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라틴어: Tiberius Sempronius Long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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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 ~ 기원전 174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4년 |
전임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대 카토 |
동기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 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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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평민 집안인 셈프로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 씨족은 기원전 304년에 처음으로 집정관을 배출했으며, 이후에는 신분은 평민이지만 귀족과 거의 대등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노빌레스로 발돋움하였다. 아버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는 기원전 218년 집정관에 선임되어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트레비아 전투에서 맞서 싸웠으나 참패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기원전 215년 루카니아의 그루멘툼에서 한니발의 부하 한노를 물리치고 브룬티움으로 몰아넣었으며, 그 공적으로 개선장군에게 주어지는 호칭인 '롱구스(Longus)' 칭호를 받아 이를 코그노멘으로 삼았다.그는 기원전 210년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가 사망한 후 사제단이 맡는 직책인 아우구르(Augur)에 선임되었고, 그 해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버지가 맡고 있던 퀸데켐비르(quindecemvir)[1]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200년 호민관이 되었고, 히스파니아 원정을 마치고 귀환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임페리움(지휘권) 없이 히스파니아 부족들과 전쟁을 벌였다는 이유로 경기장에서 군중에게 갈채를 받을 권리인 오라토르(Orator)를 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원전 198년 조영관에 선출되었고, 기원전 197년 캄파니아 해안에 5개의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임무를 수행한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말 법무관에 선출되어 사르데냐에서 행정을 담당했다. 이후 사르데냐 총독으로서 기원전 195년까지 속주민들을 다스렸다. 기원전 194년 아버지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아들이자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전쟁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이 점을 들어 셈프로니우스 가문과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이 클리엔텔라 관계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후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배정받은 그는 보이족에 대항한 원정을 벌여 자신의 진영을 습격한 적을 물리쳤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트라키아와 다뉴브 강에 인접한 땅을 다스렸고 대 카토가 그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이었다고 기술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플루타르코스가 오인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기원전 193년에 신임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 휘하 레가투스를 맡아 보이족과 다시 싸웠으며, 무티나 전투에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분견대를 이끌었다. 또한 기원전 191년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의 지휘하에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아이톨리아 동맹 연합군과 맞섰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가 헤르클레아 공략에 큰 공을 세웠다고 밝혔다.
기원전 184년 감찰관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이 선기에는 그 외에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대 카토,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가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스키피오 가문의 정적인 대 카토의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아보이자, 카토의 정치적 동지인 플라쿠스를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은 카토를 낙선시키기 위해 연합했다. 당시 카토는 매우 급진적인 정치인으로 간주되고 있었기에, 상대 후보들은 유권자들에게 온건한 감찰관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카토는 자신이 급진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도덕 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선거 결과 카토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당선되었고, 그는 낙선했다.
기원전 174년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후손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