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폼페이우스 라틴어: Quintus Pompe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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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84년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아울루스 폼페이우스(아버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아들?) 퀸투스 폼페이우스(아들?) 폼페이아(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41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 |
동기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
후임 |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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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파스티 카피톨리니는 아버지가 아울루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밝혔지만 조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가 하찮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가문 출신이라고 주장했고,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아버지가 플루트 연주자였다고 설명했다. 즉, 그는 폼페이우스 씨족에서 최초로 집정관에 오른 신참자였다. 키케로는 그가 매우 많은 사람들의 적대감, 가장 큰 위험과 고난을 극복하고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거의 같은 나이였으며 절친한 친구였다고 덧붙였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그가 기원전 184년에 출생했을 거라 추정한다. 또한 학계에서는 그를 가족과 우호적인 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사랑, 온건한 개혁 계획으로 단결한 "스키피오 서클"의 회원으로 분류한다.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180년 최고 행정관 간의 취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에 따라 기원전 144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법무관 임기 동안 비리아투스와 싸웠다고 밝히면서 이 사건이 기원전 143년에 벌어졌다고 기술했다. 일부 학자들은 아피아노스가 프라이노멘 퀸투스를 노멘 퀸크티우스로 혼동해 착오를 범했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학자들은 아피아노스는 착각하지 않았으며 폼페이우스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비리아투스와 싸웠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142년, 그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가장 친한 친구인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의 입후보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투표자들이 자신을 지지하도록 유도했고, 선거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라일리우스를 제쳐놓고 자기가 출마해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함께 기원전 141년도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이를 알게 되자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플루트 연주자의 도움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다니, 우리는 바보였다."
이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라일리우스와 연대하여 폼페이우스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한편 원로원은 이탈리아를 카이피오의 임지로 삼고 그를 가까운 히스파니아로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부 학자들은 폼페이우스가 민회를 움직여 원로원을 압박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카이피오는 이에 반발했지만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폼페이우스는 바다를 통해 가까운 히스파니아에 도착한 뒤 전임자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로부터 보병 30,000명과 기병 2,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인계받았다. 이후 켈티베리아인들과 2년간 전쟁을 벌여 누만티아와 테르만티아 외의 모든 도시를 공략했다. 이후 누만티아 마저 공략하려 했지만 첫번째 전투에서 누만티아인들이 평야에서 일부러 패한 척하여 요새화된 들판으로 유인한 것에 넘어가는 바람에 기병대가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폼페이우스는 누만티아 공략이 쉽지 않다고 여기고 테르만티아를 공격했지만 하루 만에 3차례의 전투를 모두 패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연이은 패배에 몹시 두려워서 무기를 든 채 숙영지에서 밤을 샜다고 한다. 다음날 양측이 다시 맞붙었으나 어느 쪽도 승기를 잡지 못했다. 폼페이우스는 승리를 선언했지만 얼마 안 가 후퇴했다. 폼페이우스는 산악 지대에 있는 라그니 마을을 공격했다. 그곳 시민들은 며칠간 저항하다가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폼페이우스는 방어에 참여한 누만티아인 400명을 넘기라고 요구했고, 라그니 시민들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전에 이 사실을 눈치챈 누만티아인들은 야간에 주민들을 공격해 학살을 자행했다. 로마군은 성 안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성벽에 사다리를 설치해 도시를 점령했다. 이 날 라그니 시는 파괴되었고 모든 귀족이 사망했다. 폼페이우스는 누만티아인과의 화해를 희망하면서 살아남은 누만티아인 200명을 석방했다.
폼페이우스는 연말이 되기 전에 로마에 우호적인 부족들의 영지를 약탈하던 루시타니아 도적들을 물리치고 많은 이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팔았다. 이후 겨울 동안 숙영한 그는 기원전 140년 봄 다시 누만티아를 포위했다. 그는 도시를 굶주리게 해서 항복을 받아내기로 마음먹고, 근처에 흐르는 강의 방향을 바꾸는 공사를 실시했다. 그러자 누민티아군은 격렬하게 반격해 로마군이 수로 공사를 제대로 할 수 없게 했다. 결국 로마군은 봉쇄를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거듭된 손실로 인해 전투력과 사기가 갈수록 떨어졌다. 나중에는 병사 대부분이 경험이 부족한 신병으로 대체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이런 상황에도 후퇴를 거부하고 겨울 동안 군대를 계속 누만티아 인근에 배치했고, 로마 병사들은 추위, 질병, 누만티아인과의 전투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안전한 도시로 철수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이 자신을 소환하여 책임을 물을 걸 두려워해 누만티아인들과 협상했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항복하라고 요구했지만, 비밀리에 인질을 돌려줄 테니 30달란트만 지불하라고 요청했다. 누만티아인들은 로마가 이를 받아들일지 의문을 품고,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나중에 폼페이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폼페이우스는 누만티아가 항복했다고 선전하며 군대를 철수시켰다. 기원전 139년 가까운 히스파니아의 새 총독으로 부임하여 히스파니아 주둔군 사령관을 맡게 된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누만티아에 접근하여 "항복했으니 무기를 반납하라"고 요구하자, 누만티아인들은 "전임 사령관이 맺은 협약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라이나스는 폼페이우스에게는 누만티아인들이 무조건 항복했다고 전해들었는데 정작 누만티아인들이 '전임 사령관과 맺은 협약'을 운운하자 깜짝 놀랐고, 아직 히스파니아에 남아있던 폼페이우스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은 누만티아인들에게 어떤 양보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누만티아인들이 보낸 사절은 이에 대응해 폼페이우스와 합의를 이뤘을 때 동석했던 트리부누스 밀리툼과 레가투스들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라이나스는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 지 골머리를 앓은 끝에 폼페이우스와 누만티아 사절을 로마로 보내 원로원 앞에서 증언하게 했다.
폼페이우스는 여전히 자신이 아무런 양보나 보증을 하지 않았고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누만티아 사절은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를 논리적으로 밝혔다. 이에 원로원 내 수많은 인사들은 폼페이우스가 로마 시민과 원로원을 속였다고 규탄하며 그를 누만티아인들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폼페이우스는 전임자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가 군대를 자신에게 넘겨주기 위해 모든 병사를 동원 해제하고 식량이 있는 창고를 약탈했으며, 심지어 군비를 유용했다며 책임을 떠넘기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와 누만티아인과의 합의를 무효로 규정했고, 라이나스는 원로원이 허락하지 않은 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누만티아를 포위 공격했지만 상당한 손실을 입고 패배했다. 그 후 폼페이우스의 정적들은 불법 협약을 체결한 폼페이우스를 당장 누만티아인에게 넘기는 법안을 민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귀족들이 자신들과 같은 플레브스인 폼페이우스에게 모든 책임을 물고 있다고 여기고 폼페이우스를 누만티아에 넘기는 법안을 거부했다.
기원전 138년,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가 폼페이우스를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했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고발자들의 권위가 자신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죄를 선고했다.
기원전 137년,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누만티아인들과 맞서 싸우다가 전군이 궤멸될 위기에 놓이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통해 협상한 끝에 병사들을 온전히 빠져나오게 하는 대가로 누만티아의 독립을 보장하고, 공물을 바치지 않는 조건으로 평화협약을 맺었다. 로마 정계는 이민족의 아량으로 풀려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만키누스와 그라쿠스를 비롯한 장수들을 모조리 재판에 회부했다. 이때 만키누스는 폼페이우스가 누만티아와 멋대로 맺은 협약으로 인해 전투가 불가능해졌다며 자신의 패배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를 묵살하고 협약을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만키누스를 누만티아에 알몸으로 넘겼다. 하지만 누만티아인은 로마의 배신을 한 사람에게만 물 수 없다며 만키누스를 되돌려보냈다.
기원전 136년 집정관 루키우스 푸리우스 필루스가 로비를 통해 히스파니아를 임지로 배정받는 데 성공하자, 그는 부당한 결정이 내려졌다며 필루스의 권력욕을 강하게 비난했다. 이에 필루스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레가투스로 삼아 히스파니아로 데려갔다. 그의 정적이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도 이때 그와 함께 원정에 동행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이 화해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133년,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농지 개혁을 단행하자, 그는 이를 강력히 반대하는 원로원파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집 옆에 살았던 그는 페르가몬 왕국의 국왕 아탈로스 3세가 사망한 뒤 그의 왕관과 보라색 로브가 그라쿠스에게 전달된 것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아탈로스 3세가 로마에 기증한 재산을 농지 개혁에 쓰겠다는 티베리우스의 제안을 문제삼았고, 티베리우스의 호민관 임기가 만료되면 당장 고발하겠다고 맹세했다. 이에 심한 압박감을 느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 재선에 도전했다가 거센 반발을 샀고, 결국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가 이끄는 무리에게 피살당했다.
기원전 131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평민 출신이 2명의 감찰관 직위를 독차지한 것은 로마 공화국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집정관은 로마의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모든 시민이 자녀를 가질 목적으로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반하는 자들은 막대한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아내를 여태 두지 못한 홀아비와 결혼할 생각이 없던 청년들이 격분했고, 호민관 가이우스 아티니우스 라베오는 민심을 혼란에 빠뜨린 죄를 물어 절벽에 내던져 죽이자고 요구했지만 다른 호민관들이 거부권을 행사한 덕분에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88년 집정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가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그러기엔 활동한 시대 간격이 크다며 동의하지 않는다. 또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132년 호민관 퀸투스 폼페이우스가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분명하지 않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의 외손자 가이우스 신키니우스가 재무관을 맡다가 사망했다고 언급했는데, 이에 따르면 그에게는 신키니우스 가문과 결혼한 딸 폼페이아가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