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브리 전쟁 영어: Cimbrian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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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113년 ~ 기원전 101년 | |
장소 | 이베리아, 이탈리아, 갈리아 | |
원인 | 유틀란트 반도의 대기근으로 인한 게르만족의 대이동 | |
교전 세력 | 로마 공화정 |
파일:cimbri_mon_256.png
킴브리 테우토네스 암브로네스 티구리니 |
지휘관 |
가이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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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오릭스† 파일:cimbri_mon_256.png 루기우스† 파일:cimbri_mon_256.png 클라오디쿠스 ◎ 파일:cimbri_mon_256.png 카이소릭스 ◎ 디비코 토이토보트† |
병력 | 40,000명 ~ 150,000명 | 300,000명 ~ 500,000명 |
피해 | 111,000명 ~ 150,000명 전사 | 전멸 |
결과 |
로마 공화정의 승리. 대이동을 벌인 게르만족의 소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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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킴브리 전쟁은 기원전 113년부터 기원전 101년까지 기근을 피해 정주할 곳을 찾아 남하하던 게르만족들인 킴브리족, 테우토네스족(테우토니족), 암브로니족과[1] 로마 공화국이 충돌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기록이 로마 측에만 남아 있기 때문에 흔히 로마 vs 게르만족 구도로 설명되지만 게르만족 입장에서 로마와의 전투는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갈리아인, 이베리아인들과도 많은 전투를 치렀다.[2]
고향인 유틀란트 반도에 몰아닥친 엄청난 기근으로 살 곳을 찾아 떠난 킴브리족, 테우토니족 등의 게르만족들은 로마군에 비해 엄청나게 빈약한 무기와 무장에도 불구하고[3] 대규모 로마군을 수차례 전멸시키는 용맹성을 보였다. 특히 로마군 12개 군단과 보조군이 전멸하고, 80,000명이 전사한 로마 역사상 최악의 참패인 아라우시오 전투가 이때 발생했다.
게르만족은 로마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으나 그들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정착할 곳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불필요한 전쟁은 하지 않았고, 로마군과 맞부딪히더라도 로마군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결코 먼저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4]
그러나 게르만 부족들은 20년에 걸친 장기간의 이동 과정에서 계속되는 로마군, 갈리아인, 이베리아 선주민들과의 전투로 전력이 지속적으로 소진되었고, 결국 기원전 102년~101년에 걸쳐 마리우스 휘하의 로마군에게 차례로 섬멸되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도 자결하여 이들 게르만 부족들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2. 게르만족 이동의 시작
기원전 120년경 유틀란트 반도의 북부에 거주하고 있었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튜튼족)이 따뜻한 남쪽 나라를 향해 기나긴 대장정을 개시했다. 도중에 유틀란트 반도 남쪽에 거주하던 암브로니족과 티구리니족도 이 대행렬에 동참했다. 이들이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향한 것은 기후 변화로 유틀란트 반도에 심각한 기근이 들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게르만족 대연합은 게르마니아를 가로질러 남하하여 알프스 산맥 동쪽 끝자락을 지나 도나우 강을 따라 기원전 113년경 크로아티아의 오시예크 인근까지 남하했다가 마침내 로마 공화국과 조우하게 되었다.
3. 전개
3.1. 초기 로마군의 패배
기원전 113년 로마는 게르만족에게 정착할 곳을 주겠다고 속여 그들을 노레이아로 유인하고, 기습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집정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이끄는 로마군은 오히려 게르만족에게 참패해 10,000명이 전사하고, 24,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노레이아 전투). 카르보는 로마로 귀환한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5]의 고발을 받고 재판에 회부된 후, 유죄 판결을 받아 유배될 위기에 몰리자 독약을 삼키고 자살했다.[6]하지만 게르만족은 알프스 산맥 북쪽을 따라 계속 서진했고, 중간에 스위스 북쪽에 거주하던 헬베티족과 동맹을 맺었다. 로마는 비로소 게르만족의 위력을 실감했고, 이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와 약탈을 하기 전에 이탈리아 밖으로 원정군을 보내기로 했다.
기원전 109년,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에서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과 맞섰으나 패배했고, 기원전 107년에는 집정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부르디갈라 전투에서 티구리니족에게 패배해 전사했다.
3.2. 아라우시오 전투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로마군이 거듭 전멸하자 로마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이미 노레이아와 부르디갈라에서 집정관이 두 명이나 전사했고, 게르만족들이 포로로 잡은 로마군을 모조리 죽여 제물로 바친다는 소문이[7] 로마에 퍼지자 공포심은 극대화되었다.마침내 로마는 게르만족을 섬멸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기로 하고, 무려 12개 군단 및 그 보조군을 동원한 대규모 병력을 갈리아 남부의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로 파견했다.
기원전 105년 10월 6일, 론 강 인근에 위치한 아라우시오(현 프랑스의 오랑주)에서 집정관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와 전직 집정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론 강을 사이에 두고 게르만족과 대치했다. 이때 집정관 막시무스는 퀸투스에게 자신의 진영에 합류하라고 요청했지만 퀸투스는 신참자(novus homo) 가문 출신인 막시무스보다 파트리키(patrícĭi) 가문 출신인 자신의 권위가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막시무스의 지휘를 받는 것을 굴욕이라고 판단하여 따로 진영을 구축했다. 퀸투스의 진영이 새로 구축된 것을 본 게르만족은 로마군의 규모가 2배로 늘어났으므로 싸우는 것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고, 그 때문에 막시무스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이 사실을 들은 퀸투스는 강화가 체결되면 막시무스가 모든 군사적인 성취를 가지게 될 것이라 생각했고, 막시무스와 게르만족 사이의 강화를 훼방놓기로 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었던 40,000명의 군단병을 이끌고 단독으로 킴브리족의 진영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게르만족이 숫적으로 앞서 있었고, 또한 충동적으로 공격한 퀸투스의 전술에 약점이 많았기 때문에 로마군은 몰살당하고 퀸투스는 달아났다.
이로 인해 사기가 크게 고양된 게르만족은 강을 건너 막시무스의 진영으로 쳐들어왔다. 막시무스의 병사들은 퀸투스군이 몰살당하는 광경을 목격했으므로 겁에 잔뜩 질린 상태였고, 때문에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게르만족은 여기서도 대승을 거두었는데 로마군은 극소수만 살아남았을 뿐이었고, 기원전 108년도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가 포로가 되어 킴브리족의 왕 보이오릭스에게 처형당했다.
이 아라우시오 전투의 여파는 킴브리 전쟁에서 게르만족이 파멸한 이후에도 한동안 로마인들의 심리에 강하게 남아있었는데,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당시 로마군 병사들은 게르만족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이 아라우시오 전투 같이 게르만족들이 로마군을 격파한 사실들을 떠올리며 자기들끼리 게르만족의 장대한 체격과 강인한 힘과 험상궂은 외모를 거론하며 공포에 떨었고, 그래서 카이사르가 병사들을 달래느라 크게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
3.3. 로마의 군제 개혁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로마군이 전멸하자 로마 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국가적 위기 상황속에 유구르타 전쟁을 마무리하고 집정관에 선출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대대적인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로마의 사회 체계는 군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8]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로마의 사회와 정치 시스템의 근간까지 뒤엎는 것이었다. 군제 개혁으로 로마군은 사실상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되었다. 그때까지 로마군은 시민들이 개인 재산으로 무장했지만, 이제는 국가에서 모든 무장을 지급하기로 하고,[9] 무산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모병을 실시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로마군은 시민군이 아니라 직업군인화되었고 마리우스는 그들에게 혹독하게 군사 훈련을 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게르만족에게 첩자를 보내 면밀히 그들의 동태를 주시했다.3.4. 게르만족의 계속되는 유랑
아라우시오 전투의 대승 이후 킴브리족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향했고,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은 갈리아 북쪽으로 이주를 계속했다. 그러나 워낙 대규모 집단의 이동이라 정착할 만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살 만한 곳에는 이미 먼저 정착한 갈리아인들이 있었다. 게르만족들은 갈리아인들과 거듭된 전투를 치러야 했고 전력은 조금씩 약화되고 있었다.킴브리족은 이베리아 반도의 북쪽을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사실 이베리아 반도는 매우 건조하여 해안 지역을 제외하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없었다. 킴브리족은 수년간 이베리아 반도를 헤집고 돌아다녔지만 정착할 만한 땅을 찾지 못했고, 그나마 살만한 땅에서는 이미 정착해 있던 켈티베리아인들의 저항을 받았다. 결국 킴브리족은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로 북상했다. 먼저 갈리아를 북상했던 테우토네스족 역시 정착지를 찾지 못했다. 결국 갈리아에서 다시 합류한 게르만족은 갈리아 북쪽 끝까지 가보았음에도 정착할 곳이 없자 다시 남하하게 된다.
그리고 알프스 산맥을 앞두고, 킴브리족은 지금의 인스브루크쪽에서 접근하여, 트렌티노알토아디제의 비피테노(Vipiteno) 지역의 아디제 강(Adege river) 인근 협곡을 지나 이탈리아 반도로 진입하기로 했으며,[10] 테우토네스 부족과 암브로네스 부족은 트란살피나 지역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로 진입하기로 했다.
게르만족이 도착하자 그 협곡을 지키고 있었던 집정관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로마군은 밀려서 도망치고 말았다.
3.5.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
기원전 103년, 게르만족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로마는 게르만족이 다시 남하하기 시작하자 100,000명의 대군을 동원했다. 마리우스는 게르만족들이 남하하다가 둘로 갈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부르며 이들을 각개격파하기로 결정했다.마리우스는 우선 트란살피나로 향하고 있는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부터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은 계속된 유랑과 전투로 전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으나, 과거 로마군을 수차례 전멸시켰기 때문에 로마군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스파이를 통해 게르만족의 전술과 습성을 면밀히 파악한 상태였다. 마리우스는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을 섬멸하기 위해 로마군이 미리 매복해 있는 장소인 아쿠아이 섹스티아이로 그들을 유인했다.
기원전 102년, 게르만족이 아쿠아이 섹스티아이에 도달하자 마침내 로마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로마군은 방패를 제외하고 무장이 없는 게르만족의 약점을 이용하여 집중적인 필룸 공격을 가했고, 이에 큰 피해를 입은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은 마침내 섬멸되고 말았다.
3.6. 베르켈라이 전투
기원전 101년,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이 전멸한 것을 모르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던 킴브리족은 북이탈리아에 도착했다.포 강 유역의 비옥한 평원에 도착한 킴브리족은 마침내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곧 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도착하자 킴브리족은 사신을 보내 자신들은 정착하길 원할 뿐이며, 로마와 동맹을 맺을 용의도 있다고 말했다. 마리우스는 이전 집정관들과 마찬가지로 킴브리족의 제의를 거절하고, 베르켈라이에서 결전을 가지자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그리하여 기원전 101년 7월 30일에 벌어진 베르켈라이 전투에서 로마군과 킴브리족의 결전이 벌어졌다. 킴브리족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형편없는 무장과 무기에도 불구하고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11] 이미 게르만족을 면밀히 분석한 로마군의 집중 투창 공격과 압박 전술에 의해 킴브리족은 마침내 전멸하고 말았다.
전세가 기울자 후방에 있던 킴브리족의 여자들은 자식을 죽인 후 자결했다. 살아남은 어린이들은 검투사 노예로 팔려갔다. 이로써 12년 동안 서유럽을 종횡무진하던 게르만족의 대이주는 북이탈리아에서 소멸되는 결말을 맞이했다.
4.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왜곡
《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아라우시오 전투를 비롯하여 로마군이 킴브리 전쟁 당시 게르만족에게 패배한 전투의 이름과 내용들을 모조리 생략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뒤에 가서 언급하기는 했는데, "로마군이 싸울 때마다 족족 패배했다."라고 아주 간략하게 줄여서 말했기 때문에, 도대체 로마군이 얼마나 어떻게 패배하고 그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 전혀 가늠할 수가 없다. 그에 비해서 로마 장군 마리우스가 킴브리 전쟁에서 게르만족들을 격파한 이야기는 아주 상세하고 자세하게 다 써 넣어서 다분히 편파적인 서술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그래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을 다룬 《로마인 이야기》 4권을 보면, 저렇게 로마군 병사들이 게르만족에 대해 벌벌 떠는 모습이 나오는데 바로 그 앞의 3권에서 다뤄야 할 아라우시오 전투를 비롯한 로마군이 게르만족에게 패배한 전투들을 시오노 나나미가 3권에서 모두 빼버리는 바람에 도대체 왜 저렇게 무서워하는지에 대해 전혀 이해가 가지 않게 되었다.
[1]
켈트족, 티구리니족도 있었다.
[2]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초기에는 다른 게르만족들과도 싸움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3]
다만 로마 작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1권에 의하면, 킴브리족들은 마치 맹수가 입을 벌리는 듯한 모양의 투구와 갑옷을 입었다고 하니, 게르만족들이 전혀 무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4]
하지만 받아주는 입장에서는 어찌 되었건 주인이 있는 땅에 정착하겠답시고 들어오니 침략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당장 정착하고 싶을 뿐이라는 말을 쉽사리 믿기도 어렵고, 이미 정착해 살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선 자기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수십만 명이나 되는 거대한 집단을 아무 문제없이 무턱대고 받아주기도 힘든 일이다. 당장
유럽 난민 사태 같은 문제가 왜 일어나는지 생각해보자. 여기에 생전 처음 보는 무시무시한 야만족이라는 인식이 더더욱 소통을 어렵게 만든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면 늘 충돌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였다.
[5]
탁월한 웅변술을 갖췄기에 오라토르(Orator, 연설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었으며,
옥타비아누스의 라이벌이기도 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조부였다.
[6]
참고로 이 시기 로마 시민에게 유배란 사형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사실상 시민으로써 사형 선고였다. 유배형을 받은 죄인은 로마 공화국의 출입이 금해졌고 자산은 압류되었다. 말이 유배지 영구 추방이었다. 저 유명한 키케로도 자신의 정적 클로디우스에게 이 형벌을 받았을 때 친구 아티쿠스의 설득이 없었다면 자살했을 것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매우 가혹했다.
[7]
이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승리한 게르만족들은 포로로 잡힌 로마군 병사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는데, 이는 게르만족들이 숭배했던 전쟁의 신인
오딘(
보탄, 워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오딘은
북유럽 신화에서
인신공양을 즐겨 받는 잔인한 신이었다. 이런 식으로 포로를 죽여서 신(
오딘)에게 바치는 인신공양은 게르만계 민족인 바이킹들도 먼 훗날 9세기 무렵,
서프랑크(프랑스)를 침략하여 붙잡은 포로들을 모두 나무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똑같이 반복되었다.
[8]
로마 공화정 정치의 근간인
켄투리아회가 바로 로마군 편제 그 자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9]
다만 국가에서 무장을 제공해 주는 것은 이전 포에니 전쟁 시기부터 도입되었다. 스키피오가 이베리아 전선에서 원주민 기술자들을 모아놓고 로마군을 위해 양질의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고 기원전 4세기를 기점으로 장기간 전쟁 시 시민들에게 침구, 무기, 갑옷 등을 먼저 지급하고 봉급에서 공제하는 형태가 도입되어 있었다.
[10]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 군대가 알프스 산맥의 서쪽 지대를 겨울에 넘으면서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은 바 있었는데, 킴브리족은 한니발보다 훨씬 교통망이 발단된 편한 길로 넘어왔다.
[11]
이때 킴브리족 전사 즉 남자들은
서로 허리띠를 묶어서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이러면 도저히 물러서거나 도망칠 수 없게 되니, 진짜로 죽음을 각오하고 로마군에 맞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