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6 12:27:20

루시우스 퀴에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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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이름 루시우스 퀴에투스
(Lusius Quietus)
출생 미상
로마 제국 마우레타니아 속주
사망 118년
직위 베르베르 왕자, 로마 원로원 의원, 야전 사령관, 유다이아 총독(117년)
출신 왕가 베르베르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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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야전 사령관, 유다이아 총독이자 베르베르 왕자. 트라야누스 시대 동안 다키아 전쟁,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키토스 전쟁에 참전했다.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극찬을 받은, 트라야누스 황제 휘하의 핵심 야전 사령관으로 고대 로마 공화국, 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베르베르 출신 정치인, 군인으로도 유명하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사망한 뒤, 살해 또는 처형됐는데 후임 황제이자 트라야누스의 오촌조카, 양자인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으로 추정된다.

2. 생애

3대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 때 로마 제국에게 강제 합병 후 두 개로 쪼개진 옛 마우레타니아 왕국 출신이다.

아프리카 왕자, 아프리카 출신이라는 이유로 오늘날 일부는 그가 흑인, 흑백혼혈이라고 주장하며 로마 시대 흑인 노예소년의 두상을 이 사람의 초상으로 소개 중이다. 허나, 현대 서양, 미국 학자 중 대다수는 루시우스 퀴에투스 흑인 주장에 관해, 퀴에투스는 베르베르 출신의 베르베르계 백인이라고 일관되게 그 주장을 무시한다. 실제 발견된 유적, 비문, 당대와 후대 기록에 따르면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백인이며 고향은 오늘날의 모로코 북부인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속주. 아버지는 베르베르의 왕자이자 베르베르 고위 귀족이다. 당장 트라야누스 원주에 트라야누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부조된 퀴에투스의 얼굴 역시 베르베르계 백인임이 명확히 확인된다.

어릴 적 이야기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 모르나, 부친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진다. 기록된 이야기에 따르면 루시우스의 아버지와 그를 따른 베르베르 부대 전사들은 칼리굴라 황제의 마우레타니아 왕국 강제 병합 조치 당시인 서기 40년 아이데몬의 반(反) 로마 운동 진압에 참전. 로마군의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완전 점령에 보조군으로 로마를 지원했다고 한다.

루시우스 퀴에투스 아버지의 로마 지원, 로마군 복무는 옛 마우레타니아 왕국 중 험하고 악명 높기로 이름난 마우레타니아 지방 서부 일대였기 때문에, 당시 황제인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인정받아 그와 그 일가 모두 로마 시민권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따라서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자연스레 베르베르 왕자, 베르베르 귀족 지위를 보장받은 로마 시민으로 태어나, 이 지위와 계급을 로마군 경력에 인정받고 로마군 기병대 보조군 장교부터 자신의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즉, 일반 사병이 아닌 좁은띠 혹은 넓은 띠를 두룬 대대장부터 자신의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트라야누스와 비슷한 나이였던 무렵부터 일찍 군 복무를 하면서, 로마군 기병대 보조군 장교로 여러 공을 쌓았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루시우스 퀴에투스의 뛰어난 군 복무 활동을 인정해, 그에게 기사계급 지위를 내렸다. 그렇지만 이후 그는 불복종을 이유로 강제 전역당해 로마군 장교 자리에서 퇴출됐다. 그러다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되고 플라비우스 왕조가 무너지는데, 얼마 안 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수립되고 트라야누스 네르바 황제의 양자가 되면서 다시 군대에 복귀하게 된다.

퀴에투스는 트라야누스 즉위 전후, 군에 복귀.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전쟁에 황제 휘하의 보조군 기병대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이 모습은 트라야누스 원주에 실려 있는데, 퀴에투스와 그 부하들은 다키아 부대를 쫓는 베르베르 기병대로 묘사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퀴에투스는 다키아 전쟁을 성공리에 완료하며 트라야누스 황제의 눈에 띠게 된다.

이런 공은 곧바로 퀴에투스의 원로원 입성, 로마군 야전사령관 경력으로 이어졌다. 그는 원로원 의원을 넘어 귀족 반열에 올랐고, 곧이어 개전된 파르티아 전쟁에 트라야누스 황제의 군사 대리인 자격이라는 타이틀 아래 로마군 주요 야전 사령관 자리를 꿰찼다. 이는 로마 제국 안에서 외국의 왕자, 국왕, 고위 귀족이라고 한들 '신참자'[1]로 분류됨을 생각하면, 트라야누스 황제가 루시우스 퀴에투스를 각별히 아꼈던 것을 뜻한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파르티아 원정 기간인 115년, 116년 내내 퀴에투스를 신뢰했다. 황제는 여러 야전 사령관 중 루시우스 퀴에투스를 최고 사령관인 황제를 보좌하고, 그 명령을 대리한 황제의 부관에 지명하고 그를 곁에 뒀다.

그리고 퀴에투스는 이 신뢰를 보답하듯, 니시비스, 에데사 등 파르티아 주요 도시를 공격, 약탈하고 바빌로니아인의 봉기를 모조리 진압했다. 이어 그는 로마군의 승리 가능성이 없는 전투를 지휘해, 병력의 전략적 후퇴를 통해 아군을 전멸로부터 구한 공으로 큰 찬사를 받았다. 따라서 황제와 로마군 지휘관 모두는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그의 군대 경력과 미래를 모두 보장했다.

따라서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116년 군사 원정 작전 수행 직후,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117년 유다이아 총독 자리를 받게 됐다. 이는 곧 그에게 로마군의 병참 기지 운용 및 후방 안정 책임 지위를 내렸다는 것을 뜻했다.

그가 유다이아 총독에 취임한 그 해, 키레네, 키프로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유대인 이주민들이 반(反) 로마 봉기를 일으켰다. 이는 후일 이를 진압한 루시우스 퀴에투스의 이름에서 따온 키토스 전쟁으로 알려지는데, 이 사건은 로마-유대 모두에게 엄청난 유혈사태, 학살로 유명해지게 된다. 이 당시, 유대인 반 로마 봉기 세력은 로마시민 학살, 로마군 수비대 공격, 도시 파괴 및 점령 등을 벌이며 반 로마 봉기의 불씨를 제국 동방 전체로 확대시켰다. 당시 트라야누스의 로마군은 파르티아의 대대적인 반격 속에서 위기에 빠졌고, 제국 서북쪽의 끝인 브리타니아 북부에서도 칼레도니아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로마 제국의 미래는 암울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리다 점령을 시작으로 유대인 반 로마세력을 조직적 군사 전략 아래 모조리 진압했다. 그는 이 시기, 트라야누스 황제의 명령 아래 메소포타미아로 파견돼 이 일대에서 유대인들이 일으킨 반란도 진압했다. 이후 그는 유다이아 주둔 로마군을 이끌고 뤼다에 집결한 율리아누스, 파푸스의 유대군을 포위 공격. 결사 항전한 유대인의 저항을 모조리 이겨내고, 식량이 바닥나 굶주림에 시달린 유대인들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이때 로마는 주동자 율리아누스, 파푸스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을 집단 처형했다. 이후 퀴에투스는 키프로스로 소규모 로마군을 보내 잔여 반란 세력까지 모조리 진압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황제의 대리인인 유다이아 총독의 이름으로 유대인들의 키프로스 입성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했고, 알렉산드리아, 키레네 탈환 후 조치 중 하나로 유대인들의 모든 재산을 신전 재건 비용을 명목으로 몰수하고 유대인 자녀들의 교육을 그리스인 방식으로 강제했다.

2년여의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 뒤,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유다이이에 남았다. 이는 남은 반란의 불씨를 진압하고자 한 후임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조치에 따른 결정으로 추정된다.

헌데 118년,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근위대장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에게 살해 또는 처형됐다. 그 외에 3명의 전직 집정관도 함께 살해되어 이 사건을 네 명의 집정관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에 관해, 탈무드에서도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한 로마 장군이 야훼의 천벌을 받아 갑작스레 처형됐다고 언급한다. 이는 트라야누스가 죽으면서 그 황후 폼페이아 플로티나에게 택군되어 즉위한 신임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군의 지지를 받는 퀴에투스의 명성, 퀴에투스가 트라야누스와 매우 친한 사이이고 황제의 복심과 같았기에 새로운 황제와 그 정부에게 위험이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거한 것이 정설이다.
[1] Novus homo( 노부스 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