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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라틴어: Publius Mucius Scaevola |
|
생몰년도 | 기원전 176년 ~ 기원전 114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조부)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아버지) 리키니아(어머니)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키아누스(형제)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아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33년 |
전임 |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동기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
후임 |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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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폰티펙스 막시무스.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무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들은 에트루리아의 클루시움 군주인 포르세나가 로마를 침공했을 때, 포르세나를 암살하려 했다가 실패한 뒤 포르세나 앞에서 오른손을 스스로 불사르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덕분에 풀려난 가이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의 후손을 자처했다. 조부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기원전 215년 법무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기원전 175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어머니는 리키니아이며, 형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키아누스는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에 입양된 뒤 기원전 131년 집정관, 기원전 132년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역임했다.기원전 176년경 출생했으며, 기원전 141년 호민관에 선임된 뒤 살인 재판을 주관하면서 용의자로부터 뇌물을 받았던 전년도 법무관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투불루스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조사가 시작되자, 곧 화가 닥칠 것임을 직감한 투불루스는 자발적으로 망명했다. 기원전 136년 법무관에 선임된 그는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누만티아인들과 굴욕적인 평화 협약을 맺었다가 원로원에 의해 누만티아로 넘겨졌다가 돌아온 뒤 원로원에 복귀하려 했다가 호민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로부터 로마 시민권이 박탈되었다며 저지한 사건에 관한 토론에 참석했다. 그는 만키누스가 여전히 로마 시민이라고 주장하면서, '고발자'라는 별명으로 일컬어지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격렬하게 맞붙었다. 토론 결과는 만키누스를 로마 시민으로 인정하되 원로원 의원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133년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피소가 시칠리아에서 발발한 제1차 노예 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출진한 동안, 그는 로마에 남아 행정을 주관했다. 이 해에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가장 가난한 시민들에게 공유지를 분배하는 농지법을 제시했다. 그는 그라쿠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그의 개혁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힘썼다. 그러나 반대 세력의 반발이 갈수록 격렬해졌고, 급기야 그라쿠스가 호민관 임기가 만료되자마자 자신을 집단 고소하려는 정적들의 계획을 눈치채고 호민관 재선에 도전하면서 갈등이 폭발했다. 로마 역사에서 호민관이 재선하는 것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호민관을 연이어 맡을 수 없다는 규정은 없었기에 선거 출마가 가능했다.
이에 격분한 귀족들은 무뢰배들을 끌어모아 유피테르 신전 인근의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호민관 선거가 치러지고 있을 때 폭동을 일으켰다. 투표장에서 격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그라쿠스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는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제스처였지만, 정적들은 그가 지지자들에게 왕관을 요구하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그들은 곧장 로마에 있던 유일한 집정관인 무키우스에게 달려가서 왕이 되려하는 그라쿠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했다. 무키우스는 이에 대해 딱 잘라 거절했다.
"로마 시민은 어떤 죄를 지었든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 생명을 잃을 수 없소. 폭력에 의지해 사태를 해결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러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가 동료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여러분! 무키우스 집정관은 공화국을 구하기 위해 나서기를 거부했습니다. 저와 함께 조국을 구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리고는 토가의 가장자리를 머리 위로 던져서 얼굴을 가린 뒤 추종자들을 거느린 채 투표장으로 뛰어들어가 곤봉과 의자 다리로 그라쿠스의 추종자들을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그라쿠스와 300명 가량의 민중이 피살되었는데, 나시카 일당은 이 유해를 테베레 강에 던졌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저들이 자신까지 해칠 것을 두려워한 무키우스는 입장을 바꿔 나시카가 공화국을 지켜냈다며 찬사를 보냈다.
기원전 130년 형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키아누스가 사망한 후 폰티펙스 막시무스에 발탁되었다. 이후 누만티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반대 세력의 수장이 되었지만, 아이밀리아누스가 기원전 129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기원전 114년에 사망했다. 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들이 편찬한 연대기를 80권의 책으로 묶은 '대연대기'로 통합했다고 전해지나 현존하지 않는다.
아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기원전 95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친구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훌륭한 웅변가이자 법학자로 명망 높았다. 그러나 기원전 82년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추종하는 이들에게 피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