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루스쿠스 라틴어: Aulus Postumius Albinus Lusc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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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조부)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아버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파울룰루스(형제)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형제)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0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
동기 |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후임 |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 풀비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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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포스투미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아울루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242년 집정관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그의 조부라고 추정하지만, 기원전 242년 집정관 아울루스에게 아들 아울루스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형제로 기원전 174년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파울룰루스와 기원전 173년 집정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있었다. 아그노멘인 루스쿠스(Luscus)는 '비뚤어진'이라는 의미로,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기록에서만 언급된다.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이 한창이던 191년에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가 케팔로니아 섬을 점거한 뒤 레가투스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여러 척의 선박과 군대를 파견했다고 한다. 여러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180년 집정관과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187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와 함께 수석 조영관에 선임되었다. 이해 루디 로마니 행사 도중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설치된 돛대가 폴렌티아 여신상 위에 떨어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원로원은 이를 불길한 징조라고 간주하고 경기를 하루 연장하고 2개의 새로운 동상을 세웠다.
기원전 186년 당해 집정관이자 그의 사촌이었던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의 지원에 힘입어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고대 사료에서는 그가 법무관으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기원전 180년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피소가 재임 도중 사망한 뒤에는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았다. 그는 리구리아를 임지로 배정받았지만, 보결 집정관 선거를 주관하느라 리구리아에 빨리 갈 수 없었고, 그 사이에 총독들이 지역 부족들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뒤늦게 리구리아에 도착한 그는 여러 산악 및 해안 부족들을 복종시켰다.
기원전 176년 발칸 반도로 파견된 사절단의 리더가 되었다. 당시 다르다니아 부족은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세우스 지원을 받은 바스타르네 족의 침공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있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원로원에 사절단을 보내 마케도니아가 바스타르네를 부추겨서 자신들을 치게 했다고 주장했다. 페르세우스는 즉시 사절을 보내 바스타르네의 다르다니아 침공은 자신이 조장한 게 아니라고 부인했다. 원로원은 현지의 상황을 좀더 면밀히 살펴보기 위해 알비누스를 비롯한 사절들을 파견했다. 알비누스는 기원전 175년 초에 로마로 돌아온 뒤 다르다니아인과 바스타르네 족간의 전쟁이 심화되었다고 보고하면서도, 페르세우스가 바르타르네 족을 지원하고 있음을 명백히 입증하는 물증은 없다고 밝혔다. 이에 원로원은 일단 지켜보기로 하면서도 페르세우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기원전 174년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와 플라쿠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들이며 기원전 174년 법무관을 역임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불량한 행실을 비난하고 원로원에서 제명했으며, 플라쿠스의 형제 역시 제명되었다. 이와 더불어 7명의 원로원 의원이 원로원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기원전 187년과 기원전 175년에 집정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179년 감찰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180년부터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맡고 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삼았다. 한편, 알비누스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승인 없이는 어떤 건물도 짓기를 거부했지만, 동료 집정관 플라쿠스는 로마 거리의 도로를 포장하는 공사를 실시하고 여러 개의 다리와 극장을 건설했으며, 카피톨리누스 언덕 경사면, 삼중 문 뒤의 시장 및 여러 현관을 조약돌로 보강하는 등 대규모 공사를 실시했다.
기원전 173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사망한 뒤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데켐브리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71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했을 때 크레타에 사절로 파견되어 로마군에 복무할 보조병을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그의 두 형제로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파견되었다. 기원전 167년 페르세우스가 패망한 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에서 전후 처리를 위한 계획을 세우는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는 기원전 151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