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드루발 바르카 𐤏𐤆𐤓𐤁𐤏𐤋 Hasdrubal Barca[1] | Azrubaʿal Βάρκα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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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8aa><colcolor=#000> 출생 | 기원전 245년 |
고대 카르타고[2] | |
사망 | 기원전 207년 6월 22일 (38세) |
이탈리아 메타우루스 강변 평원(현재 이탈리아 마르케주 메타우로 강) | |
국적 | 카르타고 |
가족 |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 한니발 바르카 (형) 마고 바르카 (동생) 매형 잘생긴 하스드루발, 보밀카르 조카 한노 |
지위 | 카르타고 히스파니아 사령관 |
참전 전쟁 |
제2차 포에니 전쟁 - 에브로 강 해전 - 데르토사의 전투 - 베티스 고지의 전투 - 바이쿨라 전투 - 메타우루스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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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카르트 하다쉬트(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의 동생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이탈리아로 원정간 형을 대신하여 히스파니아 속주를 맡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형제와 대적했다.6년여간 악전고투한 끝에 스키피오 형제를 전사시키고 로마군을 대파했으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등장으로 히스파니아 속주의 수도 카르타고 노바를 공략당한 뒤 연이은 전투에서 패배하자, 형과 가담하기로 마음먹고 5만 원정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했다. 그러나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전군이 궤멸되었고,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
2. 생애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시칠리아 전선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연이어 승리했던 명장 하밀카르 바르카의 차남이다. 형으로 한니발 바르카가 있었고, 동생으로 마고 바르카가 있었다. 또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자 형제가 있었는데, '잘생긴 하스드루발'과 결혼하여 한노를 낳았다. 그의 유년기 및 장군이 되기 전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전무하다. 한니발이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정복 사업을 벌인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건 확실하지만, 그가 언제 합류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하밀카르가 이베리아 부족과 전쟁 도중 전사한 시기인 기원전 228년 이전에 넘어와서 군사 경력을 어느 정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아버지 하밀카르가 죽은 뒤 매형인 '잘생긴 하스드루발'이 뒤를 이었다. 그는 로마와 협상하여 에브로 강 이북에는 영토를 확장하지 않고, 로마는 에브로 강 이남의 영토를 카르타고의 관할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후 로마가 에브로 강 이남의 주요 도시인 사군툼과 동맹을 맺었을 때, 그는 로마와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인정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원로원은 에브로 강을 경계로 양국의 관할을 정한 건 인정했지만 사군툼과 로마의 동맹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후 잘생긴 하스드루발은 기원전 221년 켈트족 노예과 사소한 문제로 다투다 암살당했고, 형 한니발이 직위를 세습했다. 한니발은 동생 하스드루발과 마고를 부대 사령관으로 삼고, 이베리아 부족들을 제압하여 카르타고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로마와 동맹을 맺은 사군툼을 공략했다. 로마가 이에 분노하여 선전포고하자, 그는 막내 마고와 함께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원정을 떠나기 전에 하스드루발에게 11,850명의 원주민 보병대, 1,800명의 리비아 보병, 21마리의 코끼리, 300명의 리구리아 경보병, 500명의 발레아리 투석병, 2,500명의 누미디아 기병 및 21마리의 코끼리, 32척의 함대를 포함한 히스파니아 주둔 병력 지휘권을 맡겼다고 한다. 여기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면서 한노 휘하의 1만 보병, 1천 기병대를 히스파니아에서 갈리아로 넘어가는 길목에 배치했다. 이후 하스드루발은 이베리아 전역에 높은 망루를 세워 적의 접근을 경고하는 신호 체계가 포함된 방어 시설을 구축하게 하였다.
기원전 218년 가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가 2만여 장병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로 진군했다. 하스드루발은 한노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8,000 장병을 이끌고 구원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한노는 2:1로 밀리는 상황인데도 로마군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벌이다 키사 전투에서 완패하고 에브로 강 남쪽으로 도피했다. 그는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뒤 경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기습부대로 로마 함대가 정착한 곳을 습격해 선원들을 무차별 살육하고 전투선을 35척으로 줄였다. 하지만 마실리아에서 파견된 동맹군 함대가 도착하면서, 로마군은 이러한 손실을 상쇄할 수 있었다. 그는 엘레게츠족의 반란을 유도해 로마군을 묶어놓으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로마군은 엠포리아이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히스파니아와 한니발 군대 사이의 육로 통신망을 차단했다.
기원전 217년, 하스드루발은 병력을 규합한 뒤 에브로 강에서 영향력을 굳히고 있는 로마군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에브로 강 해전에서 마실리아 함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하스드루발은 눈앞에서 40척의 함선 중 25척이 포획당하는 꼴을 지켜보다가 퇴각했다. 또한 로마 함대는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 공격하여 그 주변 일대를 약탈하였고, 뒤이어 동생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합류하면서 전력이 늘어났다. 이에 기세를 탄 로마군은 에브로 강을 건너 사군툼을 기습 점령하였고, 그곳에 카르타고인들이 가둔 중요한 인질 몇 명을 석방해 각 부족에 돌려보냄으로써, 그들이 로마를 지지하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기원전 216년 일부 부족이 카르타고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고, 하스드루발은 이 반란을 처리하느라 로마인들에게서 관심을 돌려야 했다.
기원전 216년 8월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로마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자, 카르타고 원로원은 기세등등해졌다. 그들은 한니발에게 추가 병력을 보내 전쟁을 끝내기로 결의하고, 하스드루발에게 즉시 한니발과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자기가 떠나면 히스파니아를 지킬 사람이 없다며 자신을 대체할 사령관과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원로원은 하스드루발 기스코 장군에게 병력을 맡겨 파견하기로 했으니, 그에게 지휘권을 양도하고 이탈리아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하스드루발은 원로원의 명령을 받아들여 북쪽으로 이동했다.
이 소식을 들은 스피키오 형제는 한니발 혼자만으로도 로마가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마저 합세하면 끝장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어떻게든 하스드루발을 막기로 하고, 적의 진군로를 차단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은 형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 때 썼던 방식대로 아군 보병대가 적 군단병의 공세를 버티는 사이 양익의 기병대가 적 기병대를 격파하고 측면과 후방을 요격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러나 로마 기병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사력을 다해 항전했고,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기를 싫어하던 이베리아 보병들이 전투를 소극적으로 임하다가 곧 패주하면서 결국 실패했다. 하스드루발은 소수의 전사와 함께 전장을 탈출했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25,000명의 카르타고군이 전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수치는 과장되었다고 본다.
결국 한니발과 합세하려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스피키오 형제의 공세는 갈수록 심화되었다. 기원전 215년, 남동생 마고가 하스드루발을 도우러 왔다. 이리하여 3개의 카르타고 군대가 히스파니아에서 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베티스 상류에 있는 일리투르기스 시를 포위했지만, 로마군의 역습으로 패퇴했다. 뒤이어 인디빌리스 전투에서 재차 맞붙었지만 또다시 패배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 13,000명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손실이 과장되었다고 보지만,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한 건 분명하다고 본다.
기원전 214년, 하스드루발과 마고는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이베리아 부족들을 물리쳤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아크레 레브카에 도착하여 그들을 견제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베리아 부족들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후 카르타고군은 두 번의 접전에서 로마군에 상당한 손실을 입히고 일리투르기스 시에 몰아넣고 포위했다. 동생을 구하러 달려온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언덕 위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도중에 합세한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찰이 벌어지면서 통합된 지휘를 하지 못했고, 세 장수는 각기 다른 진영을 세우면서 개별적으로 지휘하게 되었다. 그나이우스는 이 틈을 타 일리투르기스에 특공대를 보내 동생과 연락을 취했다. 다음날 스키피오 형제는 카르타고군을 협공하였고, 카르타고군은 대패했다. 이후 하스두르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문다 전투와 아브링가 전투에서도 연이어 패배했다.
하지만 본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로마군이 공세를 멈추면서, 세 장수들은 히스파니아의 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기원전 213년,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를 배신하고 로마 편에 붙은 누미디아 왕 시팍스를 응징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마시니사의 협조하에 시팍스를 상대로 승리한 뒤, 마시니사가 이끄는 3천 명의 누미디아 기병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로 귀환했다. 한편, 스키피오 형제는 그동안 확보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2만 명의 켈티베리아인을 용병으로 새로 고용했다.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2만여 로마군을 이끌고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치기로 했고,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는 1만여 로마군에 2만의 켈티베리아인 용병을 합한 3만여 명으로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치기로 했다.
둘 중 먼저 목적지에 도착한 그나이우스는 그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하스드루발은 그나이우스의 주력이 로마인이 아닌 켈티베리아인들인 것을 파악하였고, 용병의 습성을 이용하여 이들을 매수할 계획을 세웠다. 이윽고 로마인 몰래 열린 켈티베리아 족장과의 회담에서 하스드루발은 그들이 철수하는 대가로 상당한 양의 보수를 주기로 약속했다. 켈티베리아인들은 다음날 로마군이 보는 앞에서 군기를 내리고 철수했다. 그나이우스는 2배나 많은 용병대를 무력으로 저지할 수 없었기에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지만, 켈티베리아인들은 고향에서 전쟁이 나서 집에 간다고 둘러대며 그대로 캠프를 떠나버렸다. 이로 인해 그나이우스는 한순간에 전력이 급락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한편, 하스드루발은 이베리아 족장 인디빌리스의 7,500명 이베리아군을 푸블리우스의 로마군 쪽으로 파견했다. 당시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의 유격전에 시달리던 푸블리우스는 그들이 합류하면 끝장이라고 여기고, 그 전에 급습하기로 했다. 2천의 병력을 티베리우스 폰티우스에게 맡겨 진영 수비를 담당하게 한 뒤 전 병력을 이끌고 인디발리스를 추격했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행군한 로마군은 인디빌리스의 군대를 따라잡고 공세를 개시했다. 그런데 전투 도중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이 들이닥쳐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였고, 로마군은 이로 인해 큰 혼란에 빠졌다. 여기에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각각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하면서, 로마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푸블리우스는 어떻게든 활로를 뚫고자 사활을 걸고 싸우다가 한 기병이 내지른 창에 찔러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그가 죽자 로마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고, 적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살육을 자행했다.
그 후 마고, 하스드루발 기스코, 마시니사는 재빨리 그와 합세하여 그나이우스를 공격했다. 그나이우스는 한밤중에 몰래 캠프를 버리고 철수했지만, 아침에 하스드루발이 급히 파견한 누미디아 기병이 이들을 추격하여 낮에 따라잡았다. 로마군은 누미디아 기병대의 훼방으로 인해 진군 속도가 느려지자 일로르카 언덕 위에 숙영하기로 했다. 그날 밤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이끄는 카르타고 총 병력이 집결해 언덕을 에워쌌고, 다음날 아침 총공격을 감행해 로마군을 섬멸했다. 그리하여 스키피오 형제는 목숨을 잃었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로마군 8천명은 에브로 강 북쪽에 집결했다. 그러나 카르타고군은 통합된 지휘체계의 부재와 지휘관들간의 불화로 인해 로마군을 완전 섬멸하기 위한 통합된 공세를 가하지 못했고, 그 사이에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이끄는 1만 병력이 도착하여 패잔병들과 합세했다.
이후 하스드루발은 네로의 공세로 일루투르기스와 멘티사 사이에 있는 흑석 근처의 협곡에 갇혔다. 그는 협곡을 벗어나게 해준다면 카르타고군을 히스파니아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했고, 네로는 협상에 응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온갖 사소한 일로 협상을 질질 끌다가 야밤을 틈타 부하들을 이끌고 작은 길을 통해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날이 밝아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네로는 하스드루발을 추격했으나, 그때는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이에 원로원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새 지휘관으로 삼아 히스파니아로 보내 네로를 대신하게 했다.
기원전 209년, 스키피오는 3명의 카르타고 사령관들을 일일이 격파하기 위한 공세를 벌이는 척하다가, 적이 방심한 틈을 타 전군을 함선에 태운 뒤 해상을 통해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속주 수도인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반나절만에 함락시켰다.( 카르타고 노바 공방전) 당시 중부 이베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부족들을 토벌하고 있던 그는 적의 전광석화같은 공세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여기에 스키피오의 관용 정책에 감화된 이베리아 부족들이 대거 로마군에 붙으면서 세력이 안달루시아로 축소되자, 하스드루발은 스키피오가 안달루시아를 침공할 수 있는 과달키바르 상류 계곡의 카스툴로를 점령했다. 그러나 208년 초 바이쿨라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배했다. 그래도 전열을 유지한 채 철수한 덕분에 주력군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후 동생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만나 앞으로 어찌할 지 논의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자신이 3만 장병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과 합세할 테니, 두 사람은 히스파니아에 남아서 스키피오와 전투를 지속하라고 권했고, 두 사람 모두 동의했다.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이 점거한 피레네 산맥의 동쪽 고개를 피해 서쪽 고개를 건너 크게 우회하여 알프스로 진격했다. 당시 켈트족은 카르타고가 자신들이 아닌 로마와 싸우러 간다는 걸 이해했고, 한니발의 전설적인 활약이 잘 알려져 있기도 했기에, 하스드루발을 방해하긴 커녕 그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길 희망했다. 하스드루발은 알프스에 도착한 뒤 형과 달리 겨울에 산맥을 넘지 않고 휴식을 취하면서, 켈트족 용병대를 대거 고용하였다. 그 결과 3만이었던 그의 군대는 5만 명으로 늘어났다.
기원전 207년 초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진입한 그는 아드리아 해 연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한니발에게 전령을 보내 움브리아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한니발을 저지하고 있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정찰병들이 전령을 사로잡았다. 네로는 페니키아어로 쓰여진 편지를 번역하여 하스드루발이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움브리아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병력이 5만에 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네로는 즉시 원로원에 이 편지를 보내면서, 하스드루발을 막기로 예정된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의 3만 병력으로는 하스드루발을 당해내지 못할 수도 있으니, 자신이 군대 일부를 북상시켜서 리비우스와 합세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원로원의 승인 통보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촉박하다고 보고, 정예 보병 6,000명과 기병 1,000명을 이끌고 곧장 북상했다. 물론 한니발이 이를 알아채면 곤란하므로, 부관에게 자신이 지원군을 이끌고 가는것을 다른 병사들과 적장 한니발이 절대 알아채지 못하게 하도록 비밀을 최대한 엄수하며, 전면전을 무조건 피히라고 지시했다. 또한 사전에 지나갈 모든 경로에 식량과 물자를 준비하도록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네로 휘하 장병들이 진군할 때 주민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축복하면서, 모든 신과 여신에게 승리를 기원했다고 한다.
네로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리비우스의 군대는 이미 메타우루스 강에서 하스드루발과 대치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야밤에 적이 눈치 못채는 사이에 동료 집정관과 합세했다. 이후 군사회의에서, 몇몇 장교들은 군단병들이 며칠간 장기 행군을 하느라 지쳤으니 휴식을 취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네로는 한니발이 상황을 알아채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끝내야 한다며, 다음날 전투를 벌이자고 주장했고, 리비우스는 그의 의견을 따랐다.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적이 전투 대형을 펼친 광경을 살펴보다가, 많은 군단병이 이전에는 없던 낡은 방패를 들고 있고, 일부 기병은 마치 긴 행군을 마친 것처럼 지쳐 있는 걸 보고 적군이 멀리서 합류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군대를 진영으로 돌려보낸 뒤 정찰병을 통해 추가 정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로마군 사이에서 전투 뿔피리의 신호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보내지는 걸 알아챘다. 이는 두 집정관이 한 진영에 있다는 걸 의미했다.
하스드루발은 일단 퇴각하기로 했지만, 로마군은 메타우루스 강을 따라 후퇴하는 적을 따라잡고 기병대로 후위대를 교란시키면서 전투를 강요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전투를 벌이기로 하고,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당시 로마군의 좌측에는 메타우루스 강이, 우측에는 험한 언덕이 위치했다. 리비우스는 좌측을 맡았고, 우측은 네로가 맡았다. 전투가 개시된 후, 네로는 높은 언덕을 잘 활용하여 갈리아 용병들을 막아냈다. 그러다가 아군 좌익과 중앙이 적의 강한 압박으로 고전하는 걸 발견하고, 여러 코호트를 이끌고 전장을 우회한 뒤, 적군의 측면과 후방을 습격했다. 이 절묘한 공격으로 승부는 결정되었다. 대다수 카르타고군은 섬멸되었고, 하스드루발도 죽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군대가 몰살당하는 광경을 보고 충직한 부하들보다 오래 사느니 지금 죽겠다며 적진으로 뛰어들어가 장렬히 전사했다고 한다. 한니발의 동생다운 부끄럽지 않은 최후였다고 평가했다.
전투가 끝난 뒤, 네로는 그의 시신을 찾아내어 수급을 베었다. 이후 6일 만에 자기 진영으로 돌아간 뒤 부하를 시켜 하스드루발의 잘린 머리를 카르타고 초소 앞에 던지게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동생의 수급을 알아보고 "카르타고의 잔혹한 운명이여!"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 후 한니발은 루카니아로 돌아갔고, 그해 내내 숙영지에서 나오지 않았다. 한편 로마 대중은 대승을 거둔 것에 몹시 기뻐했고, 원로원은 3일간의 감사 행사를 드리기로 결의했다.
3. 기타
소설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역사학도가 빙의하면서 로마군에 죽을 미래를 피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끝에 로마를 붕괴시키고, 연방국으로 변화한 21세기 카르타고에서 신으로 모셔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