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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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Fall[1](Conquest) of Constantinop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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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오스만 전쟁의 끝[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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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453년
4월 11일 ~
6월 7일 (율리우스력 1453년 4월 2일 ~ 5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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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콘스탄티노폴리스 | |
원인 |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자 하는 메흐메트 2세의 야망 | |
교전국 | 방어군 | 공격군 |
동로마 제국 교황령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시칠리아 왕국 |
오스만 제국 (오스만 술탄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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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콘스탄티노스 11세
† 루카스 노타라스 X 테오필로스 팔레올로고스 †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가브리엘 트레비사노 오르한 첼레비 X |
메흐메트 2세 자아노스 파샤 쉴레이만 발타오울루 찬다를르 할릴 파샤 함자 베이 |
병력 |
총원: 7,000 ~ 10,000명 오스만 탈영병: 600명 전선 26척 |
총원: 50,000 ~ 300,000명[3] 예니체리: 5,000 ~ 10,000명 함선 106척 |
피해 |
사상자: 4,000명 포로: 30,000명 |
사상자 다수 (추정) |
결과 |
오스만 술탄국의 승리 로마 제국의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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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
교황권의 실추[4] 근세의 시작[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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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스로를 베네치아 사람이라고 부르는 자들아, 무엇보다도 기독교도로서의 의무를 다 하자. 전투가 시작되면 무슨 일이 생겨도 정해진 자리를 이탈하지마라. 위치를 벗어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라. 공화국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베네치아 공화국 바일로 지롤라모 미노토
베네치아 공화국 바일로 지롤라모 미노토
1453년에 벌어진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술탄국[7][8] 사이의 전투로, 동로마의 천년 고도이자 정교회의 심장이었으며 기독교의 5대 총대주교좌 도시 중 로마와 더불어 이슬람의 정복을 면한 유이한 곳이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슬람교도 튀르크인의 영토로 넘어간 사건이다. 그리고 기원전부터 이어져 온 로마 제국에 대해 종지부를 찍는 전투라고 할 수 있다.
학계에서 생각하는 ( 유럽) 중세의 종말을 상징하는 유력한 사건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1453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다.[9] 이 전투에서는 중세의 종언을 고할 만한 무기인 공성포가 사용되었고, 중세를 상징하는 성벽의 의미도 무너졌기 때문. 이 전투로 소아시아 및 남유럽과 서유럽 및 중부유럽[10]의 문화적, 정신적 연결 고리가 끊기고, 유럽 문명의 시조라고 할 만한 로마 제국의 최후가 이슬람의 손에 넘어갔다. 이 일로 그리스 - 로마에 대한 고전학자들과 그들의 연구결과들이 서유럽으로 넘어가게 되고, 르네상스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과 함께 발칸 반도가 이슬람 국가들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11]
이렇게 말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세계를 바꾼 전투처럼 보이는데, 그런 것은 아니다. 동로마 제국 자체는 1204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 이미 한 번 멸망했고,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과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동로마 제국을 계승한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우여곡절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하고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켰으나, 이피로스는 일찌감치 1330년대에 동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했고(그나마 그 영토는 1340년대 스테판 두샨의 세르비아 제국에게 다시 빼앗겨 버렸다.) 오스만에 의해 동로마 제국(옛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모두 크게 영토를 뜯기고 만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벌어진 1453년 즈음에 이미 발칸 반도 대부분은 오스만 술탄국의 손에 들어가 있었으나, 썩어도 준치라고 재건된 동로마 제국 및 후계국들은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이후 2백 년간이나 생존했다. 그럼에도 2206년간 이어진 로마가 멸망한 사건인 만큼 이전 시대의 종언을 선고하기에는 충분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이 전투를 중세의 마지막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은 학계에서 부르는 명칭이 아니라 나무위키에서 부르는 명칭임을 유의하자.[12] 다른 곳에서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라고 언급한다면 그것은 나무위키를 참고하고 서술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마지막 공성전. 15세기 프랑스 세밀화 |
2. 배경
2.1. 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 이스탄불 지도 위에 표시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파란색 선 안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테오도시우스 성벽 안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오늘날 이스탄불의 파티흐(Fatih) 구이다. 검은색 선 안은 금각만(골든 혼)이다.[출처] |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전부터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로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아주 중요한 통로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보스포루스 해협(노란색 구역)은 폭이 1 km 가량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가장 좁은 폭은 750 m밖에 되지 않는다. 때문에 사람과 물자를 손쉽게 옮길 수 있었다. 지중해를 통한 해운으로 물건을 수송하는 상인들로써는 최대의 경쟁자이면서, 넘을 수 없는 장벽이나 다름없었다. 도시는 아시아와의 교역에서 막대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동방의 비단들은 이 통로를 통해 들어왔다.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해협을 강 건너듯 건너가면 되니, 군대를 옮기기도 쉬웠고, 흑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유일한 지점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쥐고 있다면 흑해를 장악할 수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적 중요성 역시 상당했는데, 당시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 그 자체였으며, 로마 황제는 이후 유럽에서 다시 없을 대제국의 주인이었다. 중동부터 스페인까지 로마 황제 직함이 먹히지 않는 곳은 없었고, 유럽의 다른 모든 왕들보다 더 높은 직위였다. 따라서 당시의 군주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입맛 다시게 하는 도시였다. 또한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도아케르는 서로마 황제를 폐위시킨 뒤 그 자리를 계승하지 않고, 제위와 명목상의 황제로서의 권한을 모두 동로마 황제에게 넘겼다. 그러면서 서한에다가 "로마 제국 황제 폐하께"라고 버젓이 써붙였었다. 이 당시 로마 제국의 선임 황제는 동로마 제국 황제 제노였으니 가능했던 사항이었다.[14]
이렇게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세워진 이후부터 계속 침략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배후지인 트라키아는 평지 특성이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입구라고 할수 있는 하드리아노폴리스를 지나고 나면 배후지의 특성상 콘스탄티노폴리스 코앞까지는 쉽게 다다를 수 있었다.[15] 그러나 본격적인 문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코 앞에 당도한 뒤부터였는데, 위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적이 접근할 수 있는 서쪽 통로에는 험준한 산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쪽은 악명높은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파란색 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좁다 한들,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건너편에는 한 겹뿐이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장 단단한 성벽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로마군이 이전에 시라쿠사를 점령할 때 한 뻘짓을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남쪽(빨간색 선 안의 구역: 마르마라 해)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나오는 강한 해류의 영향을 받았고, 변변찮은 항구 시설도 없어, 거대한 도시를 점령할 만한 군대를 배치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북쪽의 금각만(검은색 선 안의 구역)이 가장 만만했는데, 방어군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어서, 그곳에는 항상 엄청난 수의 함선이 상주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였다.
2.1.1. 테오도시우스 성벽: 재래식 성곽의 황제
[16]
기존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밖으로 도시가 팽창하자 테오도시우스 2세는 새로 성벽을 쌓았고, 이는 도시의 제1 방어선이 됐다.[17] 총 6㎞ 길이의 성곽은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각 구역마다 특징이 있었다.
성벽의 가장 안쪽에 내벽(inner wall, mega teichos, "great wall"), 그 바깥에 조금 낮은 외벽(outer wall, mikron teichos, "small wall")이 있었으며, 이 외벽과 해자 사이에는 parateichion라고 불리는 흉벽(胸壁)[18]이 자리했다. 각 벽 사이에는 페리볼로스라는 병력이 기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성벽 사이는 방어용 탑의 샛문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내벽의 높이는 무려 12m에 달했으며 두께는 4.5~6m 정도였다. 벽의 안쪽은 모르타르로 채워졌고 잦은 지진에 대한 보강도 이뤄졌다. 총 96개의 탑들이 20~70m마다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탑들은 높이가 15~20m, 폭이 10 m가량이었다. 막벽으로 외벽과 내벽이 50m 간격으로 엇갈려 있었다. 탑의 최상부 - 즉 옥상에는 전투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탑 내부는 2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탑의 아래층은 도시 쪽으로 열려 있었고 창고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위층에서는 바깥쪽으로 난 창문으로 적에게 사격도 가능했으나, 이후 보수 과정에서 창문과 총안이 사라져 최상부만이 유일한 전투 공간이 되었다.
두께 2m가량의 외벽은 내벽보다 조금 낮은 8~9m 높이었으며, 페리볼로스 쪽으로 아치형 출입구가 있어 도시 쪽에서 정문으로 들어가거나 안쪽 방어탑에 있는 샛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높이 12~14m, 폭 4m의 외벽 방어탑이 내벽의 탑과 탑 사이에 배치되어 있었다. 내벽은 최후의 저항, 흉벽은 일차 저지라는 의미가 있던 만큼 본격적인 방어는 외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외벽은 가공할 만한 방어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외벽은 활용 가능한 공간(페리볼로스)의 양도 적지 않았고, 성벽의 다른 부분과 크게 연계되어 있었던 만큼 성곽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해자는 외벽에서 20m 떨어진 곳에 20m의 폭으로 파여있었다. 10m 깊이의 해자 안쪽에는 총안이 갖추어진 1.5m 높이의 흉벽(parateichion)이 있어 일차 방어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막벽이 해자를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이 막벽 안쪽에는 수도관이 있어 해자에 물을 채우는 송수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자는 성 로마누스 성문 방면에서 급한 경사로 인해 유지 보수에 막대한 어려움이 있었고, 이 때문에 성 로마누스 방면부터 아드리아누폴리 성문 방면까지는 해자가 끊겨 있다.
해자의 모습. 해자를 가로지르는 막벽이 보인다. |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입지조건부터 방어에 최적화 되어있었는데, 3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어 침입자들은 서쪽 방면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천혜의 입지조건에, 기존의 공성법으로는 공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크고 높은 성벽까지 쌓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재래식 성곽 요새의 극치를 자랑하게 되었다.
해안 쪽의 성벽은 평범한 단일 구조로 달랑 성벽 한 겹만 있었다. 그러나 이 한 겹의 성벽도 다른 성의 일반적인 성벽보다는 튼튼한 데다가, 해안 방면이므로 공략하기에 만만치 않은 난이도였다. 남쪽의 마르마라해는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밀려오는 강력한 해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평시에도 항해술을 제대로 익힌 승조원이 있는 튼튼한 선박만 근접이 가능하였고, 항구시설 또한 충분하지 않아 배를 접안하기도 어려운 곳이었으므로, 성벽을 건설할 때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 이쪽 방면에서 적군이 성벽을 넘은 사례는 전혀 없었다. 동쪽의 하기아 소피아 방면 성벽은 고대부터 비잔티움의 신전이 있었던 곳으로, 고도가 가장 높고 노출된 면이 적으며 역시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밀려오는 강력한 해류를 그것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라 평시에도 바다 쪽으로는 접근이 매우 어려운 곳이다. 실제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이곳이 최후에 함락되었을 정도로 방어수준이 높았다.
한편 북쪽의 금각만 방면 성벽은 해류의 영향도 없고 만의 폭도 좁아 건너편 육지에서의 지원사격도 가능한 확실한 성곽의 취약점이었다. 그래서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때는 베네치아인들이 이곳을 집중 타격하였고, 끝내 버틸 수가 없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황제가 반대파에게 살해되어 교체될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그 덕에 방어력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빈약한 상태였으며, 결정적으로 내통자 때문에 성문이 열렸다. 당연히 동로마 제국도 이러한 약점을 알고 있었기에, 국가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금각만에 해군을 배치해 두었다. 따라서 약점이라고 섣불리 공격했다간 성벽의 수비군과 바다의 해군에게 연합공격을 받게 되었므로, 사전에 동로마 해군부터 무력화하고 제해권을 쥔 다음에야 공격이 가능했다.
위와 같은 까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난공불락이었으며, 422년에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쌓은 뒤 도시가 정면으로 뚫려 함락 당하는 것은 무려 천 년 뒤인 1453년이다.
침입자들의 공격 방향은, 금각만의 동로마 해군을 괴멸 상태로 만들고 이쪽 방면을 공략하지 않는 한 서쪽 방면으로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즉 공격 입장에서는, 공격을 가장 방어가 탄탄한 곳으로 할 수밖에 없는 불리함을 안고 공성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보통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은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다.
- 해자를 넘어 제1성벽인 흉벽을 기어 오르는 동안, 공격 측은 제1·2·3성벽으로부터의 합동공격을 고스란히 당한다. 또한 해자를 일부라도 메우지 않으면 공성병기가 성벽이나 성문에 접근하기 어려우므로, 난이도는 더욱 올라간다.
-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고생한 뒤 제1성벽을 함락시켰다 싶을 때, 흉벽 공략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손실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흉벽 위와 제1·2성벽 사이로 들어 온 공격 측 병력은, 제2성벽인 외성벽으로 후퇴한 수비 측 병력의 외벽·내벽으로부터의 공격을 다시금 고스란히 당한다. 더 큰 문제는, 흉벽의 성문과 외벽의 성문이 엇갈려 있어 흉벽을 함락시키는 데 사용한 각종 중장비는 여기서부터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다.[19] 심지어 외벽은 흉벽보다 훨씬 높다. 흉벽을 넓게 넓게 헐어 버리면 외벽에 중장비를 댈 수 있다. 그렇지만 제2·3성벽으로부터 돌과 화살이 계속 쏟아지고, 공격측의 병력이 몰려 북새통인 와중에 그런 대공사를 진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피난 끝에 제2성벽을 함락했고, 수비군은 제3성벽인 내성벽으로 퇴각한다. 이제 똑같은 과정을 한 번만 더 되풀이하면 된다. 그리고 제3성벽은 제2성벽보다도 높다. 지휘관도 냉정을 잃게 되며, 부대 전체의 손실률과 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악화되고, 병량을 비롯한 보급물자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시간이 흘러 싸우기 좋은 계절이 가고 겨울이 오면 추위 옵션까지 붙어 난이도는 또 다시 올라간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성문은 총 9개였지만, 왜인지 전해지는 이름은 더욱 많다. 오랜 기간 이어져 온 벽이니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수도 있고, 개보수 과정에서 원래 있던 성벽을 폐쇄했을 수도 있다. 또한 본성문 이외에도 군사용 문이 따로 있었고, 수없이 많은 샛문들을 통해 성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게 하였다. 6㎞에 달하는 긴 성벽이니 당연히 필요한 조치다.
결국 악명높은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은 마지막까지 완벽한 정공법으론 함락되지 않았다. 수비대장이 부상을 입어 드러 누워 버리는 바람에 지휘체계가 마비되고, 몇 달 동안의 공성포 세례로 간신히 낸 성벽의 구멍을 통해 억지로 밀어 넣은 최정예병력( 예니체리)이 맹활약을 펼치는 등, 여러 가지 호재와 피나는 노력, 그리고 행운까지 한꺼번에 겹쳐 시너지 효과를 낸 후에야 간신히 함락된 것이다. 그렇다고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이 공성측의 행운(수성 측의 불운)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다. 수비대가 성문을 닫지 못한 것은 수비대가 들어가는 것도 벅찰 정도로 공격측이 정신 없이 밀어붙였기 때문이고, 수비대장의 부상 역시 지속적인 파상공세로 인하여 수비대의 손실이 높아진 끝에 일어난 일이며, 성벽의 틈으로 최정예 병력을 밀어넣어 진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은 공성전의 기본 중 기본이다. 즉, 막대한 물량과 인원을 동원한 오스만 술탄국이 '운이 좋아질 때까지' 피나는 공을 들였고, 이미 쇠락한 동로마 제국은 운이 좋아질 때까지 두드리는 오스만 군을 저지하지 못할 정도로 피폐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은 Siege Assault[20]로는 절대로 뚫리지 않았지만, Siege의 가장 근본적인 공략법인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기[21]로는 함락당했으므로, 결국 완벽한 정공법으로 뚫리기는 한 것이다. 다만, 오스만 술탄국이 아나톨리아 영주들의 반란이라는 시간 제한까지 받게 하여, 공성에 실패하면 오스만이 역으로 끝장나는 단두대 매치를 성사시킨 것에서 테오도시우스 방벽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었는지[22]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간혹 성벽을 깔끔하게 격파하지 못한 것을 문제삼기도 하는데, 애초에 오스만군의 목적은 도시를 점령하여 이용하는 것이지 도시를 초토화 시키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성곽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득이다. 설령 파괴가 목적이었을지라도, 전술적으로는 먼저 돌파구를 찾아 저항을 무력화 시키고 점령한 뒤에나 여유롭게 부수는 것이지 공성 단계에서부터 성벽 전체에 대한 파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한 곳의 돌파구가 생기면 거기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건 공성전의 당연한 정석이다.
2.2. 개전 전의 상황
2.2.1. 무너지는 로마, 떠오르는 오스만
1204년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점령당한다. 이 때를 기점으로 동로마 제국은 멸망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것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목적은 아니었다. 이는 돈으로 귀결되는 여러 사정이 계속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 나온 결과물이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제위 계승 문제로 시끄러웠다. 삼촌에 의해 쫓겨난 황태자 알렉시오스(훗날의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에게 거액의 전쟁비용 부담, 성지 수호를 위한 병력 파견, 동-서 교회 대통합이라는 그럴 듯한 조건을 제시해 자금난에 허덕이던 십자군을 낚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십자군은 육지의 강력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는 대신 골든혼 만 주변의 성벽을 공격하는 전략으로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성공한다.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대해 동로마에 대한 우호적인 역사가와 십자군의 '순수성'이 부정당한 것을 우려한 역사가들이 쌍으로 십자군을 매수했다는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만, 실제 역사적 사실들이 으레 그렇듯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단순하게 결론지을 수 없는 복잡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제4차 십자군 원정 문서를 참고할 것.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는 황태자, 즉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에게 약속했던 것들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 제국의 금고는 텅텅 비어있는 상태였다.[23] 그리고 십자군에게 약속했던 돈을 지불하기 위해 교회의 재산에까지 손을 대기에 이른다. 여기에 '동서 교회의 통합'이라는 제국 신민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일까지 알려지자 시민들의 분노가 황제를 향하게 됐다.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알렉시오스 4세가 살해당하고, 반 십자군 성향의 알렉시오스 5세가 즉위했다. 알렉시오스 5세는 전 황제가 십자군과 맺었던 협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그로 인해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재침공하여, 제국을 멸망시키고 라틴 제국을 설립한다.
그렇게 로마 제국의 역사가 끝을 내리는 듯 했다. 하지만 망명 세력들은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세운다. 이 중 니케아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가 내부의 도움을 받아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게 된다. 이로써 괴뢰국이나 다름없던 라틴 제국은 멸망했고, 로마 제국은 다시 부활한다. 그런데 미하일 8세는 오랫동안 니케아 제국에서 군림해왔던 라스카리스 왕조를 타도하고 즉위한지라 정통성이 부족했던지라 자신의 지지 기반을 위해 유럽 지역으로의 진출을 위한 군사 원정들을 많이 수행했으며 거기에 추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재건까지 겁치며 많은 비용을 쓰게 됐고 이 과정에서 비용 충당을 위해 높은 세금을 때리게 되면서 아나톨리아 방면의 신민들과 유력자의 불만을 사게 됐다. 이에 후계자인 안드로니코스 2세가 민심 안정을 위해 국방력 약화를 감수하고서라도 감세 정책을 폈다. 문제는 그 시점이 오스만 베이국이 창건된 때와 딱 겹쳐 버렸다.
결국 동로마의 제위를 이은 니케아 제국의 본거지는 오스만 베이국에게 점령당하게 되어 가장 중요한 경제적 중심지인 아나톨리아 반도의 땅을 잃게 된다. 또한 북쪽에서는 세르비아가 제국을 선포하면서 그리스 북부를 거의 전부 점령하면서 영토를 크게 잃었다. 거기에 더해 14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을 휩쓴 흑사병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구의 절반이 사망하면서 제국은 더욱 허약해져, 진짜 당장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한편 그 즈음 몽골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일어난 오스만 베이국은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반도를 휩쓸어 버린다. 2대 베이 오르한 가지는 동로마 제국의 내전을 이용하여 갈리폴리 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했고, 이후 오스만은 갈리폴리에 마련한 교두보를 통해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1389년 1차 코소보 전투에서 술탄이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군을 사실상 무찔렀다.[24] 이후 오스만은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잇따라 개박살시키며 승승장구했다.
2.2.2. 점차 강성해지는 오스만
한편 동로마 제국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어 영토라고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만이 남게 됐다. 또한 1371년에는 로마 황제가 오스만 베이 무라트 1세의 신하가 되는 사상 초유의 굴욕까지 맛보게 된다.[25] 더욱이 1396년에 프랑스와 헝가리가 주축이 된 십자군을 오스만군이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격파한 뒤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보스포루스 해협에 아나돌루 히사리(Anadolu Hisari)라는 요새를 세우는 등 동로마 제국을 압박했던 바예지트 1세는 1402년의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면서 동로마와 오스만의 관계는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든다.[26] 이후 메흐메트 1세가 10년에 걸친 내전 끝에 왕위 경쟁자였던 형제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오스만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이후 그는 바예지트 1세와는 대조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취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는 현상 유지 정책을 펴는 한편 앙카라 전투 이후 독립해 나간 세르비아 등을 다시 신하국으로 삼았다. 그 뒤를 이은 무라트 2세는 오스만의 세력을 바예지트 1세 때로 되돌려 놓기는 했지만 알바니아의 군주인 제르지 카스트리오티[27]와 헝가리의 유능한 지휘관이자 정치가인 야노슈 후냐디의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그는 헝가리- 폴란드 동맹[28]과의 전쟁에서 희생만 클 뿐 성과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아들인 메흐메트 2세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당시 메흐메트의 나이가 어린 탓에 관료들과 군부의 불만에 부딪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린애가 술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 왕국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아버지에게 적을 격퇴해 달라고 요청했고, 무라트는 1444년의 바르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아들을 폐위하고 복위한다. 이후 무라트는 1448년의 2차 코소보 전투 등에서 헝가리군을 연파하여 강화를 맺었다. 그 뒤 알바니아 원정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한 뒤 곧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아들인 메흐메트 2세가 복위했다.
하지만 복위했을 당시 메흐메트 2세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정했다. 이는 무라트 2세 시대에 오스만 술탄국의 정계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본래 오스만은 창건자 오스만 1세 개인의 세력으로 일구어 낸 것이 아니라 여러 튀르크계 부족들의 연합 정권이었다. 그로 인해 초창기 오스만의 지배층은 이들 튀르크계 부족들의 후예들이었다. 예니체리가 창설된 것도 군사적으로 이들의 영향력을 덜 받기 위한 술탄들의 노력이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고 판단한 무라트 2세는 기독교도 소년들을 징집하여 관료로도 부리자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무라트 2세 치세, 그리고 메흐메트 2세의 치세가 시작되었을 당시 오스만 술탄국의 관료층은 기득권 세력과 데브시르메 징집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현 상황을 유지하자는 파(기득권 세력)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파(데브시르메)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무라트 2세의 신임을 받던 재상 할릴 파샤는 기득권 세력. 그것도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할릴 파샤는 작금의 오스만 궁정 내 첨예한 정치적 판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겪으면 권력의 중심이 자신이 대표하는 아나톨리아 기반의 베이(bey)들과 대립하는 기독교 피정복민, 즉 루멜리아 출신의 데브시르메파 쪽으로 넘어갈 것이라 생각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을 반대하고 있었다.
2.2.3. 로마의 치명적인 실책
이렇게 양쪽 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있던 도중 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치명적인 외교적 빌미를 오스만 측에 제공해 버린다. 당시 동로마의 재상이자 명문가 노타라스 가문 출신의 루카스 노타라스 대공의 위세를 꺾고,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콘스탄티노스 11세는 할릴 파샤와 메흐메트 2세에게 당시 술탄위 계승 과정에서 쫓겨나 동로마 제국 내에 망명 와 있었던 오스만 왕족 오르한을 먹여 주고 재워 주며 사고 안 치게 관리하는 비용을 추가로 내놓으라 한 것이다.[29][30]오스만 궁정 내 여론이 갈리는 도중에 오히려 콘스탄티노폴리스 측에서 먼저 이렇게 도발을 하고 나오니 할릴 파샤를 비롯한 기득권층조차 더 이상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을 반대할 명분이 사라졌다. 메흐메트 2세는 일단은 동로마 측의 사신에게 아나톨리아의 반란을 먼저 진압하고 나서 답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사신에게 따로 할릴 파샤가 내지른 성토를 보면 당시 동로마 제국의 남은 존재 자체가 오스만 술탄국에게 위험이 되는 이유가 상당히 극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오오, 멍청하고 어리석은
로마 놈들아, 네놈들의
교활함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지난 술탄께서는 네놈들에게
관용을 베푸셨겠지만,
지금의 술탄께서는 생각이 다르시다. ··· 네놈들은 지난 술탄께서 너희들과 체결하신 화평의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도 우리를 헛된 망상으로 겁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힘도 생각도 없는 어린애가 아니다. 네놈들이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한번 해 봐라.
트라키아에서
오르한을 술탄으로 옹립해 보든지,
도나우 강 너머에 있는 헝가리 놈들을 불러오든지[31], 뭐든지 해 보란 말이다. 다만 이것만 명심하거라.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너희는
고토를 회복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남은 것마저도
몽땅 잃을거란 것을 말이다!
(해리 J. 마골리아스(Harry J. Margoulias), 『Decline and Fall of Byzantium to the Ottoman Turks: An Annotated Translation of "Historia Turco-Byzantina"』 p.193, 도널드 M. 니콜(Donald M. Nicol), 『The Last Centuries of Byzantium』 p.375.)
(해리 J. 마골리아스(Harry J. Margoulias), 『Decline and Fall of Byzantium to the Ottoman Turks: An Annotated Translation of "Historia Turco-Byzantina"』 p.193, 도널드 M. 니콜(Donald M. Nicol), 『The Last Centuries of Byzantium』 p.375.)
그리고 이 말은 사실이 되었다.
이 대화는 15세기 동로마의 역사가 두카스(Doukas)가 남긴 기록물에 실려 있다. 후기 동로마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1차 사료로 평가받는 두카스의 기록물은 별도의 제목이 달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옛날에는 단순히 '역사'로 불리다가 1834년 독일 학자 베커(August Immanuel Bekker)에 의해 『Corpus Scriptorum Historiae Byzantinae』라는 이름으로 그 번역본이 나왔으며, 이후 1958년 루마니아 학자 그레쿠(Vasile Grecu)가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반영한 새 번역본을 『Historia Turco-Byzantina』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그리고 이를 1975년 미국 학자 마골리아스(Harry J. Margoulias)가 영어로 번역한 것이 『Decline and Fall of Byzantium to the Ottoman Turks: An Annotated Translation of "Historia Turco-Byzantina"』. 두카스의 사료를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마골리아스의 책은 오늘날까지도 두카스의 기록물 연구와 관련한 준(準)1차 사료로써 전 세계의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동로마를 다룬 서적의 참고 문헌 목록에서 마골리아스의 번역본을 기재해 놓지 않은 책이 드물 지경. 두카스의 기록물을 번역한 이들 책의 제목에 달린 '비잔티움'이란 단어는 후세의 번역가들이 임의로 집어넣은 거지 원작자 두카스가 달아 놓은 것이 아님을 유의할 것.
그런데 문제는 두카스의 기록 및 이를 충실히 번역한 자료를 무시한 채 특정 단어를 자기 입맛에 맞게 바꿔서 연구 결과를 내놓는 학자들이 몇몇 있다는 점이다. 두카스가 기록한 "오, 멍청하고 어리석은 로마 놈들아"의 원문 문장은 "ώ ανόητοι και μωροί Ρωμαίοι"이다. 마골리아스는 이를 "O stupid and foolish Romans"라고 제대로 번역했으나, 니콜(Donald M. Nicol)은 저서 『The Last Centuries of Byzantium』에서 해당 문장을 "You stupid Greeks(이 멍청한 그리스 놈들아)"라고 엉뚱하게 바꾸어 놓았으며, 오늘날 영어 위키백과를 포함한 웹상에는 이를 그대로 복붙한 자료가 넘쳐나는 실정이다. 교수가 내놓은 책이든, 일개 학생이 쓴 리포트든 가릴 것 없이. 당시 이슬람 세계는 무함마드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이전부터 동로마를 오랫동안 '로마 제국'으로 인식했기에 할릴 파샤가 "그리스 놈들아"라고 일갈했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지며, 두카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와 관계 없이 일단 원문을 간접 인용도 아닌 직접 인용한 이상 그 글 그대로 실어 놓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멋대로 'Romans'를 'Greeks'로 바꿔 버렸으니 이뭐병. 동로마 제국 문서에도 나와 있다시피 제국 및 그 신민을 일컫는 용어로서의 '로마'의 사용 여부는 당대인의 역사관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이기에, 이는 후대인이 함부로 '그리스'로 바꿔서 번역할 만한 성질의 단어가 절대로 아니다.
이러한 사례는 이슬람의 경전 쿠란의 30번째 수라 '로마장'이나 무함마드가 이라클리오스에게 보낸 편지 등을 영문으로 번역한 여러 글에서도 적잖이 발견되기에, 동로마와 관련한 당대의 사료를 번역한 글에서 제국을 그 시대의 서유럽인들이 '비잔티움'이라고 지칭했거나[32] 무슬림들이 ' 그리스'라고 지칭한 것이 보이면 혹시 번역가의 쓸데없는 주관이 개입한 건 아닌지 의심하면서 원문에는 어떻게 기재되어 있는지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고대에도 '로마의 신민'이 아닌 '특정 인종'을 일컫는 용어로 '라틴인'이란 말이 쓰이기도 했듯이, 동로마에 대해서도 그 신민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인종들 중 하나를 가리키는 수단으로서 '그리스인'이란 말이 아예 안 쓰인 건 아니다. 그리스인의 안내를 받아 하기아 소피아를 둘러봤다고 쓴 키예프 공국 사절단의 기록이 그 사례. 그러나 이와는 무관하게 원문 사료에는 분명히 ' 로마인'으로 기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인이 멋대로 이를 '그리스인'으로 번역한 것은 비판받을 만한 일이다. 당대에 '그리스인'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어서 '그리스인'을 뜻하는 말로 '로마인'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엄연히 '그리스인'을 가리키는 단어와 '로마인'을 가리키는 단어가 별도로 존재했다. 이 둘이 완전한 동의어라면,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이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Цар Срба и Ромеја)'와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Цар Срба и Грка)'를 모두 칭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 두샨이 이 두 칭호를 모두 썼다는 건 '로마인'이라는 개념과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을 달리 바라봤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정말로 당대인들이 ' 로마인'을 ' 그리스인'을 가리키는 단어로 쓴 게 맞는다면, 서방이 동로마 황제를 굳이 '그리스인들의 황제'라고 명시할 필요도 없이 그냥 '로마인(= 그리스인)들의 황제'라고 불렀을 것이다. 서방의 'Romanorum'과 동방의 'Ρωμαίοι' 모두 똑같은 '로마인'이란 단어인데, 한쪽은 그대로 '로마인'이라고 번역해 주고 다른 한쪽은 '그리스인'이라고 바꿔서 번역하는 건 공평치 못한 처사로서 지극히 서방 중심적인 태도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원문의 '로마인'과 '그리스인'을 다른 언어로 옮길 때에는 당연히 서로를 구분해서 번역해 줘야 한다. 다민족 국가였던 로마 제국의 신민 '로마인'은 절대로 특정 민족만을 지칭한 '혈연적인' 개념이 아닌 오늘날의 '미국인'과 같은 '국가적인' 개념이었기에, '로마인 안에 그리스인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이 될지언정 '로마인은 곧 그리스인을 뜻한다'는 로마인의 개념을 지나치게 축소 정의한 것이다. 당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휘하에서 장렬히 싸운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그 출신이 그리스든 슬라브든 튀르크든 아르메니아든 상관없이 모두들 '로마인'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19세기 민족주의 시대까지 계속되어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정교회를 믿는 모든 민족들( 아르메니아인 제외)은 몽땅 통틀어 '룸(로마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어로는 Ρωμαίοι(로메이)로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을 엘리네스(ελλήνες)라고 칭하기 시작한건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인데다가, 좀 더 자주 칭하기 시작한 건 적어도 아나톨리아지역을 포기하고 그리스 쪽 영토로 과감히 눈을 돌린 안드로니코스 3세까지도 가야한다.
메흐메트는 할릴 파샤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튀르크계 출신 귀족층을 제압하고, 무라트 2세 때에 정계에 진출한 데브시르메 세력을 친위 세력으로 삼아 전제군주정을 수립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몇몇 유력 귀족들이 일치하는 이해 관계를 바탕으로 같이 군세를 형성하는 유목제국의 성격이 강했던 초기 오스만 입장에서 이렇게 군주의 권위를 압도적으로 한방에 키우는 방법은 역시 전쟁, 그것도 군침 줄줄 떨어지는 스펙터클한 상대를 향한 대규모 원정뿐. 이에 따라 그는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여 유럽의 지배자를 자처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33] 그리고 그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술탄인 자신이 주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대도시를 정복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를 위해 145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남동쪽 보스포루스 해협 유럽 방면에 새로운 요새인 루멜리 히사르(Rumelihisarı)[34]를 건설한다. 이는 바예지트 1세가 건설한 아나톨리아 쪽 요새와 함께 보스포루스 해협에 대한 완전한 장악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 통해 서유럽 방면에서 오는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외부 통행을 통제했다. [35]
이때 동로마 제국에게 남은 영토란 제후국인 모레아가 통치하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전부였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방어가 가능한 건 콘스탄티노폴리스뿐이었다.
3. 개전
1452년 루멜리 히사리 요새가 완공되자, 동로마 제국에 비상이 걸린다. 이제 침공이 임박했음을 모르는 이는 더이상 없었다.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교황과의 동맹을 맺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해 겨울에 관료와 성직자들을 비롯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민들도 탐탁지 않게 생각한 동맹이 맺어진다.[36][37] 그러나 교황( 니콜라오 5세)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구원하고 싶어도 그럴 힘이 없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원한 것은 예루살렘을 구하러 신성 로마 황제, 잉글랜드 국왕, 프랑스 국왕 등이 참가했던 3차 십자군 같은 대(對) 이슬람 동맹군의 지원이었으나, 이제 더이상 교황에게 그런 십자군을 모을 능력도, 권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기에 황제를 구원한다는 영광에 자신의 한 몸을 던질 허영과 야심이 가득하며, 원정 나갈 여유가 있는 왕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전쟁은 이제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이슬람 세력에 맞서는 레콩키스타의 마지막 단계가 진행 중이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은 구성국들 간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다. 헝가리와 폴란드는 이미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대패한 상태였다.다른 유럽 왕국들이 여유가 없으니 제국을 위해 나서준 곳은 그나마 여유가 있던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국가들이었다. 제노바가 도시 내부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잘 훈련된 병력 700명을 1453년 1월에 지원 보낸 것이다. 하지만 7백 명으로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베네치아에서도 함대를 제공하기로 했고, 금각만에 정박하고 있던 베네치아 소속 상선들도 전투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베네치아 본국 평의회에서 함대 파견에 대한 회의가 길어지면서[38] 실제 파견은 1453년 4월경에나 이루어진다. 이때는 이미 전투가 시작되었고, 제노바 함대는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제노바의 국외 식민지 가운데 하나인 히오스 섬의 영주로 자원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찾아온 지원군의 지휘관인 용병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39]는 용병료만 받을 수 있다면 도시를 방어해 낼 것을 맹세한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그를 당장 고용하고,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황제인 자신 바로 다음가는 권한을 부여한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마지막 수단으로 메흐메트 2세에게 선물을 바치며 친선 관계를 요청했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외교적 수단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제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공방전만이 남아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금각만 쪽으로의 접근을 막기 위해, 만의 입구를 가로지르는 두꺼운 사슬을 설치한다. 이로써 금각만은 일단 방어할 수 있었고,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의 금고를 탈탈 털어 성벽을 강화하는 등으로 방어전을 준비하며 다른 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로 다짐한다.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군을 데리고 4월 2일 도시 서쪽에 자리 잡았으며 1453년 4월 5일에는 그의 마지막 부대까지 성벽 앞에 집결했다.
3.1. 오스만군의 상황과 배치
4월 해협을 넘은 오스만군의 규모는 15만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군대에는 오스만 최고의 정예보병인 예니체리 1만 명[40]과 수천의 기독교 군대도 포함 되어있었다. 이 기독교 군대는 발칸의 종속국에서 온 군대로,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1,500명의 세르비아 기병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당시의 세르비아 통치자 주라지 브란코비치(Đurađ Branković)는 몇 달 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의 보수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뜻이 없었지만, 오스만의 신하국인 이상 지원군을 파견하라는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술탄의 군대는 당장 투입 가능한 전투 병력만 도합 15만에 달했고, 유럽인들은 30만이 넘는다는 과장 섞인 평가를 하기도 했는데, 당대에는 비전투병력을 군이 투입 가능한 인력에서 제외했기에 15만으로 봤지만 비전투병력을 합치면 30만이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다.[41]
이 술탄의 군대는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War Machine, 즉 시스템화된 군수 체계를 갖춘 군대였다. 도로 공사, 취사, 운송을 담당하는 후방 지원부대가 따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 중 전문 의무대까지 갖춘 예니체리는 전체 오스만군의 축소판이라 할 만큼, 체계화된 오스만군의 견본이나 다름없었다. 따로 자잘한 업무들을 수행할 비정규군도 모집되어, 전투 병력은 본연의 전투 임무에만 충실할 수 있었다. 이런 군대를 운용하기 위한 거의 모든 작업이 관료와 장교들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런 war machine은 서유럽에서는 구스타브 아돌프의 개혁 이후에나 비로소 형태를 갖추게 된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군대였고, 그만한 전투력을 제공해 주었다.
메흐메트 2세는 도착하자마자 바다 쪽에서의 공격을 위해 함대를 건조했다. 이 함대의 규모에 관해서도 100척부터 430척까지 목격자들의 기록은 천차만별이지만 적어도 200~300척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함대는 6척의 대형 갤리선과 10척의 갤리선, 15척의 소형 갤리선, 75척의 소형 보트, 20척의 말 수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함대의 운용은 갈리폴리의 그리스인들에게 맡겨졌다. 바다 쪽에서의 적의 준비는 철저했지만, 그래도 바다만 점령한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심지어는 이 공성전을 위해 대형 공성포인 우르반 거포도 동원되었다. 이 거포의 수송을 위해서는 30대의 수레와 60마리의 소, 200명의 거포 관리 인원이 필요했으며, 250여 명의 병사들이 투입되어 앞서서 도로 공사를 진행해야 했을 정도로 거대했다. 길이는 대략 8 m에 달했으며, 무게는 19톤을 자랑했다. 큰 만큼 위력도 굉장하여 (구) 국군방송(현 국방TV)에서 방영한 과거 무기를 재연하는 해외 프로에서 이 포를 복원하여 위력을 측정했는데 위력이 현대 전차포에서 쏘는 포탄보다 더 강력했다.[42] 하지만 발사 후 포 자체의 가열로 인해 재장전에만 3시간이 넘게 걸렸고, 하루에 7발이 한계였으며, 그 이상 쏘면 포신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영영 못 쓸 각오를 해야 했다. 대략 300 kg의 돌덩이를 1.6 km 넘게 발사할 수 있었으나 이 발사체를 구하는 것도 굉장히 어려웠다.
이 무기는 헝가리인[43] 우르반이 주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 이 무기는 동로마에 판매될 예정이었으나 동로마 정부는 우르반에게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계약이 무산되고 만다. 이에 우르반은 메흐메트 2세에게 가서 " 바빌론의 성벽도 무너뜨릴 수 있다"라는 언플을 시전했고, 메흐메트 2세는 당장 이를 주문한다. 막대한 자금과 재료를 제공받은 우르반은 3달 후에 거포를 제작했으며, 오스만 군대를 위해 다른 공성포들도 제작해 주었다.[44]
이렇게 거대한 군대를 동원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해안 방면을 완전 봉쇄하는 것은 제아무리 오스만군이라도 힘들었다. 바탕이 유목민족인 데다가, 그리스인을 동원한다고 해도 자체적인 해군 선원 양성이 없는 한 대규모 함대를 시간에 맞춰 건조하는 것은 어려웠다. 거기에다가 튀르크인이 지휘권을 쥐고 있는 해군의 질도 그리 좋지 못해서[45], 금각만의 봉쇄는 번번이 실패했다. 따라서 마냥 포위를 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을 뿐더러 천천히 공성전을 진행하는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무라트 2세가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니면서 오스만 술탄국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고 해도, 발칸 반도의 종속국들이 언제 반기를 들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완전 점령이 아닌 제패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정복이기에 맘 먹고 봉기한다면 위협이 될 수는 있었다.[46]
그러다가 군대라도 날려먹을 때는 무라트 2세가 쌓아놓은 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특히 재상인 찬다를르 할릴 파샤는 공방전 도중에도 여러 번 포위를 풀고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 따라서 여러모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반드시 점령해야하는 곳 중에 하나이면서, 1453년만큼 오스만의 대내외적인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시기도 없었다. 그러니 오스만 군 입장에서는 정복할 것이라면 지금,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안일하게 대처하기에는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은 너무나도 큰 산이었고, 고려해야 할 변수는 너무나도 많았다. 따라서 오스만군에게 총력을 다한 공격이 최선이라고 볼수가 있다.
다만 여기까지의 서술은 '틀렸다' 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다소 과장되었다고는 할 수 있다. 오스만은 1453년 이전에도 세 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적이 있었는데, 1411년의 포위는 오스만이 내전 중이어서 공격측도 오스만군, 방어측의 일원도 오스만군이었으니 제외하고 나머지 2번도 모두 때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 먼저 바예지트 1세 때인 1390년부터 1402년까지 느슨하게 포위했을 때에는 발칸 반도 대부분이 오스만의 지배하에 떨어진 상황이었고, 티무르 제국이 아나톨리아에 손을 뻗치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또 알바니아는 오스만에 완전히 편입되어 있었고, 헝가리도 이때는 오스만이 굳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공격할 필요도 없다는 입장. 1422년의 포위도 발칸 반도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티무르 제국에서는 제위 계승 문제로 산발적인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이었기에 먼 서쪽까지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단 포위를 오래 할 여건이 안 되었다는 점에서 1453년보다 상황이 조금 안 좋긴 했다. 참고 요컨대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여건은 분명 갖추어져 있었지만, '1453년 못지 않게 오스만의 대내외적인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시기' 는 이전에도 두 번 더 있었다.
3.2. 로마군의 상황과 배치
그에 반해 로마군의 병력은 7,000명에 불과했다. 당시 징집을 위해 도시 전체를 뒤졌으나, 무장할 수 있는 인원은 5,000명에 불과했고, 2,000명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 등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 제노바인 용병부대가 훈련과 무장이 가장 훌륭했고, 바다에서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함대가 가장 강력했다. 나머지는 소수 훈련된 병사들과 무장한 시민, 선원, 외국인 자원자, 그리고 수도자들까지 포함되었다. 방어군에게는 소구경 포탄이 몇 있었으나, 성벽 위에 올려두고 쏘다가 반동 때문에 성벽이 무너지면 큰일이라는 이유로 사용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주변에서 몰려온 난민들을 포함해 5만 명의 시민들이 있었고, 병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시민들은 벽을 보수하고, 망루에서 경계임무를 맡았다. 식량배급이 시작되었고, 교회에 있는 금이란 금, 은이란 은은 다 뜯어와, 외국인 병사 2,000명에게 줄 급료를 마련했다.해안 쪽 방면의 4분의 1은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동로마에 망명해 있던 오스만의 왕족 오르한 첼레비(Orhan Çelebi)에게 맡겨졌다.[47] 그가 이끄는 오스만인은 대략 600명으로, 이들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제자리를 지켰다. 해안 방면의 성벽은 금각만이 점령당할 때까지는 안전했으므로 부족한 군사를 아끼기 위해 보초병을 배치한다는 느낌으로 듬성듬성하게 배치되었고, 금각만 방면에서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함대가 베네치아인 가브리엘레 트레비사노(Gabriele Trevisano)의 지휘 아래 배치되었다. 4월 5일에 술탄의 군대가 도착하자, 방어자들은 자리를 잡게 된다. 방어벽 전체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외벽에만 병력을 집중시키기로 한다. 콘스탄니노스 11세와 그의 군대는 벽의 중앙부인 메소티히온에 배치된다. 이 벽은 방어벽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으로 여겨졌고, 이곳에 적의 공격이 집중될 터였다. 주스티니아니는 황제의 북쪽 방면인 카리시우스 문(Charisian Gate)에 배치된다. 황제의 남쪽에는 제노바인 카테네오(Cataneo)가 방어를 맡았고, 황금 문(Golden Gate)과 페게 문(Pegae Gate)은 베네치아인 필리포 콘타리니(Filippo Contarini)에게 맡겨졌다.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잘 방어된 도시였다. 제 아무리 오스만군이 많다고 하더라도 전력을 다하지 않는 한 함락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이들을 최대한 막으면서 외부 증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방어군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방어전략이었다. 비정규부대 아잡, 시파히를 비롯한 정규군의 파상공세와 뒤를 이은 예니체리의 공격은 오스만 군의 장기였지만,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그걸 견뎌낼 수 있는 난공불락의 성벽이었다.[48]
3.3. 공성전 - 격전의 5월
4월 5일 술탄의 마지막 부대까지 합류하자, 메흐메트는 그의 정예병들을 후방에 있는 동로마 성채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마르마라 해 쪽에 있는 스투디우스의 작은 성들은 금세 함락되었고, 보스포루스 해협의 테라피아 요새도 며칠 안에 무너졌다. 마르마라 해에 있는 섬들은 쉴레이만 발타오울루(Süleyman Baltaoğlu)가 이끄는 오스만 함대가 점령한다. 그 기간 동안 오스만 군의 우르반 거포가 성벽을 두들겼으나, 당시 화약무기가 으레 그랬듯 정말 낮았던 정확도에 무지막지하게 긴 장전시간까지 곁들어져 동로마 부대는 충분한 수리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거포는 기대를 따라주지 못했다.[49]해안에서의 싸움도 맘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술탄도 그의 빈약한 해군을 데리고 금각만을 돌파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금각만 입구에 쳐놓은 방어용 사슬 때문에 배들이 만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대는 기본 임무인 해안 봉쇄도 제대로 해놓지 못했다. 4월 20일에 4대의 선박이 치열한 싸움 끝에 봉쇄망을 뚫고 만으로 진입했다. 이 선박들 가운데 세 척은 교황의 의해 지원된 제노바 함선이었고, 한 척은 동로마 제국의 함선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식량을 구하기 위해 크레타 섬에 보내졌었다. 이들의 무사귀환으로 방어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술탄은 오스만 함대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결국 발타오울루는 해임되고[50] 새 제독으로 함자 베이가 임명된다.[51]
(그림. 배를 언덕 너머로 옮겨 금각만에 진입하는 오스만 해군.)
메흐메트는 이 금각만이 계속 열려있는 한 공성의 성공이 묘연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탐색한다. 그는 금각만 북쪽 갈라타에 기름칠된 통나무들을 놓아 그 위로 배가 지나갈 수 있는 지상통로를 만든다. 이 통로를 통해 갈라타의 언덕 너머로 함선을 옮겨 금각만에 진입한다는 대담한 작전이었다.[52] 4월 22일에 전체 함대 가운데 절반이 이 길을 통해 금각만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명목상 중립이었던 금각만 건너편의 제노바인 식민지 페라에서 오는 보급을 위협할 수 있었고, 방어군 사이에서는 불안감이 퍼지게 된다. 28일 저녁 방어군은 오스만 함대를 화공선으로 공격하려 하지만 제노바인의 밀통으로 인해[53] 오스만 군은 이를 미리 예상했고, 방어군은 오히려 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40명의 이탈리아인 선원이 침몰하는 함선에서 탈출해 금각만 북쪽에 다다르지만 오스만 군에게 사로잡혀 방어군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한다. 방어군은 보복으로 260명의 오스만군 포로 전원을 참수한다. 이 오스만 군 함대는 계속 금각만에 주둔하게 되고, 결국 방어군은 선원 가운데 일부를 성벽에 올리는 등 금각만에 면한 성벽에도 병사들을 다수 주둔시켜야 했다. 5월 3일 동로마 내부의 물자들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12명의 병사가 임무에 자원했고, 소형 선박 하나가 야음을 틈타 방어선을 피해 베네치아 함대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빠져나간다.
해안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지상에서는 오스만 군의 공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방어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힘입어 철통 같았고, 예니체리가 중심이 된 공세는 번번히 실패한다. 계속되는 포격은 분명 적의 성벽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모르토르로 안쪽이 가득찬 성벽은 좁은 틈새만 허용했을 뿐이었다. 이곳으로 병력들이 누차 투입되었으나, 성벽의 방어 체계 앞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5월 6일 성 로마누스 문 방면이 포격으로 붕괴했다. 문제는 이쪽의 성벽이 리쿠스 강이 흘러드는 지역이라, 다시 성벽을 보수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역으로 리쿠스 강이 만들어낸 골짜기로 인해 해자를 형성하기도 어려운 이곳은 공격도 쉽지는 않았다. 주스티니아니는 뒤쪽에 새 성벽을 쌓는 것으로 대신한다.
5월 7일 메소티히온에 25,000명의 오스만군이 투입되었지만, 그보다 10분의 1 수준인 방어군에 의해 3시간의 격전 끝에 격퇴된다. 이런 공세로 인해 지상군의 부담이 커지고 결국 금각만 방면의 해군에서 또 다시 일부 병력을 빼와야 했다. 12일 다시금 공세가 재개되었고, 이전에 투입되지 않은 나머지 병력들이 공세에 투입되었다. 이번에는 성벽에 꽤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이쪽으로 병력들이 투입된다. 황제의 근위대까지 동원되어 입구를 틀어막았으며 결국에는 방어에 성공한다. 5월 18일 공성탑을 동원하여 해자를 넘어 외벽에 적은 피해로 접근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날 저녁 수비대가 놓여있던 공성탑을 죄다 불살라 버린다. 동로마는 그새에 다시 성벽을 보수하는 데 성공한다.
성과없는 정면 공격이 계속되자, 오스만 군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갱도 건설을 계획한다. 5월 중순부터 공사가 시작되었고, 세르비아의 광산인 노보 브르도(Novo Brdo)에서 일하다가 세르비아가 파견한 지원군에 속해 끌려온 광부들이 주가 되었다. 이들은 자아노스 파샤(Zağanos Paşa)의 지휘 아래 공사를 진행하나, 스코틀랜드 출신의 방어군 측 기술자 요하네스 그랜트(Johannes Grant)가 이 땅굴과 이어지는 또다른 땅굴을 팠고, 동로마 병사들이 그곳을 통해 공사 인부들을 공격한다. 방어군은 5월 16일, 오스만 군이 판 갱도를 차단하고, 21일, 23일, 25일에 다른 갱도들을 차단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스의 불의 투입과 치열한 전투 끝에 이 땅굴들은 파괴된다. 방어군은 5월 23일 2명의 오스만 장교들을 사로잡았고, 고문끝에 이들은 모든 갱도의 위치를 발설한다. 위치의 발설로 모든 갱도들이 방어군의 손에 파괴되면서, 갱도를 이용한 돌파도 실패한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오스만군 지휘부도 애가 타기 시작한다. 메흐메트 2세가 공성군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걸어보기도 하고, 공성기로 성벽을 공략하기도 해봤으나 전부 무용지물. 날짜가 바뀔수록 성벽 공격의 주력인 예니체리 부대의 손실은 점점 커져갔다. 오스만의 최정예나 다름 없는 예니체리를 이렇게 소모하는 것은 여러모로 이득이 아니었다. 오스만에게는 여전히 적이 많았고, 나중을 생각하면 예니체리 부대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결국 메흐메트 2세는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한다. 도시 내의 모든 거주민과 황제의 재산의 보호, 황제가 가진 모레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대한 권리 보장 및 통치 위임, 도시에 남을 이들의 안전 보장 등을 골자로 한 내용으로 이 항복 권유는 도시 공략에 계속 애를 먹는 술탄으로서는 진심으로 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이 항복 권유를 받고,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술탄의 호의와 관대함에 커다란 경의를 표했으며, 아나톨리아 및 그 외의 술탄의 모든 점령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다. 하지만 항복 권유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정중히 거절한다.
"미안하오만,
이 도시를 넘겨주는 일은
짐 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 살고 있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사에 따라 죽기로 결정했고,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54]
항복 권유가 거절당한 뒤, 메흐메트 2세는 휘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 모아 앞으로의 공성에 대해 논하고자 참모회의를 열었다. 재상(Vezir-i âzam)이었던 할릴 파샤(Halil Paşa)는 이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공격에 반대해왔다. 그는 이미 오스만군의 피해가 막심하며, 더이상의 공격은 무의미하다며, 공성을 포기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 메흐메트가 왕자였던 시절부터 수행해 온 오른팔에 해당하는 부재상(Vezir-i sani) 자아노스 파샤(Zağanos Paşa)는 술탄의 위엄에 타격을 입을 것을 들어 할릴 파샤의 주장에 반대했으며, 계속 공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메흐메트 2세는 자아노스 파샤의 손을 들며, 보다 잘 정비된 군으로 수비군을 압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미 오랜 공성전으로 방어군 측의 피로는 극에 다했다고 판단한 술탄은 지금까지의 공세와는 달리 이용가능한 모든 병력을 투입한다고 결정했다. 재상까지 반대하는 마당이었으니, 이 공격마저 실패할 경우 술탄은 철수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5월 24일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달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상징이기도 했는데 때마침 그 날 개기월식이 있었다. 이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측에서는 도시가 패망할 흉조라고 여겼다.[55] 또 이 당시에 로마 제국은 첫 황제의 이름과 같은 사람의 치세 동안에 멸망한다는 전설도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었는데, 당시의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11세. 노바 로마, 즉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한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여겨지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같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미 1,000여년 전 서로마 제국이 로마의 건국자였던 로물루스 및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이름이 같았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 때 멸망한 전례가 있으니. 또한 며칠간 도시엔 엄청난 뇌우가 퍼부었고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도시가 패망할 불길한 징조로 여겨져서 방어군 측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56]
5월 26일 오스만군은 총공세를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준비는 공세 결정이 내려진 후 36시간 동안 계속되었으며, 오스만군은 가능한 모든 전력을 배치하고 공세를 계획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5월 27일에는 5월 3일 몰래 포위망을 빠져나갔던 베네치아 함선 특공대원 12명이 귀환하였으며, 주변 해역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더이상의 서방 지원군은 없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오스만군 쪽 첩자가 공세 일시를 알려주었지만 방어군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5월 28일 공세의 성공을 위해 대규모 이슬람 의식이 행해지고, 이맘들은 투입될 병사들을 독려하며 시간을 보낸다. 같은 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는 황제가 주선하는 예배가 열린다. 황제는 가톨릭과 정교회 양측을 대표했다. 같은 날 황제는 수비군과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는데, 일부분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수비군 전원에게 | 죽음을 감수할 만한 명분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신앙, 고향, 가족, 조국이 그것이다. 이제 그대들은 목숨을 걸고, 이들을 지키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짐 역시, 짐의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느니라. |
지휘관들에게 | 짐은, 우리의 신앙의 적들이 우리를 위협하는 이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짐은 이 아름답고 이름 높은 도시와 짐의 나라를 지키는, 그대들과 그대들의 자질을 믿소. 만일 짐이 본의 아니게 그대들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면, 지금 사죄하는 바이오. |
서유럽인 지휘관들에게 | 오늘 이 순간부터, 라틴인과 로마인은[57] 같은 신앙으로 뭉쳐진 한 백성들이오. 그리고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면, 우리는 이 도시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오. |
이날의 공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둘러싼 서로의 마지막 총력전이 될 것임을 두 제국은 예감할 수 있었다. 29일 자정, 오스만 측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3.4. 5월 29일 - 최후의 공세
5월 29일. 1,000여년 동안 제국의 심장을 지켜주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드디어 무너지다.[58] |
그럼에도 방어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에 오스만군은 제3차 공격대로 준비되어있던 예니체리 부대를 전부 투입한다. 이미 날은 밝아오고 있었고, 전투는 계속 되었지만, 방어군은 겨우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된 전투로 피로에 찌든 방어군에게 쉬지 않고 계속해 몰아붙이는 오스만군은 이미 이길 수 없는 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처절한 공방 와중에 수비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가 복부에 심한 중상을 입게 된다. 그가 부상당해 후송되자, 그의 직속 부대인 제노바 군대도 뒤로 물러난다. 그의 지휘 아래 지옥 같은 공성전을 버텨내던 방어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지게 된다. 제노바 군대가 철수한 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그의 근위대와 함께 싸움을 이어간다. 그러던 와중 시민들의 출입구로 이용되던 비밀 쪽문 케르카포르타(Kerkaporta)가 열리는 일이 발생한다.
성벽에 오스만의 군기가 오르다. |
한편 그와 같은 때, 남쪽의 성벽에서도 울루바틀르 하산(Ulubatlı Hasan)이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오스만의 깃발을 꽂았다. 그는 그 직후 전사하였으나 오스만의 깃발이 꽂힌 것을 본 수비군은 패배를 직감했고, 오스만군은 동료의 시신을 넘어 성벽 전체를 제압하기에 이른다.[61][62]
동로마 병사들은 성벽을 포기하고 그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고, 베네치아인들은 그들의 배를 찾아 항구로 모여든다. 나머지 병사들은 항복하거나, 성벽 아래로 투신하는 것으로 각자의 공방전을 마감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그의 자주색 망토를 집어던진 후, 다가오는 오스만군에게 단신으로 돌격하여, 거리에서 싸우는 그의 병사들과 삶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63] 2,200여년을 이어온 제국과 운명을 같이 한 그의 최후에 관해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그 무엇도 그의 최후를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도시로 진입한 오스만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메흐메트 2세는 그가 기독교 지역을 총괄할 관리를 임명하는 상징적 장소로 거룩한 사도 성당을 원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근위대를 보내 약탈을 막도록 명령했다. 메흐메트가 중요 건물로 지정한 건물 외의 나머지 지역은 모두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몇몇 운 좋은 시민들은 탈출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베네치아인들이 탈출하려 시도했을 때는 이미 금각만 쪽 성벽이 점령당한 시점이었지만, 병사들은 약탈에만 관심이 있었지 살육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은 덕분에 도망칠 수 있었다. 베네치아 지휘관들은 금각만 쪽 문을 부수고 나왔고, 난민들과 병사들을 싣고 금각만에 정박한 배들이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 흐름에 황제의 휘하에 있던 배들도 항구를 빠져나갔다. 오후쯤에 오스만 해군이 금각만을 통제했을 즈음에는 이미 거의 모든 배가 빠져나가 있었다.
도시 내부에 있는 시민들은 하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대피하였다. 병사들은 그 앞 광장에 모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시민들은 병사들과 하기아 소피아의 청동 문이 그들을 보호해 주리라 믿었지만, 청동문은 결국 오스만군의 손에 열리게 된다. 이들은 모두 노예로 팔리게 된다.
치열한 싸움으로 인한 오스만군의 사상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총공세까지의 전투 상황[64]으로 보아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으리라 보고 있다. 도시가 함락된 후 오스만군의 약탈에 대해 베네치아 의사 니콜로 바르바로는 이렇게 전한다.
(도시에 흐르는 피가) 마치 갑작스런 소나기 후의 도랑 속 물길 같았다.
튀르크인과 기독교인들의 시체는 바다 위에 마치 운하 속 과일들처럼 떠다녔다. 도시가 함락된 후에도 오스만군이 한동안 학살을 계속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오스만군은 수비군이 완전히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두 달 동안 우리 대군을 쩔쩔매게 한 적군이 아직 남아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반 시민이건 누구건 눈에 보이는
동로마인이나 서유럽인은 무조건 학살하고 다녔던 것이지만, 이윽고 상황을 파악하자 학살보다는 노예로 잡아 파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렇게 2206년 역사를 이어온 로마는 한 혈기왕성한 젊은 술탄에 멸망하고 말았다.
4. 정복
점령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공격 이전부터 이미 이 도시를 오스만의 새로운 수도로 삼기로 마음먹었던 술탄은 도시가 완전히 폐허가 되는 건 원치 않았기에 도시의 주요 건물에 호위병을 보내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이미 도시에 열린 헬게이트는 술탄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오스만 군대는 메흐메트 2세가 허락한 사흘 동안, 살육, 약탈과 강간 등을 저질렀다. 당시 도시엔 약 4만 명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살해당한 사람은 약 4천 명 정도로 보인다. 나머지 시민들 중 대략 3만 명이 노예로 팔려나가거나 도시를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기록에서는 이를 본 메흐메트 2세가 충격에 빠져 하루 만에 약탈을 금지했다고도 하지만, 확실히 많은 중세 로마 제국의 문화유산들이 소실되고 말았다.
그 어떤 것도 이 끔찍한 상황에 비견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집에서 나갔고, 그 후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알지 못한 채 오스만군의 칼에 죽어나갔다. 누군가는 그들이 숨으려던 집과 성당에서 죽어나갔다. 분노한 오스만군은 자비가 없었다. 그들은 집을 털고, 죽이고, 겁탈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남녀노소와 성직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노예로 팔리기 위해 잡혀갔다. 백발의 노인들은 저항도 못하고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나왔고, 갓난아기들은 어머니의 품에서 낚아채어졌다. 여자아이들은
강제결혼의 대상자들로 끌려갔다. 성당들은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성물들은 바닥에 내팽개쳐졌고, 십자가들은 뜯겨졌다. 성소들은 더럽혀졌다. 다른 끔찍한 일들이 더 벌어지고 있었다.
메흐메트 2세가 이 폐허들, 파괴되고 버려진 집들과 쓰러지고 폐허가 되어버린 모든 것을 보았을 때, 그는 큰 슬픔을 느끼고, 이러한 모든 파괴와 약탈에 사죄했다. 눈물이 그에 눈에서 흘러나왔고, 그는 그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우리가 이 모든 파괴를 저질렀단 말인가!"
그의 영혼은 비탄에 가득 찼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 정도로 상황은 선을 넘어있었다.[65]
메흐메트 2세가 이 폐허들, 파괴되고 버려진 집들과 쓰러지고 폐허가 되어버린 모든 것을 보았을 때, 그는 큰 슬픔을 느끼고, 이러한 모든 파괴와 약탈에 사죄했다. 눈물이 그에 눈에서 흘러나왔고, 그는 그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우리가 이 모든 파괴를 저질렀단 말인가!"
그의 영혼은 비탄에 가득 찼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 정도로 상황은 선을 넘어있었다.[65]
도시의 혼란이 진정된 이후,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모든 약탈을 중지시키고 그의 군대를 벽 밖으로 내보냈다. 동로마 역사학자 요르요스 스프란지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의 상황과 술탄의 행적을 묘사했다.
"정복 3일째가 지나자, 술탄은 자신의 승리를 축하했다. 그는 포고령을 내렸다. 도시를 탈출하려고 애쓰는 모든 시민들에 대한 적발을 중지했고, 그들을 숨어있는 곳에서 나오게 했다. 그들은 자유민으로 남을 것이라 했으며,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는 도시의 버려진 모든 집과 재산들의 복구를 선언했다. 공성 전에 도시를 떠난 이들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떠난 이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그들의 신분과 종교를 보장받을 것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막 정복한 이 도시를 오스만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고, 제국의 대성전이자 랜드마크인 하기아 소피아는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회 성당들은 보존되었고, 새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는 그리스인이며 동서교회 일치 반대파인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가 임명되었다. 주인이었던 로마 제국이 사라진, 이제는 코스탄티니예로 이름이 바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제 새 주인 오스만 제국을 470년 동안 섬기게 될 운명이 온 것이다.[66]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이후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재상이자 대공(Megas Doux)이었던 루카스 노타라스는 항복 이후에 메흐메트 2세의 요구들을 대부분 거절했고, 2개월 후 메흐메트가 남색을 목적으로 14살짜리 막내아들을 궁정에 보내라는 명령도 거부했다. 다만 이는 그리스 역사가들의 주장이고 튀르키예 역사학자들은 이 설을 부정한다. 메흐메트 2세는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놈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루카스 노타라스와 그의 사위와 막내아들을 붙잡아 처형했다. 다만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전 딸인 안나 노타라스와 여성 가족들을 베네치아로 피신시켰고, 안나 노타라스는 베네치아에서 동로마인 망명지구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수비군의 지휘관들 중 조반니 주스티니아니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당시 부하들이 탈출선에 태워 탈출했으나, 이미 부상이 심해서 1453년 6월 초에 사망했다. 시신은 히오스 섬의 산토 도미니코 성당에 안치했으나 1881년 지진으로 성당이 파괴되면서 묘지 또한 유실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죽었다면 영웅이 되었겠지만 도망쳐서 영웅이 되지 못했다.
베네치아 바일로(bailo)[67]인 지롤라모 미노토는 함락 당시 오스만 군대에게 포로로 잡혔고, 다음날 처형당했다.
5. 여파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은, 오스만에게 크게 세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여 영역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 이전까지는 비록 아나톨리아 반도를 영유하고 발칸 반도에도 광대한 세력을 뻗치고 있었지만, 오스만의 영토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사이에 두고 둘로 분열되어 있었다. 따라서 수도도 한 군데에 두지 못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수도 부르사(Bursa), 발칸 반도의 수도 에디르네(Edirne)로 2군데 두어야 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그리고 영토가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말은 당연히 통치가 보다 편리해지고 국력이 강해진다는 말이고, 이를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의 세력은 더욱 멀리까지 뻗어나갈 수 있었다. 만일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로마 제국의 수도가 아니었고 대도시가 아니라 성벽을 두른 시골 마을이라고 하더라도, 메흐메트는 그곳을 제국의 수도로 삼았을 것이다. 1000여년 전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 세르디카가 노바 로마가 될 것이다"고 공공연히 말했고 실제로 쟁쟁한 행정수도들이 있었지만 결국 비잔티움 즉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것처럼 말이다.
다음으로, 오스만이 세력을 확장할 때에 배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위 내용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데, 이전까지 오스만은 발칸 반도에서든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든 영토를 확장할 때에 항상 콘스탄티노폴리스 부근을 주시해야 했다. 서유럽의 어느 나라가 이교도 박멸을 외치며 십자군을 일으킨다고 할 때 대(對)오스만 십자군의 전진기지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68], 오스만의 입장에서 이 말은 제국 영토 한가운데에 적군이 떡하니 나타난다는 말이었기 때문. 즉 군사력을 집중하기가 아주 어려웠다는 말인데,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지막으로 술탄이 주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함으로써 술탄의 권위가 수직상승하여, 황제를 칭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아래에 나오는 로마 황제 선언이 바로 이와 관련된 것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메흐메트는 공방전 도중에도 끊임없이 철수를 주장하며 훼방을 놓았던 재상 할릴 파샤를 처형. 데브시르메 징집자 출신인 자아노스 파샤(Zağanos Paşa)를 신임 재상으로 임명했다. 이는 데브시르메 출신자로서 재상이 된 최초의 사례였으며, 이로써 메흐메트는 데브시르메 징집자를 일종의 여당으로.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었던 튀르크계 귀족들을 야당으로 삼아 서로 경쟁하게 함으로써 전제군주정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침은 쉴레이만 대제가 데브시르메 세력에게 너무 큰 힘을 실어주는 바람에 튀르크계 귀족들이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제국 쇠퇴기에 황제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예니체리가 황제를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상황에서도 오스만의 군주는 문서상으로나마 '신하의 생살여탈권까지 한 손에 틀어쥔, 전제군주' 로서 군림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메흐메트 2세는 스스로를 로마 황제(Kayser-i Rum)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정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게는 인정받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이를 부정했다.[69]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주관한 즉위식에 참가했고, 총대주교는 그를 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즉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후계자로 인정한다.
로마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 또한 후사가 끊기게 되었다.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공방전 와중에 사망했으며, 후술할 모레아의 군주이자 그의 형제인 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 형제는 1460년 오스만군에 의해 쫓겨나 한 명은 교황령의 로마시로 망명하고 다른 한 명은 포로가 되어 일생을 마쳤다. 그의 조카들도 망명하였으나 제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남은 이들은 메흐메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이후에 술탄을 위해 일하는 길을 택했다. 가장 나이 많은 조카는 무라트(Murat Paşa)로 개명했고, 메흐메트 2세가 총애하는 최측근이 된다. 그는 베일레르베이에 임명되었으며[72] 그에게 발칸 반도가 주어졌다. 그보다 나이 어린 조카는 메시흐(Mesih Paşa)로 개명했으며, 오스만 함대 제독과 갈리폴리의 통치자로 임명된다. 그는 나중에 메흐메트 2세의 아들인 바예지트 2세 때 대재상(Vezir-i âzam)에 임명되기도 한다.
오스만의 손에서 도망친 동로마 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중세시대 학문과 문헌을 가지고 도피처를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로 정하게 된다. 이 도시들은 1396년 콜루치오 살루타티(Coluccio Salutati)에 의해 시작된 문화 교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 고전에 대한 방대한 자료와 연구 결과를 가지고 있었고, 이전에는 이슬람을 거쳐서, 아니면 수없이 중역된 고전들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해야만 했던 라틴 학자들에게 단비가 되어주었다. 이러한 동로마의 문화적인 전수는 후일 르네상스의 발판이 된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아있던 학자들도 처우는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갈라타에 모여 살며, 오스만 파디샤[73]들에게 다양한 조언을 하게 된다. 또한 학자들뿐만 아니라 용케 도망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대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정착했고, 공포에 질린 모레아에서도 적지 않은 수가 이탈리아로 이주하였다. 최소로 잡아도 수천은 간 걸로 짐작된다.
또한 아직 잔재는 있었다. 멸망할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함께 제국의 둘뿐인 영토였던 모레아 전제군주국을 비롯해 제4차 십자군으로 인해 동로마가 일시 망했을 때 이피로스와 트라페준타에 세워진 동로마계 국가들인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타 제국, 14세기에 크림 반도에 세워진 테오도로 공국이 아직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메흐메트 2세의 다음 목표는 이러한 멸망한 제국의 마지막 잔재였다.
5.1.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멸망
제국 멸망 직전인 1450년경의 모레아. 자주색 영토가 형 디미트리오스의 영토. 보라색 영토가 동생 토마스의 영토이다. |
미스트라스에 수도를 둔 모레아는 1348년 설립되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영역으로 한 동로마 제국의 신하국으로, 황제의 동생이 군주에 취임해 왔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당시 모레아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형제들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와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74]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모레아는 위기에 처한 수도를 구원하려 했으나 몇 년 전 파디샤 메흐메트 2세의 선왕인 술탄 무라트 2세의 공격으로 입은 피해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수도까지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기에 수도의 함락을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문제는 수도마저 무너진 마당 속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모레아의 공동 통치자였던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가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는 점. 아예 모레아의 수도(형 디미트리오스는 미스트라스, 동생 토마스는 글라렌차)를 따로 두고 영토까지 반으로 나눠 각자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외교적 입장 차이가 문자 그대로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디미트리오스는 친오스만에 반서유럽이었던 반면, 토마스는 친서유럽에 반오스만이었던 것. 이러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고, 결국 형제간의 지긋지긋한 대립에 지친[75] 모레아의 알바니아계와 그리스계 주민들이[76] 반란을 일으켰다. 위기에 빠진 두 통치자는 메흐메트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오스만 군의 지원을 받아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다. 반란 진압의 대가로 1454년 모레아는 메흐메트 2세 휘하로 들어가게 되고 그 후 잠시 동안 오스만 제국과 모레아 사이의 평화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미 한번 반란을 겪어 파디샤의 지원으로 겨우 반란을 진압했음에도 이 양반들이 정신을 못 차렸는지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의 반목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반목이 계속되다 보니 조공조차 바칠 수 없을 정도로 나라 살림이 엉망이 되었고, 결국 메흐메트 2세는 토마스를 몰아내달라는 디미트리오스의 요청을 빌미로 1460년 모레아를 침공하여 모레아를 멸망시킨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로마로 망명하여 거기서 교황과 제후들에게 동로마 제국의 망명 황제로서 대우받다가 1465년 사망했고, 디미트리오스는 통치자 지위를 유지하는 대신 투옥되어 1470년 에디르네에서 사망했다. 디미트리오스는 당연히 이의를 제기했지만, 메흐메트는 무시했다. 당시 관료들 가운데 메흐메트에게 왜 디미트리오스를 통치자로 삼지 않는지 물어본 인물이 있었는데, 메흐메트 曰 '그런 자는 어떤 왕국을 맡더라도 제대로 통치해내지 못할 것이다.'
5.2. 트라페준타 제국의 멸망
이후 파디샤의 칼날은 동쪽의 트라페준타 제국한테로 향했다. 이에 트라페준타 제국은 백양 왕조 등의 주변 세력 및 서방 가톨릭 국가와의 연계를 통해 오스만을 막으려 했으나 모레아가 멸망한 이듬해인 1461년, 메흐메트 2세는 트라페준타 제국을 침공해 멸망시킨다. 트라페준타의 마지막 황제인 다비드는 오스만군에게 붙잡혀 아들들과 함께 처형당했으며, 황실 여자들은 노예가 되거나 하렘으로 끌려갔다. 다비드의 막내아들인 요르요스만이 가까스로 조지아로 탈출했으나,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다.5.3. 테오도로 공국의 멸망
그러나 트라페준타 제국이 망했다고 제국의 잔재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크림 반도의 테오도로 공국과 그리스 서부의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도로 공국은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453년부터 지속적으로 오스만에 저항해 오고 있었고 특히 1465년이 되면 라이벌인 제노바와 평협을 맺고 서로 연합해서 오스만에 저항하는 등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메흐메트 2세는 테오도로 공국을 쓰러트리는데 본국인 트라페준타 제국이 멸망하고도 꼬박 14년을 소비해야 했고 1475년 12월 테오도로 공국의 수도 도로스가 오스만군에게 함락되고 나서야 멸망했다. 이제 남은 잔재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만 남게 되었다5.4.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멸망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은 원래 4차 십자군으로 탄생한 동로마 망명 정권 중 하나였으나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이후 이탈리아계 귀족 가문인 오르시니 가문이 장악했다가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두샨이 점령한 뒤에는 세르비아계가 데스포티스가 되기도 했다가 다시 이탈리아계 귀족인 토코 가문이 데스포티스가 되는 등 복잡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피로스의 마지막 데스포티스인 토코 가문의 레오나르도 3세는 오스만에 저항하려고 노력하였으나, 1479년에 오스만에게 정복당하고 만다.이렇게 한때 강대한 제국이었던 로마의 잔재는 유럽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6. 평가와 의의
오스만 제국 후예인 튀르키예에서는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역사로 기억한다. 2012년 튀르키예 영화 < 정복자(Fatih) 1453>이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는데 문제는 메흐메트 2세야 멋지게 그렸다 쳐도, 성실하고 최선을 다한 군주인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정치모략을 일삼는 간사한 군주로 왜곡하여 그리스에서는 무척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군인들끼리의 혈전만 있었고 일반시민들은 매우 평화로운 대우를 받은 것처럼 나오는데 실제로는 상술되었듯이 살인, 강간, 약탈이 횡행했다. 나중에 메흐메드가 직접 멈추기는 했으나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뒤. 그런데 재미있게도(?) 2014년 개봉한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에서는 반대로 메흐메트 2세가 루마니아를 핍박하는 막장 쓰레기 폭군으로 그려진다.[77] <정복자(Fatih) 1453>에서의 콘스탄티노스 11세에 대한 평가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 딱히 어느 한쪽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쌍방 모두 아직까지 역사에 대한 내셔널리즘 프레임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옳을 것이다.2009년 이스탄불에 새롭게 문을 연 파노라마 1453 박물관도 이 전투 관련 자료를 상세히 전시하고 있다.
7. 기타
내려져오는 전설에 따르면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공화정 시절의 고대 로마가 고대 카르타고시를 멸망시킬 때 로마군을 이끌던 집정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비록 적국이지만 위대했던 도시가 아비규환에 빠진 것을 보고 비탄에 잠겨 로마 또한 이런 식으로 최후를 맞을 것이라 예언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 거의 모든 영토를 상실한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남겨진 수도 또한 치열한 공성전 끝에 함락된 후 도시의 유산은 파괴되거나 약탈되고 시민들은 학살되거나 노예로 끌려갔으니 그 예언이 정말 이루어진 것이다.동로마 제국보다 천년 전에 먼저 없어진 서로마 제국의 경우는 게르만족의 침공에 두 번 함락되긴 했어도 그걸로 망한 건 아니었고 알라리크와 가이세리크는 불필요한 학살은 하지 않는 쪽으로 노력했기에 이 일은 스키피오의 그 예언과는 무관하다. 서로마 제국은 카르타고나 동로마처럼 화끈하고(?) 장렬하게 멸망하지 않았고, 전통적으로 속국이나 산하 이민족을 다루던 방식인 조약 혹은 동맹(foedus)의 형태가 서로마 정부에서 더 이상 제대로 이민족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하나하나씩 게르만족 장군들에게 넘어가는 형태로 해체 순서를 밟았다. 그러한 과정이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황제위를 폐지한 걸로 완결된 건데, 사실 이건 서로마 지역 임페리움을 행사하는 서로마 황제위가 사라진 것이며 애초에 서로마 제국 정부 자체가 그걸로 없어진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서로마 황제위가 사라진 이탈리아의 서로마 제국 정부가 그저그런 게르만 왕국들 중 하나인 정권으로 바뀌었고 더이상 서로마 제국 지역에 권위를 행사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물론 학계에서는 이걸 ' 로마 제국'이 광대한 서방 영토를 잃은 걸로 볼 뿐이다. 공식적 사건으로서 로마 제국이 망한 건 이 전투로 아예 로마 황제위가 삭제된 이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로 파악한다. 물론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의 여러 잔존 영토는 아직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로마 황제위를 자처할 실력이나 명분이 되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동로마 제국 지역의 임페리움이 완전히 사라졌기에 망했다고 보는 것이다.[78]
8. 창작물
2012년에 개봉한 영화 < 정복자 1453>이 이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역사왜곡이 매우 심하지만 공방전 장면은 볼만 하다.전직 대한민국 국회 국회의장 김형오가 쓴 책인 '술탄과 황제'도 이 공방전이 배경이다. 황제의 일기와 그에 답하는 술탄의 비망록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뒷쪽은 작가의 이스탄불 답사기가 적혀 있는데, 작가는 정치외교학도로 사학을 전공한 인물이 아니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만화화도 되었다.
2020년 1월 24일부터 넷플릭스에서 메흐메트 2세를 주인공으로 제작한 'Rise of Empires: Ottoman', 한국 명칭으로는 ' 오스만 제국의 꿈'이 방영된다. 총 6편짜리 드라마이나, 중간 중간 사학자들이 다수 등장에 해설하는 형식이라 다큐멘터리 성격도 있다. 구글에서 검색하면 역사허구물이라고 나오는데, 비록 학자들에게 자문했지만 허구적인 요소도 많아서 그런 듯. 실제로 큰 줄거리만 역사와 일치하고 곳곳에 가공인물이 등장하거나 실제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한 부분이 많지만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한 것으로,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암군 비슷하게 만든 정복자 1453보다는 훨씬 균형 잡힌 시선을 유지한다. 여기서 마지막 재상인 루카스를 소인배처럼 묘사했고 메흐메트의 양어머니 비중을 늘렸다.
이 사건을 그린 당신은 번개처럼 오시리라(Θά 'ρθεις σαν αστραπή)라는 그리스 노래가 있다.
9. 관련 문서
[1]
1204년의 4차 십자군에 의한 함락은 sack(약탈)로 불린다.
[2]
이스탄불에 있는 파노라마 1453 박물관에 있는 그림으로 여러 화가가 그렸는데 그림은 엄청 크다. 벽 여러 면을 장식할 정도다.
[3]
다만 30만이라는 건 유럽 측에서 남긴 기록으로, 오늘날 학자들은 당연히 과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스만군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기록에 따라 제각각이고 따라서 오늘날 학자들도 다 다르게 보고 있는데, 예니체리와 메흐메트가 이끈 직속군만 따져서 5만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8만 안팎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10만쯤으로 잡는 경우도 있다. 그냥 5만~10만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4]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슬람의
유럽 진출을 막지 못한
가톨릭의 수장
교황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종교 개혁에 영향을 준다.
[5]
오스만 제국이 동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서양 상인들 대상으로 몇 배의 관세를 매기기 시작하면서 동방에서 들여오던 물자의 시세가 폭등하여
새로운 항로 개척의 욕구가 가중되었고, 결국엔
신대륙 진출의 동기가 된다. 중계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해왔던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등 전통적인
지중해
상권이 몰락하고,
스페인,
포르투갈,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 새로운
대서양 상권이 눈부시게 발전함과 동시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이후 로마-그리스계 학자와 예술가, 기술자들이 대거
이탈리아로 망명하면서
르네상스의 시작에 영향을 준다.
[6]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1453년은
백년전쟁이 끝난 해이기도 하다. 유럽 근세의 출발을 알리는 두 사건이 같은 해에 일어난 셈이라 일부 역사학자들은 1453년을 중세의 끝으로 보기도 하지만
중세 항목에도 나와있듯 중세가 끝나는 시기를 콕 집어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7]
공방전 이전 오스만은
제국이 아닌
술탄국이었다.
[8]
1383년
무라트 1세가
술탄을 칭했고, 그 이전의 오스만은 공국을 뜻하는 '베이국'으로 불렸다. '베이(bey 혹은 beg)'는
튀르크 특유의 영주 개념이라 보면 된다.
[9]
흥미롭게도 중세의 시작을 상징하는 유력한 사건들 중에는 476년의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 있는데, 서로마의 멸망으로 중세가 시작되어 동로마의 멸망으로 중세가 끝났다는
수미상관적 구조가 되어 의미가 깊다.
[10]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지역
[11]
다만 이렇게 쓰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됨과 동시에 발칸 반도 전체가 오스만의 손에 떨어진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기 이전에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 반도와 불가리아 영토를 병합했고, 이후에도
스컨데르베우가 이끄는
알바니아와
헝가리 왕이 다스리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 다만 '여파' 문단에 소개되어 있듯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오스만은 이들의 저항을 제압하기 훨씬 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12]
테오도시오스 3세의 찬탈,
콘스탄티노스 5세에 의한 수도 탈환전,
시메온 대제에 의한 수도 위협 등은 포함되지 않았고, 교차검증되지 않는 루스에 의한 공방전 등은 포함되어 '20번'으로 정리되었으나, 해외에서도 통용되는 기준은 아니다. 이러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은 기준에 따라 훨씬 많은 사건들을 포괄할 수 있으므로 애초에 'n차'라는 명칭 대신 그냥 연도로 정리하는 것이 보통이며, 가장 유명한 1453년의 공방전은 보통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불린다.
[출처]
구글맵
[14]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오레스테스가 선임 황제의 승인을 받지도 않고 멋대로 옹립한 거라 사실 정식 황제도 아니고 엄밀히는 대립 황제였다.
[15]
이런 이유로 하드리아노폴리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마지막 관문이자 동로마 제국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다.
[16]
출처: 위키피다아 영문판
[17]
그 뒤 86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은 지진으로 붕괴되어 흔적만 남게 된다.
[18]
또는 흉장(胸牆). 나무위키
공성전 항목에는 방벽이라고 되어 있으나, 방벽은 방어용 벽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므로 흉벽이 더 적합하다.
[19]
공성병기는 방향전환이 어렵다. 당시엔 지금의 자동차 앞바퀴처럼 조향장치가 없으니 상대의 공격을 받으면서 한쪽만 밀어서 돌려야 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공격지점에 가서 한 번 더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
[20]
간단히 말해 병력 갈리면서 성벽에 헤딩하러 가는 것이다.
[21]
유로파 유니버살리스 4 에서 특히 제대로 체험할 수 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시베리아 산지에 귀족 계층이 쥐고 있는 만랩 포트리스에 들이박고 5% 이상의 단위 로 뜨는 월당 소모율은 정말 묘사조차 불가능할 지경.
[22]
그리고 그 방어를 가능하게 한
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의 인품과 수비대장으로서 훌륭한 지휘를 보여준 제노바 출신 용병대장 주스티니아니의 능력은 전설로 남게 되었다.
[23]
알렉시오스 3세가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기 전에 금고를 털고 갔기 때문이다. 이후
알렉시오스 3세는 자신의 동생과 조카가 살해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이후에도 계속 십자군에 저항하다가 1204년 7월에 십자군에 체포되었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미하일 콤니노스 두카스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이후 사위인 테오도로스 1세가 다스리던 니케아 제국으로 가서 제위를 요구하나 거절당하자 룸 술탄국으로 향해 케이휘스레브 1세와 함께 니케아를 공격하지만 전쟁에서 패하며 포로로 잡혔고 장님이 된 채 수도원에 갇혀 여생을 보내게 된다.
[24]
전투 자체는 무승부였으나, 오스만 술탄국에게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둔군이 있었던 반면 세르비아에게는 남은 병사가 없었다.
[25]
이 관계는 동로마 황제
마누일 2세가 오스만에게 저항함으로써 깨어진다. 당시 오스만의 술탄이었던
바예지트 1세는 오스만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동로마를 비롯한 신하국들을 빡빡하게 대했는데, 제 아무리 오스만이 강력하다고는 해도 마누일의 입장에서는 '이건 정말 아니다'였던 것.
[26]
세르비아 기병들은
티무르에게
항복하기는커녕 마지막까지 분전했다. 오히려 오스만 술탄국에게 일시적으로 멸망당했던 튀르크계 소국들이 등을 돌렸고, 티무르는 당시의 세르비아 통치자인 슈테판 라자레비치 휘하 세르비아 기병대의 활약에 대해 '마치 사자처럼 싸웠다'고 칭찬했다. 다만 이들은 순수 세르비아인이 아닌 독일 용병들이었다.
[27]
튀르키예어 이름으로 스컨데르베우,
영어식으로 스칸데르베그라고도 한다. 본래 지방 영주였으나 알바니아의 모든 귀족들을 한데 모아 '레즈헤 동맹'을 결성하고, 오스만에게 25년 동안이나 저항했다. 오늘날에는 단 한 번도 한데 뭉친 적이 없던
알바니아를 잠시 동안이나마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은 업적이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알바니아에서는
알바니아 민족의 정체성 그 자체로 추앙받는다.
[28]
당시 헝가리 왕 울라슬로 1세는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 3세의 헝가리식 이름이다. 울라슬로는 바르나에서 전사했다.
[29]
사실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의 술탄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을 내세운 것이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바예지트 1세 사후에 아들 4형제가 내전을 벌이던 무렵에는 장남인 쉴레이만과 동맹을 맺어 상실한 영토 일부를 일시나마 수복한 적이 있었으며,
무라트 2세가 즉위했을 당시에는 무라트에게 삼촌이 되는 무스타파를 지원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30]
다만 이미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쳐들어올 때를 직감하고 도박수를 던진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이 '도박'을 해서 잘 되어봤자 얻을 거라고는 메흐메트 2세의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으로 차후 침공의 시기를 늦출 수 있다는 것 하나뿐인데, 애초에 이 짓을 저지름으로써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언제든 외교적 술책을 통해 우리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려고 드는, 미약하지만 가증스러운 적"이라는 이미지를 오스만 베이국 내 모든 세력에게 각인시켰기에 과연 얼마나 다음 침공을 미룰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굳이 그런 도박수가 없더라도 애초에 오스만 베이국은 마누일 2세 이전의 팔레올로고스 치하 동로마가 연상될 정도로 정쟁이 빈발하고 내부 정세가 꽤나 불안정한 나라였으며, 한참 전 양측의 실책 덕분에 관계가 최악이던 서방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동로마와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었다. 즉 그 순간이 오스만에게는 공격의 타이밍이고 동로마에게는 침공을 늦출수록 유리한 마당에 명분을 오히려 준 건 옹호할 거리가 전혀 되지 못한다. 이걸 도박수라고 옹호해줄 거면
병자호란의 침공 시기를 앞당긴
인조의 대청 선전포고문도 비슷하게 도박수라고 옹호를 받아야만 한다.
[31]
1444년의
바르나 원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32]
그때는 '비잔티움 제국'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33]
실제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오스만 술탄들은 모두
로마 황제를 자칭했다.
[34]
풀이를 하면 '로마 땅(Rumeli)의 요새(Hisarı)'라는 뜻. 오스만은 자신들이 점령한 동로마 제국의 유럽쪽 영토를 '로마인이 살던 곳'이라는 뜻에서 '루멜리(روم ايلى/Rumeli)'라고 불렀다. 당대 사람들이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식한 증거 중 하나.
[35]
마지막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콘스탄티노플 맞은 편, 즉 갈라타(페라)에 제노바 자치구가 존재하긴 했고 흑해에도
제노바 식민지가 있었지만 당시 제노바는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론 끝까지 중립을 지켰고, 오스만 술탄국도 중립을 인정한 상태였다. 공방전 당시 갈라타에서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알음알음 이런 저런 소규모의 지원을 하긴 하지만 공식적인 지원은 아니었으며, 그나마도 메흐메트 2세가 금각만에 함대를 들여보낸 뒤로는 완전히 끊긴다. 즉 보스포루스 해협의 요새들은 제노바를 견제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고 실제로 제노바는 당시에 오스만이 굳이 견제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었다. 그보다 콘스탄티노플 시가지 내부에 자치구를 가지고 있으며, 오스만의 해상 봉쇄를 단독으로 뚫어낼 여력도 있는 해상 강국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 또는 만에 하나 십자군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그 외의 서유럽 세력 견제가 요새의 주 목적이었다. 그런 목적의 견제를 떠나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제하는 것은 1차 세계대전까지도 이어지는 오스만의 가장 큰 전략 목표 그 자체였다.
[36]
동맹은 동방
정교회가 교황의 아래에 복속되는 것이 조건이었는데,
동로마 제국의
재상이었던
루카스 노타라스는 이 협상을 주도하고
교황청과의 동맹을 성립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조건에 대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라틴인의
추기경 모자로 뒤덮이는 것을 보느니
술탄의
터번을 보겠다."는 말을 남겼다. 노타라스는 공방전 동안 황제를 보좌했으나 동로마 패망 직후 메흐메트 2세에게 처형되었다.
[37]
1204년 4차 십자군의 전례가 있었던 만큼 노타라스 같이 저 모친상실한 교활한 라틴인에게 고개 숙이느니 차라리 이교도에게 정복당하고 말겠다고 생각하며 서방 주도로 이루어진
피렌체 공의회를 반대하는 세력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각계에 퍼져 있었다. 훗날 오스만 치하 첫 번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되는 철학자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Γεννάδιος Σχολάριος)를 비롯하여 이러한 반서방-친오스만 파 사제, 귀족, 관료들은 오스만의 정복 이후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자리 잡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38]
동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게 여러 모로 낫지만, 이미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교역 상대였던 오스만을 대놓고 적대할 수도 없었기 때문. 실제로 이들은 공방전이 끝난 뒤 오스만에 사절을 파견하면서, '공방전에 참가한 베네치아인은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 그러한 것이며 본국 정부와는 무관한 일'임을 주장했다.
[39]
그는 방어전의 전문가로 이름 높았다.
[40]
영문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1453년 당시 예니체리의 수는 1만 명 미만이었는데, 말 그대로 총력을 기울였다고 보면 되겠다. 이 점은 오스만의 지방 총독은 그 지방의 군사 지휘까지 맡았으며, 당시 최고 지방 총독이었던 루멜리아 대총독과 아나돌루 대총독이 모두 참전했다는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41]
이런 사항은
동양의
중국사에서도 흔히 발생하는데, 한 예로 17세기 무렵
명나라를 멸망시킨
농민 반란군 지도자인
이자성의 군대도 말로는 100만 명이 넘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전투에 직접 참가하는 병사들은 전체 인원의 10%인 10만 명 가량이었고 나머지 인원은 식사와 치료와 무기 수리 같은 잡다한 일을 해주는 비전투원이었다.
[42]
50m 밖에 있는 콘크리트 블럭을 쌓아만든 표적에 측정기를 달았기 때문에 당시 기술 상 성벽에 도달할 무렵이면 위력은 더욱 줄었을테고, 탄체의 기술력 차이로 진짜로 현대 전차를 관통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근거리라 할지라도 당시 기술로 5세기 뒤의 전차의 주포의 위력에 버금갈 정도면 결코 얕볼 무기는 아니다.
[43]
독일인이라는 주장과
루마니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44]
이후 그는 공방전에도 참전하여 대포의 각도를 맞추는 등 활약하지만, 공방전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학자들은 공방전 도중에 대포가 폭발했고(당시의 조악한 야금 기술과 눈대중으로 조절하던 장약, 크기가 들쭉날쭉한 포탄 때문에 실제로 종종 있었던 일이다), 그에 휘말려 죽었다고 본다.
[45]
함선 자체가
베네치아나
제노바의 배를 보고 급조한 것이라 크기가 작았으며, 아직 함포가 주력으로 쓰이지 못하고 선상 백병전을 벌이던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함선의 높이가 낮다는 건 엄청난 약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오스만 함대의 주요 역할은 육군을 수송하거나 섬이나 해안 도시를 공격할 때 육군을 보조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기 때문에, 해양 무역국인 베네치아나 제노바의 상대가 못 되는 게 당연했다.
[46]
'완전 점령이 아닌 제패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정복'이었기에 오스만이 그렇게 빨리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완전 정복보다 일단 제압해 두고 신하국으로 삼는 게 반발이 더 적기 때문이다.
[47]
오스만 왕족에게 방위를 맡긴다고 하면 위험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오스만에서는 왕위에 오르는 자가 자신의 형제들을 몰살하는 관습이 있었다. 즉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 그는 죽은 목숨이기에 콘스탄티노스 황제와 함께 사력을 다해 막으려 했고, 실제로 함락 이후 붙잡혀 목이 날아갔다.
[48]
1453년 당시는
세르비아가 오스만에 굴복한 상태였고
불가리아 제2제국은 40년 전에 멸망한 상태였다. 오히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오스만군은 대포를 사용하는 한편 성벽 아래로 갱도를 판 다음 화약을 폭발시켜 성벽을 파괴하려는 등 상당히 뛰어난 공성 전법을 사용했으며, '요새 공성전을 30년간 진행한 적도 있고' 라는 부분도 있었으나 이는
오스만 1세 때. 즉 오스만이 막 창건되었을 당시의 일일 뿐만 아니라 처음 공격했을 때부터 최종적으로 함락시킬 때까지를 모두 합한 기간이다. 이렇게 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도 수십년 걸린 셈이 된다. 요컨대 당시 오스만의 '공성전의 역사' 는 충분히 길었으며, 수비측도 '외부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면 이긴다' 라는 생각이었지 '튀르크족 따위 별것 아니니까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49]
다만 성벽에 제대로 명중하면 그야말로 '박살' 이었으므로, 수비군은 낮에는 적군과 싸우고 밤에는 성벽을 수리해야 하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수비군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조금씩 한계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우르반 거포는 기대치까지는 아니었지만 밥값은 한 셈이다.
[50]
당시 오스만 측이 동원한 함선은 30여 척이나 되었는데 겨우 4척의 적함에게 쩔쩔맨 꼴. 이 사태에 화가 날 대로 난 메흐메트는 쉴레이만 발타오울루를 당장 끌어내어 참수하라고 명령했지만 고관들은 물론 쉴레이만의 부하들까지도 대충 싸운 게 아니라 쉴레이만 본인도 부상당했을 정도로 열심히 싸웠는데도 그 모양이 된 것이라고 변호했고, 결국 메흐메트는 그렇다면 쉴레이만의 모든 작위와 재산을 박탈하고 그 재산은 예니체리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령했다.
[51]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오스만 해군의 전함은 기껏해야
갤리선의 수준을 조금 넘는 것들이었지만 동로마 함선은 원시적인
갤리온이었기 때문이다.
[52]
이처럼 배가 산으로 간 전례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5년 전에 육지로 함선을 옮기는 작전을 쓴 적이 있었고, 오늘날 학자들 가운데에는 메흐메트가 여기에서 착안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또 그리스 신화의 내용이기는 하지만 황금 양털로 유명한
이아손과 선원들이
아르고 호를 등에 짊어지고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알제리까지 행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53]
원래 작전은 베네치아인들만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시 제노바인들 가운데에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과 밀통하는 자들도 있었기 때문. 하지만 베네치아의 작전에 대해 전해들은 제노바인들은 자기네들도 끼겠다고 항의했고, 제노바 함선 세 척이 오스만 함대 수십 척을 상대로 멋지게 싸웠던 것을 기억하는 황제 콘스탄티노스는 베네치아에 제노바도 끼워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황제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한 베네치아는 제노바도 끼는 것으로 했지만,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54]
원문 - Τὸ δὲ τὴν πόλιν σοῖ δοῦναι οὔτ' ἐμὸν ἐστίν οὔτ' ἄλλου τῶν κατοικούντων ἐν ταύτῃ• κοινῇ γὰρ γνώμῃ πάντες αὐτοπροαιρέτως ἀποθανοῦμεν καὶ οὐ φεισόμεθα τῆς ζωῆς ἡμῶν. 본문의 내용은 이
영어 번역문을 토대로 글 내용에 어울리도록 좀 더 매끄럽게 번역했다. Giving you though the city depends neither on me nor on anyone else among its inhabitants; as we have all decided to die with our own free will and we shall not consider our lives.
[55]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달이 떠있는 동안 함락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런데 보름달이 떠야할 날에 월식이 일어났으니 사기가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56]
이 밖에도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꼭대기에 붉은 빛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다른 모든 징조들과는 달리 이 불빛은 오스만 측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다. 즉 오스만군의 눈에도 보였다는 말인데, 이 빛은
1452년 혹은 1453년 발생한 위치 불명의 대규모 화산폭발이 남긴 여파로 여겨진다.
[57]
라틴인과 로마인이 서로 구별 및 병치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58]
Jose Daniel Cabrera Peña라는 사람이 CGsociery에 올린 그림이다. 무장 방면에서 고증이 훌륭하다.
[59]
이것도 성벽을 완전히 점령해서 세운 게 아니고, 50여 명의 예니체리가 들어와 방어탑을 점령했다가 동로마 군에게 추격당하며 여기저기로 흩어졌는데, 예니체리 중 한명이 혼자 성벽 위에 세워 버린 것이다.
[60]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먼저 마지막 전투에서 콘스탄티노스는 배수진을 친다는 생각으로 내성으로 통하는 모든 문을 걸어 잠그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교전 중에 조반니 주스티니아니가 치명상을 입어 후송되었는데, 황제 다음으로 육군을 총지휘하던 인물이 후송되자 수비군들의 사기가 완전히 꺾였다.
[61]
이후 이들은 황제가 있는 메소티히온 성벽으로 몰려가, 메소티히온 수비군은 앞과 옆에서 동시에 공격받는 형태가 된다. 베네치아 측 사료에서는 주스티니아니의 후송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이어졌다고 되어 있으나, 오늘날 학자들 가운데에는 수비군이 협공을 받은 때야말로 도시의 함락이 결정되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62]
이 전공으로 인해, 울루바틀르 하산은 평범한
시파히 병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튀르키예의 민족 영웅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그 정도 급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 때문에 아래의 '평가와 의의' 문단에 언급되는
튀르키예 영화 <정복자(Fatih) 1453>에서는 메흐메트 2세의 최측근이자 무술 스승으로까지 그려지는데, 생전의 그가 누렸던 지위에 비하면
주인공 버프를 받아도 제대로 받은 것이다.
[63]
콘스탄티노스 11세 항목에 소개되어 있지만, 그가 전사하지 않았다는 사료도 있다. 공식적으로 황제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스만 측 사료에는 겁을 먹고 도망치려다가 죽었다고 되어 있고,
서유럽 측 사료에는 오스만군이 성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목을 맸다고도 되어 있다. 또 공방전에 직접 참가했던
피렌체의 상인 자코포 테달디는 '누구는 그가 자결했다고 하고 또 누구는 참수당했다고도 하는데, 아마 자결한 다음에 목이 잘린 거 아닐까' 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나 모두 야사에 불과하다.
[64]
3차(마지막) 공격대이자 오스만 최정예부대인
예니체리까지 투입했다. 이 말은 1차와 2차 공격대가 성벽을 돌파하지 못했다는 뜻. 적든 많든, 성벽 돌파에 지장이 가는 피해였을 것이다.
[65]
Routh, C. R. N. They Saw It Happen in Europe 1450-1600 (1965)에 나온 목격 증언
[66]
다만 교회 일치를 반대했던 예나디오스는, 공방전 훨씬 이전부터 '
제국을 지키고
종교가 더럽혀지느니 차라리
참 종교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오스만 제국을 470년 동안 섬기는 대신 정교 신앙을 지키는 게 그가 원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밀레트 제도를 고안하는 등 종교적으로 폭넓은 관용을 베풀었으므로, 근대에
내셔널리즘이 발흥하기 전까지
구 동로마인들은 '
무슬림 황제'의 지배에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로 사실상의 황태자였던 메시흐 파샤(Mesih Paşa)가 황제 메흐메트의 시동이 되어 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가 나중에 재상까지 오른 것이, 지배에 반발하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 있는 좋은 예다.
[67]
국외에 파견해서 현지 베네치아 상인의 이익을 대변하고 외국 정부와의 외교 관계를 조율하던 관리. 현대의 외국 주재 대사, 영사와 유사하다.
[68]
1366년부터 1367년까지
사보이아 백국의
아메데오 6세가 이끈 사보이아 십자군(Crociata sabauda)이 바로 이런 케이스다.
[69]
마치 교황이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에게 서로마 황제를 대관한거랑 비슷하다.
[70]
다만 오르한의 뒤를 이은 술탄
무라트 1세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어서, 철저히 혈통적으로만 따지고 보면 메흐메트의 몸속에 로마 황실의 피는 흐르지 않았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버트리스 스몰'의 '아도라'이다. 이와 별개로 오스만 왕실을 제외한 오스만 지배층은
그리스인 등 발칸 반도 토착민들과의 통혼이 잦았기 때문에, 오늘날 오스만 왕위 요구자 가문은 그리스인의 피가 흐르기는 한다.
[71]
실제로 메흐메트 2세 치세 오스만의 마지막 군사 원정이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오트란토를 점령한 것이었다. 이는 당연히 로마 시(市) 진격을 위한 것이었다.
교황을 비롯한 유럽 각지의
군주들도 그렇게 받아들였으나, 이듬해에 메흐메트가 세상을 떠나면서 군사 대부분이 철수하는 바람에 금세 탈환되었다.
[72]
19세기 중엽 이전까지 오스만의 지방행정단위는 현대 미국의 주 정도 자율권과 자치권이 있는 에얄레트(Eyalet)와, 그 밑에 에얄레트를 맡아 다스리는 지방관인 베일레르베이(beylerbey)의 통솔을 받는 군부대가 관리하는 군구인 산작(Sancak), 그리고 산작이 주둔하지 않는 향촌 지역은 부족장이나 현지 유력자들이 자치하는 형태였다. 여기서 에얄레트의 사법권은 지방 법관이 행사했으나, 베일레르베이는 관할 구역에 대한 행정권과 군사권을 행사했다.
[73]
1453년 이래 오스만 황제들이 주로 사용한 칭호는
페르시아어로 '왕들의 주인'을 뜻하는 '파디샤'였고, 기존 군주의 칭호였던 술탄은 황족이나 고위 귀족에게 하사하는 명예직이 되었다.
한자문화권에서 기존
천자의 칭호였던
왕이
진시황 이후부터 황족 또는
제후의 칭호가 된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79]
[74]
원래 토마스가 통치자였는데,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디미트리오스를 공동 통치자로 삼으라고 명령했다. 콘스탄티노스가 즉위하기 이전에 디미트리오스는 제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동서 교회의 통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내세우며 콘스탄티노스의 즉위에 딴지를 걸었는데, 이들 형제의 모후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준 덕에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는 언제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는 동생을 수도에 계속 둘 수 없다고 판단하여, 모레아로 보낸 것.
[75]
이는 사실 명분에 불과했고, 배후 조종자가 따로 있었다. 원래 모레아는 황제
요안니스 6세가 창건했는데, 그는 팔레올로고스 황가가 아니라 칸다쿠지노스 가문에 속했다. 그러다 보니 이후 모레아는 칸다쿠지노스 가문이 다스렸는데, 후에 칸다쿠지노스 가문의 황제들이 폐위된 이후 팔레올로고스 황가의 군대가 모레아를 점령, 칸다쿠지노스 통치자를 몰아냈다. 그리고 그 후손은 대대로 앙심을 품고 있다가, 이때 반란을 배후조종한 것.
[76]
그리스 땅인 모레아 반도에 왜 알바니아계 주민이 있냐면 1300년대 후반 모레아의 통치자인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가 모레아 경제를 일으켜 세워보겠다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모레아 이주를 적극 장려했던 것.
[77]
그 때문에 터키에서는 이 영화를 아주 싫어했다.
[78]
비슷한 경우로 주나라도 동주공국은 주왕실이 폐지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존속했지만 망한 건 서주공국과 주왕실이 폐지된 때로 보며, 신라도 경순왕의 개경 입조 및 귀부로 망했다곤 하지만 한동안은 경순왕이 고려의 사심관으로서 이전과 전혀 변동 없이 서라벌을 통치하고 있었다. 신라 또한 마찬가지로 신라 왕이라는 그 당시의 고려 제후왕 지위마저 없어진 것을 멸망으로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