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아르이로스 (Argyrus) |
출생 | 1000년경 |
사망 | 1068년 |
직위 | 바리의 귀족, 이탈리아의 총독 |
반란 대상 | 콘스탄티노스 9세 |
[clearfix]
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반란자의 아들이자 본인도 반란자로 시작했지만, 콘스탄티노스 9세에게 회유되어 제국에 귀순하여 그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제국에 복무하던, 입체적인 캐릭터의 인물이다. 역사적 중요성이나 지명도는 한참 차이가 나지만, 550년 전쯤의 테오도리크 대왕과 유사한 점이 보인다.2. 생애
롬바르드인이자 바리의 귀족이었던 멜루스의 아들이다. 멜루스는 노르만 용병대를 포섭해 1009년 반란을 일으켜 남이탈리아를 거진반 장악했으나, 1018년 칸나이 전투에서 동로마군에게 완패했다. 이로 인해 어머니와 함께 포로로 잡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고급 교육을 받는 등 좋은 대접을 받았고, 1038년 아풀리아로 귀환한 뒤 동로마군이 시칠리아 섬을 침공했을 때 함께 했다. 1040년 1월 9일 이탈리아 속주 총독 니키포로스 돌키아노가 아스콜리에서 군중에게 피살당하고 치안 담당관 미하일 키로스팩티가 모톨라 성 인근에서 살해되었다. 군중은 그를 바리 성으로 데리고 가서 지도자로 선출해,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는 동로마 제국에 맞서게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리더인 무사안도스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나머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1040년 롬바르르족 출신의 아두인, 멜피의 토포테리파, 그리고 노르만 용병들은 세금을 가혹하게 뜯어내는 동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기로 했다. 그들은 베네벤토 공자 아테눌프를 지도자로 선출하였고, 1041년 9월 3일 이탈리아 속주 총독 엑사고스토스 보이오안네스를 사로잡고 베네벤토에 수감했다. 그런데 1042년 2월, 아테눌프는 동로마 제국이 엑사고스토스의 몸값으로 지불한 돈을 가지고 그리스로 도망쳐 버렸다. 이에 노르만 용병대는 그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다. 그해 4월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타란토에 상륙한 뒤 바리로 진군하자, 그는 노르만 용병 7천 명을 파견하였다. 마니아케스는 노르만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타란토로 후퇴했다. 그해 7월, 그는 노르만군과 함께 지오베나초를 포위하여 사흘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했다. 노르만군은 그곳에 있던 그리스인들을 대거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를 보다 못한 그가 간청하자, 노르만군은 포로로 잡았던 주민들을 풀어줬다.
그 후 4년간 남이탈리아에서 세력을 굳히던 그는 콘스탄티노스 9세와 협상한 끝에 1046년 자신의 영향력을 인정받는 대가로 제국에 정식으로 귀순했다. 제국은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해 "이탈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파플라고니아의 공작" 칭호를 내리는 등 융숭한 대접을 하는 한편, 새로운 총독을 보내 남이탈리아를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노르만 용병대는 번번이 총독을 살해하는 등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1051년, 제국은 그를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3월에 바리에 도착한 뒤 제국에 반항을 일삼았던 바리의 귀족 로무알드와 피에트로 형제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했다. 그 후 1058년까지 총독으로 재임하였고, 신임 총독 아불하레와 협력하여 로베르 기스카르의 노르만군에 맞서 싸우다 1068년경 바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상당량의 비단옷을 파르파 수도원에 기부했다. 그가 죽고 3년 뒤 최후의 거점 바리가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힘락되면서,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를 영원히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