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 전투 영어: Battle of Antioch on the Meander |
||
시기 | 1211년 6월 17일 | |
장소 | 아나톨리아 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1] | |
원인 |
알렉시오스 3세를 니케아 황제위에 앉혀서 니케아 제국을 복속하려는 룸 술탄국의 공세와 테오도로스 1세의 대응. |
|
교전국 | 니케아 제국 | 룸 술탄국 |
지휘관 | 테오도로스 1세 |
케이휘스레브 1세 알렉시오스 3세 |
병력 | 2,000 기병(라틴 기사 800명) | 5,000~11,000명 |
피해 | 대부분의 라틴 기사 전사. |
케이휘스레브 1세를 비롯한 수많은 장병 전사, 알렉시오스 3세 생포. |
결과 | 니케아 제국의 승리. | |
영향 | 라틴 제국의 일시적인 비티니아 공략, 테오도로스 1세의 위상 증진. |
[clearfix]
1. 개요
1211년 6월 17일, 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에서 테오도로스 1세가 이끄는 니케아 제국군과 알렉시오스 3세를 니케아 황위에 세워서 조종하려는 케이휘스레브 1세의 룸 술탄국 군대가 맞붙은 전투. 룸 술탄국은 이 전투에서 참패한 뒤 다시는 니케아 제국에 큰 위협을 가하지 못했고, 니케아 제국 역시 큰 손실을 입은 여파로 라틴 제국에 일시적으로 밀렸지만, 승리에 고무된 로마인들의 호응에 힘입어 아나톨리아 서부의 강자로 우뚝 서서 장차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이끌어낼 발판을 마련했다.
2. 배경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함락당하고 동로마 제국이 일시적으로 무너진 후, 전임 황제였던 알렉시오스 3세는 십자군의 추격을 피하며 테살로니키, 테살리아와 테르모필레를 거쳐 코린토스까지 이동하면서 세력을 재건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해 8월 십자군에 체포되어 테살로니카 왕국에 끌려갔다가 재차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뒤 이탈리아의 몬페라토에 유배되었다. 그러던 1209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인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이피로스로 탈출한 후 아나톨리아로 건너갔다.한편,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 테오도로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후 니케아로 피신한 뒤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비티니아와 미시아 일대를 병합한 후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지대에 거주하는 현지 로마인들을 빠르게 포섭했고 알렉시오스 1세가 이끄는 트라페준타 제국이 흑해안을 따라 비티니아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했다. 그러나 1204년 말 라틴 제국의 보두앵 1세가 아나톨리아에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으나 전력차가 극심해 패배를 면치 못하고 니케아가 함락될 위기에 몰렸다. 그러다가 1205년 3월 칼로얀이 이끄는 불가리아 제2제국군이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군을 괴멸시키고 보두앵 1세를 생포했다가 곧 죽여버리면서 라틴 제국의 기세가 꺾였다.
테오도로스 1세는 이 때를 틈타 아나톨리아 서부의 이오니아 지역을 통합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붕괴된 행정 제도를 재건하고 조세 체계 및 정치 시스템을 기억에 의존하여 단시일에 복구했다. 이후 불가리아 제2제국과 손을 잡아 라틴 제국을 견제하게 한 뒤 니케아에 정교회 총대주교를 세우고 프리지아를 공략했다. 이렇듯 세력을 한창 구축하고 있던 1209년, 알렉시오스 3세가 니케아로 찾아와 테오도로스 1세에게 황위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자신은 지난날 황제로서 제국을 이끌었으며 그의 장인이기도 하니 마땅히 황제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애써 고생하여 구축한 세력을 알렉시오스 3세에게 고스란히 넘기고 싶지 않았던 테오도로스는 단칼에 거절했다.[2]
이에 알렉시오스 3세는 룸 술탄국으로 찾아가서 술탄 케이휘스레브 1세에게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했다. 사실 케이휘스레브 1세는 니케아 제국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지켜보며 장차 그들이 룸 술탄국이 빼앗은 옛 영토를 되찾으려 들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는 이참에 알렉시오스 3세를 니케아 황제로 세운 후 꼭두각시로 삼아서 니케아 제국을 복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사절을 니케아로 보내 테오도로스에게 퇴위를 권고했다. 예상대로 테오도로스가 거절하자, 케이휘스레브 1세는 5,000~11,000명의 병력을 모아 1211년 봄 알렉시오스 3세와 함께 니케아 제국을 침공했다.
3. 전개
룸 술탄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한 테오도로스 1세는 2,000명의 기병을 소집했다. 이중 800명은 니케아 제국의 핵심 전력이었던 라틴 용병대였다. 그는 신속하게 움직여서 리디아의 필라델피아로 이동하여 하룻밤을 보낸 뒤, 적군에게 포위된 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 외곽으로 이동했다. 테오도로스 1세가 이렇게 빨리 대응할 줄은 몰랐던 케이휘스레브 1세는 급히 병력을 집결시키고 적이 공격하기를 기다렸다.당대 그리스 역사가 요르요스 아크로폴리티스에 따르면, 전투가 벌어진 계곡은 대규모 기병이 활동을 벌이기에는 너무 좁아서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니케아군이 약간의 이점을 얻었다고 한다. 전투는 800명의 라틴 용병대가 적진으로 뛰어들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적의 중앙 대열을 돌파했지만 곧 수적으로 우세한 적병에게 포위되었지만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아클로폴리티스에 따르면 거의 모든 라틴군이 전사했지만, 그 과정에서 튀르크인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그렇게 라틴 용병대를 섬멸한 뒤, 케이휘스레브 1세는 직접 니케아 군의 진영으로 돌격해 니케아 군을 크게 물리쳤다. 룸 술탄국의 승리가 눈앞으로 다가왔지만 그 과정에서 제물에 눈이 먼 룸 술탄국 병사들이 흩어진 적병을 쫓을 생각은 않고 약탈에 정신팔렸고, 케이휘스레브 1세는 이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 사이 전열을 재정비한 테오도로스 1세는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고, 이번에는 룸 술탄국 군이 속절없이 밀려났다. 이때 테오도로스 1세가 술탄을 발견하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크로폴리티스에 따르면, 술탄이 곤봉을 휘둘러 테오도로스 1세의 투구를 가격해 말에서 떨어지게 했지만, 테오도로스 1세는 벌떡 일어나서 칼집에서 칼을 뽑은 뒤 술탄이 타고 있던 암말을 찔렀다. 그 여파로 술탄이 낙마하여 혼절해버리자, 테오도로스가 그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다. 니키포로스 그리고리오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등 다른 역사가들도 황제 본인이 술탄의 머리를 자르고 창에 꽂아서 모두에게 보였다고 기술했다. 이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은 튀르크인들은 패주했고, 테오도로스는 힘든 전투를 치러서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안티오키아 시내로 들어갔다. 한편, 튀르크 진영에 남겨졌던 알렉시오스 3세는 체포된 후 실명형을 받고 테오도로스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4. 이후
전투가 끝난 직후, 케이휘스레브 1세의 장남 케이카부스 1세와 테오도로스 1세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룸 술탄국은 이후로 니케아 제국에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니케아 제국은 라틴 제국의 황제 앙리가 1211년 말 소아시아로 건너와서 공세를 펼칠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테오도로스 1세는 린다코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비티니아와 미시아 일부를 앙리에게 양도하기로 했다.하지만 앙리는 병력이 부족한 데다 불가리아 제국의 압박이 상당했기 때문에 새 점령지에 수비대를 충분히 배치하지 않았고, 테오도로스는 앙리가 돌아간 뒤 안티오키아 전투에 깊은 감명을 받은 현지 그리스인들의 호응에 힘입어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고 세력을 키웠다. 1221년 말 테오도로스가 사망했을 때, 니케아 제국은 8천의 정예병을 보유한 지역강국이 되었다. 뒤이어 니케아 황제가 된 사위 요안니스 3세는 장인이 물려준 기반을 발판삼아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이룩하기 위한 여정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