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라틴어: Lucius Aemilius Pap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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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그나이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조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아버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25년 |
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메살라 루키우스 아푸스티우스 풀로 |
동기 |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후임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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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그나이우스, 아버지는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일부학자들은 기원전 282년과 기원전 278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가 그의 조부라고 주장하지만, 파스티 카피톨리니와 어긋나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기원전 225년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 해 보이족, 인수브레스족, 게사티족 등 여러 켈트 부족들이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모았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들은 보병 5만 명과 기병 2만 명을 보유했다고 한다. 그는 이들을 막는 역할을 맡았고, 레굴루스는 사르데냐에서 발발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출진했다.
그는 먼저 아드리아 해 연안의 아르미움에 주둔한 뒤 움브리아로 진입하는 적의 경로를 차단했으며, 법무관 한 명에게 에트루리아를 방어하게 했다. 이에 켈트 연합군은 서쪽 경로를 택하기로 하고, 피에솔레 인근에서 법무관을 물리치고 언덕으로 물러난 로마 패잔병들을 포위했다. 하지만 그가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러 달려오자, 갈리아인들은 그동안 확보한 전리품을 보존하기 위해 리구리아를 통해 자기들의 땅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그는 동료 집정관 레굴루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적과 소규모 접전을 벌이면서 추격했다.
이후 레굴루스가 피사에 상륙한 뒤 진로를 가로막으면서, 갈리아인들은 두 집정관의 군대 사이에 놓였다. 얼마 후, 두 집정관은 텔라몬 인근에서 갈리아인들을 협공했다. 레굴루스는 격전 도중에 전사했지만, 로마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갈리아인 4만 명이 전사했고 지도자 한 명을 포함한 1만 명이 생포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보이족의 땅을 침공해 약탈을 자행한 뒤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20년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들은 로마의 시민들을 에스퀼리나, 팔라티나, 수부라, 콜리나에 이주시켰고, 북이탈리아에 플라센티아와 크레모나를 식민도시로서 건설했다. 또한 플라미니우스 곡예장을 세워서 시민들이 여흥을 즐길 수 있게 했다.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 후 국고가 바닥나자, 그는 통화 문제를 관리하는 위원회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는 기원전 205년 법무관으로서 시칠리아를 통치했으며, 기원전 172년에 사망할 때까지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데켐브리 사크리스 파시운디스(decemviri sacris faciundis: 10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