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14 02:35:03

악소나 전투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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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57년 5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과 갈바가 이끄는 벨가이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이다.

2. 상세

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하이두이 족장 디비키아쿠스 켈트인 유력자들의 호소를 받아들여 갈리아에 침투한 게르만족 계통의 수에비족의 지도자 아리오비스투스를 상대로 보주 전투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수에비족이 참패하여 라인 강 건너편 게르마니아로 도피했고, 카이사르는 세콰니족의 영역에서 군대를 숙영시켜 겨울을 보내게 한 뒤,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돌아가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로마군이 갈리아에 그대로 남아있자, 많은 켈트인이 의혹을 품었다. 그들은 로마가 갈리아를 정복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을 거라 짐작하고, 갈리아 북동부에서 강성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벨가이들의 힘을 빌려 로마군을 축출하기로 했다.

벨가이인은 갈리아에서 가장 용감한 부족으로 알려진 종족이었다. 그들은 기원전 100년대에 갈리아, 로마, 히스파니아를 혼란에 빠뜨린 킴브리 전쟁을 일으킨 게르만계 킴브리족과 튜턴족의 침략을 격퇴하기도 했다. 로마가 헬베티족과 수에비족을 물리치고 갈리아 중부의 패권을 확보하자, 그들은 이에 위협을 느꼈다. 여기에 로마의 치하에 들어가기 싫었던 다른 갈리아 부족들이 부추기자, 로마군을 몰아내고 갈리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 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벨로바키족, 수에시오네스족, 네르비족, 모린족, 아투아투키족, 아트레바테스족, 암비엔스족, 칼레테스족, 벨리오카세스족, 비로만두엔스족, 메나피엔스족 등 여러 벨가이계 종족이 연합군을 결성했는데, 카이사르에 따르면 그 규모가 28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연합군 지도자로는 수에시오네스족의 족장이었던 갈바가 선임되었다.

카이사르는 벨가이 연합군의 동태를 첩자들을 통해 확인한 뒤, 기원전 57년 초 2개 군단을 추가로 편성해 8개 군단을 갖추고 북상했다. 15일간의 행군 끝에 벨가이 종족 중 하나인 레미족의 영역에 들어서자, 카이사르가 이렇게 빨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레미족은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전쟁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로마군을 대적하는 건 불가능하고 여기고, 카이사르에게 복종을 서약하면서 자신들은 처음부터 연합군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연합군에 가담한 벨가이계 종족들의 구성과 위치, 병력수 등 모든 정보를 밝혔다. 카이사르는 벨가이 연합군 중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종족이 벨로바키족임을 알게 되자 하이두이족에 사절을 보내 벨로바키족의 영지를 유린하라고 권했다. 그 후 레미족과 다른 벨가이 부족 사이의 경계인 악소나 강에 숙영지를 건설하고, 다리에 퀸투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가 지휘하는 6개 코호트(대대)를 배치했다.

로마군이 출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벨가이 연합군은 그들을 무찌르기 위해 그쪽으로 진군했다. 로마군이 악소나 강 건너편에 포진하고 있는 걸 확인한 뒤, 섣불리 공격하면 큰 손실을 보리라는 걸 깨닫고 인근의 레미족 성채인 오피둠을 공격했다. 그들은 카이사르가 막 복속한 레미족을 돕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방어 태세를 풀고 달려올 거라 여겼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벨가이군의 의도를 눈치채고 방어 태세를 풀지 않았다. 그 대신, 누미디아인, 발레아레스 제도의 투석병, 궁수들로 구성된 부대를 오피둠으로 파견해 레미족의 농성을 돕도록 했다. 이로 인해 오피둠 공략이 어렵게 되었고, 로마군이 방어 태세를 풀 기미가 보이지 않자, 벨가이군은 오피둠의 외곽 지대를 황폐화시킨 뒤 로마군 진영으로 접근해 약 1km 떨어진 평원에 거대한 진영을 구축했다.

카이사르는 최근에 모집한 2개 군단을 진영에 남겨두고 6개 군단을 진영 앞에 배치했다. 그는 병력이 열세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언덕을 배후에 두고 포진한 뒤 양측면에 참호를 팠다. 벨가이군 역시 전투 대형을 갖추고 대치했다. 양군 사이에는 큰 늪이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건너기를 바랐기에 어느 쪽도 쉽사리 건너지 않았다. 대신 소규모 기병전이 벌어졌는데, 카이사르가 특별히 고용한 게르만족 기병대가 상당히 활약했다. 카이사르는 이에 만족하여 군대를 진영으로 철수시켰고, 벨가이군 역시 돌아갔다. 그 후 로마군의 약점을 살펴보던 갈바는 악소나 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을 찾아냈다. 그는 즉시 일부 병력을 그쪽으로 파견해 퀸투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가 이끄는 6개 코호트를 물리치고 다리를 점거하려고 했다. 만약 이것이 성공하지 못하면, 로마군을 지원하는 레미족의 농경지를 황폐화시켜서 로마군을 굶주리게 만들려고 했다.

사비누스로부터 벨가이군이 여울을 건너고 있다는 급보를 받은 카이사르는 모든 기병과 가볍게 무장한 누미디아인, 투석병과 궁수 부대를 파견했다. 그들은 다리를 신속하게 건넌 뒤 여울을 건너고 있었던 벨가이군을 향해 원거리 무기를 일제 사격했다. 벨가이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악소나 강을 건넜지만, 게르만족 기병대의 일제 돌격에 직면하자 패주했다. 투석병과 궁수 부대는 도망치는 벨가이군을 향해 화살과 돌을 퍼부어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벨가이 연합군은 이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졌고, 식량도 거의 떨어진 데다가 하이두이족이 벨로바키족의 영지에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일단 군대를 해산시키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벨가이인들은 밤 12시에 철수를 개시했다. 그러나 모든 부족원들이 동시에 철수했기에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적진에서 엄청난 소동이 일어난 걸 목격한 카이사르는 한동안 지켜보다가 동틀 무렵 기병을 보내 배후를 급습하게 한 뒤 곧이어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을 파견했다. 기병이 후방을 강타하자, 후방의 벨가이인들은 뒤돌아 서서 응전했지만, 전방의 벨가이인들은 공포에 휩싸여 달아났다. 후방 부대 역시 뒤따라 달아났고, 기병대와 합세한 라비에누스는 이들을 추격해 상당수를 살해했다. 카이사르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주변 부족의 영토를 침공해 근방에 있었던 수에시오네스족의 항복을 받아내고, 연합군의 지도자였던 갈바로부터 두 아들을 인질로 받아냈다.

이후 벨가이 연합군에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벨로바키족의 영토로 진군하자, 전쟁을 주도했던 벨로바키족의 정치인들은 브리타니아 섬으로 망명했고, 벨로바키족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이후에도 여러 부족이 카이사르에게 굴복했지만, 전투민족인 네르비족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네르비족의 영토로 진군해 사비스 전투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