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이 전투 / 칸나에 전투 이탈리아어: Battaglia di Canne 그리스어: Μάχη των Καννών 영어: Battle of Cann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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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018년 | |
장소 | 남부 이탈리아 아풀리아 주 칸나이 평원 | |
원인 | 노르만족 용병대를 끌여들어 동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랑고바르드족의 봉기와 동로마군의 반격 | |
교전국 |
랑고바르드족 노르만 |
동로마 제국 |
지휘관 |
멜루스 과이마르 3세 길베르트 부아테레† 라눌프 드렝고 |
바실리오스 보이오안네스 |
병력 | 250명의 노르만 용병대가 참여했다는 것 외에 알려지지 않음 | 알려지지 않음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승리. | |
영향 | 동로마 제국의 남부 이탈리아 패권 유지. 노르만족의 남이탈리아 진출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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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18년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랑고바르드계 귀족들과 그들에게 고용된 노르만족 용병대가 동로마군과 맞붙은 전투. 동로마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남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유지했다.2. 상세
885년 ~ 895년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남부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여 바리, 타란토, 산타 세베리나, 레기온, 타오르미나, 트로파이 등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대부분을 공략하고 베네벤토 공국과 살레르노 공국을 복속시킨 이래, 남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계 귀족들은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역대 황제들은 불가리아 제1제국,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등 외세와 잇따른 전쟁을 치르는 데 들어가야 할 국방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탈리아 속주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고, 귀족들은 매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에게 상당량의 공물을 바쳐야 했다. 랑고바르드 귀족과 현지 민중은 자연히 이러한 처지에 불만을 품고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모색했다.1009년, 바리의 랑고바르드계 귀족 멜루스는 처남 다투스와 함께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바리를 공략한 뒤 여세를 몰아 아스콜리와 트로이아를 석권했다. 그러나 1010년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메사르도니테스가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하면서 1011년 6월 11일 바리를 상실하고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은거했다. 그는 역시 동로마 제국에 반감을 품고 있던 살레르노 공작 과이마르 3세와 교황 베네딕토 8세의 지원에 힘입어 가릴리아노 요새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재기할 기회를 엿봤다.
그러던 1016년, 길베르트 부아테레와 라눌프 드렝고 등 노르만 무리가 몬테 가르가노의 성 미카엘 성당에 순례했다. 멜루스는 이들에게 접근해 자신을 도와준다면 풍부한 전리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이에 따르기로 하고, 1017년 카푸아에서 멜루스 휘하의 랑고바르드군과 연합하여 아풀리아로 진격했다. 랑고바르드-노르만 연합군은 이탈리아 총독 콘톨레온 토르니키오스가 파견한 동로마군을 상대로 5번 연속 승리한 뒤 1018년 9월까지 바리를 제외한 아풀리아 전역을 석권했다. 이제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에서 쫓겨나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했다.
그러던 1018년 10월, 새로운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보이오안네스가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로부터 바랑인 친위대를 비롯한 정예병을 제공받은 뒤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그는 오판토 강가로 진군한 뒤 기원전 216년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뒀던 칸나이 평원에서 랑고바르드-노르만 연합군과 맞붙었다. 이번 전투의 결과는 로마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멜루스는 아내와 아들 아르이로스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병력, 세력 기반을 모조리 빼앗기고 독일로 망명했다. 그는 밤베르크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와 만나 동로마 제국에 대응할 방안을 모색했으나, 1020년 4월 23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멜루스의 아들인 아르이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간 뒤 그곳에서 고급 교육을 받는 등 좋은 대접을 받았고, 1038년 아풀리아로 귀환한 뒤 동로마군이 시칠리아 섬을 침공했을 때 함께 했다. 1038년 아풀리아로 귀환한 뒤 마니아케스의 시칠리아 원정에 참여했으며, 1042년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기를 들어 남이탈리아의 상당수 영토를 점거했다가 1046년 콘스탄티노스 9세와 협상한 끝에 자신의 영향력을 인정받는 대가로 제국에 정식으로 귀순했다. 이후 1051년 이탈리아 총독을 맡아 1058년까지 바리에서 통치를 이어갔다.
한편 250명으로 구성된 노르만인들은 지휘관인 길베르트 부아텔레를 비롯한 대부분이 죽고 라눌프 드렝고를 비롯한 10명의 노르만 기사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바실리오스 보이안네스는 전투가 끝난 뒤 노르만족의 용맹에 깊은 감명을 받고, 살아남은 노르만인들에게 높은 급료를 주고 북쪽의 신성 로마 제국과 남쪽의 시칠리아 토후국의 침략으로부터 변경 요새를 사수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 후 라눌프 드렝고는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 귀족들, 교황령,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에 잇따라 고용되어 전장에서 용맹을 떨쳤고, 1030년 나폴리 공작 세르기우스로부터 아베르사(Aversa)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으면서 남이탈리아에 정착했다. 노르망디 공국에서 부모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지 못해 곤궁하게 살아가던 노르만 전사들은 라눌프의 성공담을 전해듣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남이탈리아로 대거 이동했다. 이리하여 훗날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제패한 시칠리아 왕국을 건국하게 될 노르만인들이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