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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 마르키우스 |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 퀸투스 푸리우스 |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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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 라틴어: Publius Cornelius Scipio Nasica Corculum |
|
출생 | 기원전 206년 |
이탈리아 로마 | |
사망 | 기원전 141년 |
이탈리아 로마 |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조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아버지) 코르넬리아(아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62년 |
전임 |
대 그라쿠스 마니우스 유벤티우스 탈나 |
동기 |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임기 | 기원전 155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푸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
동기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후임 |
퀸투스 오피미우스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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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폰티펙스 막시무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일리리아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고대 카르타고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으나 대 카토가 이끄는 강경파에게 밀렸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집안인 코르넬리우스 씨족 스키피오 가문 출신이다. 조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는 기원전 22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동생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함께 히스파니아 전선으로 파견되어 7년간 본국의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여러 차례 승전하며 로마의 히스파니아에서의 입지를 다졌지만 기원전 211년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동생과 함께 전사했다. 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는 코가 오똑한 편이었기 때문에 '뽀족한 코'라는 의미인 나시카(Nasica)라는 아그노멘으로 불렸다. 그는 기원전 191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먼 히스파니아 속주와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총독을 맡아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는 이민족을 물리쳤다. 이 인물의 아들인 그는 침착한 성격에 사리에 맞는 행동을 추구했기 때문에 코르코룸(Corculum: 합리적인 자)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기원전 169년 조영관에 선출된 그는 친척이자 동료 조영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함께 표범과 코끼리가 참가한 웅장한 서커스를 개최해 시민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이듬해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휘하 대대장으로 참여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이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세우스가 올림푸스 산 인근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고지에 틀어박혀 로마군의 진로를 막았다. 이후 정찰병들이 페레비아를 통과하는 우회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곳은 매우 좁고 험난해서 자칫 적의 급습을 받는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다들 그 길로 가기를 꺼렸는데, 그가 처음으로 분견대를 이끌고 그 길로 가겠다고 자원했다. 파울루스의 허가를 받은 그는 파울루스의 아들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5천 또는 8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 길로 향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르세우스는 밀로에게 12,000명의 병력을 보내 로마군보다 먼저 길목을 장악하게 했다. 이에 그는 강행 돌파하기로 작정했고, 양군은 산봉우리에서 격전을 치렀다. 그러던 중 로마군에 고용된 트라키아 용병대가 적의 대열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자, 밀로의 군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패퇴했다. 이후 그의 분견대가 평야로 내려오자,페르세우스는 마케도니아 평원으로 후퇴했다. 이후 양군은 피드나 시 인근에서 대치했다. 그는 파울루스에게 가능한 한 빨리 전투를 벌이자고 주장했지만, 파울루스는 다음날까지 전투를 미뤘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파울루스는 소규모 기병대를 그에게 맡기고 페르세우스가 도주한 암피폴리스로 파견했다. 페르세우스는 추격을 피해 사모트라케 섬으로 도주했다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의 로마 함대가 포위하자 항복했다. 그 후 그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분견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의 편을 들은 일리리아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하고 오리크에서 파울루스의 본대와 합세한 뒤 이탈리아로 귀환했다.
기원전 165년경 법무관을 역임한 그는 기원전 162년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된 취 제비뽑기 결과에 따라 코르시카로 떠났다. 그러나 이해 집정관 선거를 감독했던 대 그라쿠스가 문제제기를 했다. 이보다 앞서, 대 그라쿠스가 집정관 선거를 주관할 때 새가 날아가는 걸 보고 점을 쳐서 투표를 해도 좋은 지를 정하던 복점관이 불길한 징조가 보였다고 주장했다. 그라쿠스는 이를 무시하고 투표를 강행했는데, 투표 결과가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나오자, 복점관이 운운했던 불길한 징조를 새삼스럽게 거론했다. 두 집정관은 즉각 소환되었고, 대 그라쿠스로부터 사임하지 않으면 신의 분노를 살 거라는 위협을 받았다. 결국 두 집정관은 사임해야 했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보결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
기원전 159년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와 함께 감찰관에 당선된 그는 원로원 건물에 현관을 짓고 로마에 최초의 물시계를 설치했으며, 포로 로마노에 설치된 조각상들 중 지나치게 화려하고 문란한 조각상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아울루스 겔리우스는 그가 인구조사를 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한다. 그는 한 에퀴테스가 가지고 온 말이 삐적 마른 것을 보고 물었다.
"저 말이 어째서 당신보다 마른 거요?"
주인이 답했다.
"나는 내 자신을 돌보고 쓸모없는 노예 스타티우스가 말을 돌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답변이 감찰관의 권위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이 에퀴테스를 로마 시민의 가장 낮은 범주인 아르아리(aerarii)로 강등시켰다고 한다.
기원전 155년, 그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두번째로 선출되었다. 그는 로마령 일리리아를 잇따라 습격한 달마티아인과의 전쟁을 이어받아 적의 수도인 델미니움을 함락하고 철저히 파괴했다. 이후 델미니움은 기록상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루키우스 암펠리우스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그가 개선식과 임페라토르 칭호를 모두 거부했다고 기술했지만, 기원전 12년에 세워진 비문 '파스티 트리움팔레스(Fasti Triumphales)'에는 그가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적혀 있다. 학자들은 그가 실제로 개선식을 거행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원로원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를 추종하는 이들은 로마가 정복전쟁을 잇따라 벌이는 것은 언젠가 큰 화를 야기할 거라며 주변국들과 우호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고대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대 카토의 주장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카르타고가 존속하는 한 민중들이 그들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껴 '오만함'을 억제할 수 있지만, 카르타로가 사라져버리면 더 이상 그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카토가 어떤 연설을 하든 말미에 "이에 덧붙여서 나는 카르타고가 파괴되어야 한다고 믿는다(Ceterum censeo Carthaginem delendam esse)"라고 말하자, 그는 이에 대응해 "나는 카르타고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기원전 154년, 카르타고인들은 자국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침략하는 누미디아 국왕 마시니사에게 분노해 전쟁을 벌이는 것을 금지한 로마와의 조약을 위반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카토는 이 군대가 로마에 맞서 집결했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단행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강력히 반대했고, 원로원은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의했다. 기원전 153년, 마시니사의 아들 굴루사가 카르타고인들이 함대를 만들고 전사를 모집하고 있다고 알렸다. 그는 다시 사절단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시키고 자신이 그 구성원이 되었다. 그 후 카르타고인들이 실제로 육군과 함대를 구축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점차 카토에게 밀리다가 카르타고를 해안에서 아프리카 내륙으로 이전하는 조건으로 카르타고와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인들이 이를 사실상 자멸하라는 것으로 간주하고 반기를 들면서,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152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사망한 후 공석이 된 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150년 발칸 반도에 파견된 그는 필리포스 5세의 사생아를 자처하며 스스로 필리포스 6세를 칭한 안드리스코스의 반란(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직면했다. 그는 협상을 통해 안드리스코스의 침략을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아카이아 동맹과 페르가몬 왕국으로부터 온 지원군과 지역 민병대를 이끌고 테살리아를 방어했다. 하지만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어 로마가 점령한 마케도니아를 보전하기 어렵자,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원로원은 법무관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 탈나에게 군단을 맡겨 그리스로 파견했다.
이후 로마로 귀환한 그는 기원전 147년과 기원전 142년에 프린켑스 세나투스가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지만, 기원전 141년에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공석이 되어 그의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가 선출된 것으로 보아 그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딸인 아이밀리아 파울라의 딸이며 자신의 사촌인 코르넬리아와 결혼했다. 그는 코르넬리아와의 사이에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를 낳았다. 이 인물은 기원전 138년 집정관을 역임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올랐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격렬한 대립을 벌인 끝에 그를 살해한 후 로마를 떠나 페르가몬에서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