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9 08:44:53

제1차 노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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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노예 전쟁
영어: First Servile War
시기 기원전 136년 ~ 기원전 132년
장소 시칠리아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국 노예 반란군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힙사이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티투스 마니우스 아퀼리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
에우노스
클레온†
아카이오스†
코마누스†
결과 로마 공화국의 승리.

1. 개요2. 배경3.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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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135~132년, 시칠리아 섬에서 학대당하던 노예들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집단 봉기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2. 배경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공화국은 지중해의 요충지인 시칠리아 섬 전역을 차지했다. 고대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 마저 패배하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시칠리아에 살던 카르타고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들이 차지하던 풍요로우면서도 싼 토지들은 로마에서 건너온 지주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들은 드넓은 토지를 운영하고자 지중해 세계에서 대거 사들인 노예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다. 노예들은 로마인 지주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도 별다른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영양실조 또는 병에 걸려 죽어갔다. 시칠리아 출신의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로마가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시칠리아를 죽음이 가득한 황폐한 세계로 만들었다며 치를 떨었다. 지주들의 악행을 고발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강력한 정치적 입지를 갖추고 있었던 그들은 뛰어난 언변을 갖춘 변호사를 고용하여 무죄 판결을 얻어내기 일쑤였다. 이러한 착취에 고통받은 끝에, 노예들은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3. 경과

에우노스는 시리아 출신으로, 에나 시의 그리스인 지주 안티게네스의 노예였다. 그는 입에서 불을 내뿜는 등 마술을 잘 구사했다고 하며, 언변도 탁월했다고 한다. 안티게네스는 그의 재주를 활용하여 돈을 벌고자 공연에 자주 내세우곤 했다. 에우노스는 공연 중에 자기가 미래를 볼 수 있는 재주가 있다면서, 훗날 왕이 되어서 지금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귀족 관객들이 자신을 섬기게 될 거라고 '예언'했다. 그러면서 지금 팁을 준다면 나중에 살려주겠다고 덧붙였다. 관중들은 이에 박장대소하며 상당한 팁을 줬다고 한다.

귀족들은 그저 불이나 내뿜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는 우스꽝스러운 노예로 취급했지만, 노예들 사이에서는 에우노스가 정말로 왕이 되어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거라는 믿음이 퍼졌다. 그러던 기원전 136년, 에우노스는 400명의 노예를 포섭하여 엔나 시에서 폭동을 일으킨 후, 귀족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팁은 받았지만 살려주지는 않는다 이에 인근의 노예 6,000명이 곧바로 가담했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인근에 주둔한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토벌하려 했으나, 병력이 너무 적어서 반란군에게 제압당했다.

에우노스는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였던 안티오코스 7세를 본따 자신을 '안티오코스 왕'이라 칭하면서 그리스인 노예 아카이오스를 총사령관으로 세웠다. 반란군은 여러 곳을 돌며 토지와 광산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던 노예들을 해방하고 주인들을 학살했다. 이 소식은 시칠리아 전역에 퍼졌고, 기원전 135년, 소아시아 남부 킬리키아 출신의 노예 클레온이 이에 호응해 시칠리아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5,000명의 동지를 모아 아그리젠툼을 공략하고 에우노스 진영에 가담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반란군에 가담한 이들은 남성과 여성을 포함해 20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과장으로 간주하며, 실제 병력은 2~30,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법무관 루키우스 힙사이우스는 갈수록 강성해지는 노예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시칠리아 민병대를 이끌고 반격했으나 격파되었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등 3명의 다른 법무관들이 진압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고, 피소는 본영을 반란군에게 내주기까지 했다. 기원전 135년 연말, 반란군은 해안 지대의 요새 도시를 제외한 시칠리아 섬 전역을 장악했다. 기원전 134년 집정관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진압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원전 133년 새 집정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가 재차 노예 반군과 맞섰다. 그는 군대의 규율을 회복하고 모르간티아 요새를 함락하여 9,000명의 노예를 살육했다. 이후 반란의 진원지인 엔나 공략을 총독인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에게 맡기고, 자신은 시칠리아 섬의 다른 지역을 수복했다. 다만 시칠리아 섬 북동쪽 해안 지대의 주요 요새인 타우로메눔을 탈환하는 데는 실패했다. 기원전 132년 새 집정관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가 타우로메눔을 포위한 후, 타우로메눔 수비대는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결국 일부 수비대가 배신하여 성문을 몰래 열었고, 로마군은 성안으로 진입한 뒤 붙잡은 아카이오스 등 모든 노예를 고문한 뒤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수장인 에우노스는 타우로메눔이 함락된 후 구덩이에 숨어있다가 체포된 뒤 모르간티나 시로 끌려가서 재판을 기다리다가 병에 걸려 죽었다.

이제 토벌군은 마지막으로 남은 엔나로 쳐들어갔다. 클레온은 포위망을 무너뜨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돌격했으나 결국 전사했고, 살아남은 노예 반란군 역시 내부의 배신으로 성이 함락되면서 전멸되었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동굴 속에 숨었다가 로마군이 다가오기 전에 자기들끼리 창으로 찔러 죽이는 방식으로 자살했다. 루필리우스는 포로로 잡은 20,000명을 최악의 극형인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리하여 에우노스의 노예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로부터 별다른 교훈을 얻지 못하고 노예들을 이전처럼 악독하게 대했다. 이는 노예들의 분노를 초래해, 30여 년후 제2차 노예 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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