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라틴어: Quintus Publilius Phil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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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조부)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아버지) 티투스 푸블릴리우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39년 |
전임 |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동기 | 티베리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
후임 |
루키우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가이우스 마이니우스 |
임기 | 기원전 327년 |
전임 |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프로클루스 또는 가이우스 플라우티우스 데키아누스 또는 플라우티우스 베녹스 또는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스카풀라 또는 바르바투스)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
후임 |
가이우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비술루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
임기 | 기원전 320년 |
전임 |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 |
동기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
후임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 |
임기 | 기원전 315년 |
전임 |
스푸리우스 나우티우스 루틸루스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
동기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
후임 |
마르쿠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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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독재관, 감찰관.2. 생애
플레브스였다가 기원전 4세기부터 정계에 진출하면서 노빌레스로 거듭난 푸블릴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352년, 고리대금업자들이 과도한 이자를 매겨서 빚에 허덕이는 시민들이 고통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자,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는 큰 재산을 갖춘 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하게 했다. 그는 이들 5인 중 한 사람이었다. 위원회는 "채무자의 빈곤이 아닌 과실로 인해 연체된 채무를 재무부에서 상환하고, 채무자의 재산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통해 채무 문제를 가급적 조정하고자 했다.그는 파트리키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씨족, 데키우스 씨족과 동맹을 맺고 막강한 재산을 활용해 성공 가도를 꾸준히 쌓았다. 그 결과 기원전 339년 전임 집정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의 지원에 힘입어 티베리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당시 라틴 연맹과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페넥틴 평원에서 라틴인들을 무찌르고 항복을 받아낸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당시 피드나 시를 포위했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마메르키누스는 동료의 성공을 전해듣고 군대를 남겨두고 로마로 상경한 뒤 자신 역시 개선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원로원이 피드나 시를 아직 점령하지 못했다는 점을 근거삼아 거부하자, 마메르키누스는 민회에 원로원이 최근 라틴족을 상대로 정복한 영토 중 가장 황량한 토지만 평민에게 할당했다고 고발했고, 민중은 이에 분노해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원로원은 마메르키누스를 선동 혐의로 체포한 뒤 독재관을 지명하라고 강요했다. 결국 마메르키누스는 동료 집정관이며 평민의 지지를 받는 필로를 독재관으로 지명했다고 한다. 필로는 폭동을 진압한 뒤 몇 가지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르면, 민회의 결의는 법적인 효력을 가지며, 법안들은 켄투리아회에서 찬반 투표를 하기 전에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감찰관 중 적어도 한 명은 평민이어야 했다.
기원전 337년, 필로는 평민 최초로 법무관에 출마했다. 당시 집정관이며 법무관 선거를 주관했던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는 법무관은 오직 파트리키만이 맡을 수 있다며 필로의 선거 출마를 무효로 처리하려 했지만, 평민들의 반발이 워낙 극심해 결국 출마를 허용해야 했다. 이후 필로가 당선되면서, 평민 출신이 법무관을 맡는 게 허용되었다. 기원전 335년 선거를 주관하기 위해 선출된 독재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프리베르나 휘하 기병장관이 되었으며, 기원전 332년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어 라틴 전쟁 이후 로마에 편입된 시민들을 묶어서 메키아 족과 스카프티 족의 두 개 부족을 추가했다.
기원전 32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캄파니아 지방의 네아폴리스에서 친 삼니움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삼니움에게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삼니움 병사 4,000명과 놀라 출신 병사 2,000명이 도시에 진주했다. 이 소식에 놀란 로마는 삼니움족이 지난 제1차 삼니움 전쟁 이후 캄파니아에 병력을 일절 보내지 않겠다고 했던 협약을 위반했다며 항의했지만, 삼니움인들은 기원전 334년 로마가 리리스 강 건너편에 있는 프라겔라스에 식민도시를 건설해 리리스 강 너머의 삼니움 영토에 침범하지 않겠다는 협약을 먼저 위반하지 않았느냐며 무시했다. 이에 로마는 전쟁을 선포하고, 필로에게 2개 군단을 줘서 네아폴리스를 공략하도록 했다.
필로는 네아폴리스와 또다른 그리스 도시인 필레오폴리스 사이의 지점에 진군시켜서 둘 사이의 연락로를 차단했다. 이후 네아폴리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피해만 누적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었음에도 포위 공격이 이어지자, 원로원은 그가 전직 집정관으로서 작전을 계속 수행하게 했다. 이 일은 로마 역사상 처음이었다고 한다. 필로는 공성전이 잘 되지 않자 고심 끝에 도시 내 친로마파와 연락해 내부에서 호응하도록 유도했다. 어느 날 밤 도시 내부의 친로마파가 성문 하나를 열자, 로마군은 즉시 도시 내로 진입했다. 삼니움과 놀라 병사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채 도주했고, 네아폴리스는 로마의 수중에 넘어갔다.( 네아폴리스 공방전) 이후 로마와 삼니움은 제2차 삼니움 전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필로는 네아폴리스 공략에 성공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320년,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와 함께 3번째로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로마군은 카우디움 협곡 전투에서 삼니움족에게 패배한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 리비우스는 필로와 쿠르소르가 수치를 갚아주기 위해 전쟁을 개시해 루케리아를 포위해 함락시키고 7,000명의 포로를 확보한 후 카우디움 협곡 전투 때 인질이 되어버린 로마 장교 및 재무관들과 교환시켰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다른 사료에서는 로마군이 카우디움에서 맺어진 협약을 존중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밝혔고, 에드워드 토고 살몬은 로마군이 기원전 316년에 적대 행위가 재개될 때까지 카우디눔 평화 협약을 존중했으며 기원전 321년과 기원전 316년 사이의 로마와 삼니움의 전쟁은 리비우스가 순전히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카우디움 협곡 전투 이후 몇년 간 로마군의 행적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필로가 공적을 세웠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기원전 315년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와 함께 4번째로 집정관에 선임되었지만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는 않았다. 기원전 314년 가이우스 멘니우스가 정부 전복 음모 사건에 대한 잘못된 조사를 실시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이때 필로 역시 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300년 평민 최초로 아우구르에 선출된 티투스 푸블릴리우스는 그의 아들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