기에 로마 정치인 및 장군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2]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히에로 2세가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클라우디우스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고 주장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