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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코소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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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코소보 전투
헝가리어: Rigómezei cs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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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미로 헝가리 기사를 사로잡은 아큰즈[1]
시기 1448년 10월 17일 ~ 10월 20일
장소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코소보 평원
원인 바르나 전투의 참패를 설욕하려는 후녀디 야노시의 공세와 무라트 2세의 맞대응
교전국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383-1453).svg.png 오스만 제국
(오스만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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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383-1453).svg.png 무라트 2세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383-1453).svg.png 메흐메트 2세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383-1453).svg.png 다이 카라카 베이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383-1453).svg.png 투라한 베이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383-1453).svg.png 이오즈구로글루 이사 베이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516-1526).svg.png 후녀디 야노시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516-1526).svg.png 프랑코 탈로바크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516-1526).svg.png 실라지 미하이
병력 50,000~60,000명 30,000명
피해 8,000 ~ 10,000명 궤멸
결과 오스만 술탄국의 승리.
영향 오스만 술탄국 발칸 반도 확장 가속화.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clearfix]

1. 개요



1448년 10월 17일 ~ 10월 20일, 오스만 술탄국의 술탄 무라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 왕국군이 코소보 평원에서 맞붙은 전투. 오스만 술탄국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발칸 반도로의 확장을 가속화했다.

2. 배경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분전했지만 십자군의 완패와 헝가리와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의 전사를 막지 못한 헝가리 왕국의 실권자 후녀디 야노시는 헝가리로 귀환한 뒤 1445년 헝가리 의회로 부터 질서 유지를 담당하는 총독 7인 중 한 명으로 선임된 후 트란실바니아와 주변 일대의 절대 권력자로 등극했다. 그해 가을, 야노시는 왈라키아 공국과 동맹을 맺고 부르고뉴 함선의 지원을 받아 다뉴브 강 하류에 대한 습격 작전을 이끌어 니코폴리스 탈환 작전에 착수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5세가 헝가리로 쳐들어와 7월 말까지 쾨세그를 포함한 헝가리 서쪽 국경의 12개 요새를 공략했고, 첼레 백국은 슬라보니아를 침공해 1445년 말에 정복하자, 헝가리 의회는 1446년 6월 6일 후녀디 야노시를 섭정으로 선임해 왕국의 운명을 맡겼다.

1447년, 후녀디 야노시는 프리드리히 5세와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이름으로 왕국 북서부를 점령하고 있던 보헤미아군 용병대장 얀 이스크라와 협상해 평화 협약을 맺은 뒤, 갈수록 강성해지는 오스만 술탄국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다. 그는 교황청과 서유럽의 여러 열강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다만 아라곤 왕국 나폴리 왕국의 국왕인 알리폰소 5세로부터 그가 용병 16,000명을 모집하는 데 들어가는 10만 플로린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며, 당시 오스만 술탄국을 상대로 독립 투쟁을 벌이던 스컨데르베우와 동맹을 맺었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왈라키아 공국으로부터 보조군을 지원받았다. 그는 헝가리 전역에 특별세를 부과했고, 전쟁 물자를 최대한 끌어모아 총 2,000대의 수레에 실었다.

1448년, 후녀디 야노시는 보병 7,000명, 왈라키아 출신 경기병 8,000명, 중기병 15,000명으로 총합 3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켰다. 그는 스컨데르베우와 연합한 후 오스만 제국군을 회전에서 맞붙어 바르나 전투의 패배를 되갚으기로 마음먹고, 그해 9월 다뉴브 강을 도하했다. 당시 헝가리 왕국과 알바니아 사이에는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다스리는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이 있었다. 후녀디 야노시는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수도 스메데레보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군영을 세운 뒤, 한 달 동안 알바니아, 독일, 왈라키아, 보헤미아 동맹군이 추가로 합류하기를 기다리면서 주라지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주라지는 라구사 공화국 출신의 재무장관 파스코 소르코비치를 통해 후녀디에게 군대가 통과하는 걸 동의하겠다고 밝혔지만, 오스만 술탄국에 함께 대응하자는 후녀디의 요청을 거부하고 중립을 고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당시 알바니아에서 스컨데르베우를 지지하는 크루자 요새를 포위 공격하던 술탄 무라트 2세에게 후녀디가 세르비아 영토를 침범했으며, 조만간 오스만 술탄국의 발칸 본토를 침공하려 한다고 보고했다.[2]

후녀디 야노시는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자기에게 잘 협조하지 않는데다 무라트 2세에게 기밀을 누설한 정황을 입수하자, 모라바 계곡을 철저히 약탈한 뒤 크루세비츠와 토플리카를 통과해 코소보로 이동했다.[3] 한편, 무라트 2세는 후녀디의 움직임을 알아챈 뒤 그에게 당장 맞서기에는 전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물자를 비축하고 지원군을 확보하기 위해 소피아로 후퇴했다. 소피아에서 필요한 식량을 모으고 있을 때, 왈라키아군이 다뉴브 강을 건너 니코폴리스에 있는 오스만군 진지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무라트 2세는 아큰즈 부대를 파견했고, 이들은 왈라키아군을 매복 공격해 많은 적병을 생포해 소피아로 보내 아군의 사기를 진작했다. 이 무렵, 스컨데르베우는 후녀디와 합류하기 위해 북상했지만, 후녀디에게 악감정을 품은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길목을 차단하는 바람에 더 이상 이동하지 못했다. 결국 후녀디는 단독으로 오스만 제국군과 상대해야 했다.

3. 전투 경과

1448년 10월 17일, 후녀디가 이끄는 3만 군대는 코소보 평원에 도착했다. 그는 곧 오스만 제국군 50,000 ~ 60,000명이 인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무라트 2세가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기에 깜짝 놀랐다. 무라트 2세는 전투를 벌이기 전 후녀디에게 평화를 제안하는 특사를 보냈지만 거절당했고, 양군은 곧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무라트 2세는 예니체리와 보병대, 포병대 등으로 구성된 중앙 부대를 통솔했고, 당시 16세였던 아들 메흐메트 왕자는 우익에 편성된 루멜리아 시파히 부대의 명목상 지휘관을 맡았고 실질적인 지휘는 루멜리아의 베일러베이인 다이 카라카 베이가 이끌었으며, 투라한 베이가 이끄는 아크즈 부대가 우익 선봉에 편성되었다. 좌익에는 아나톨리아 베일러베이인 이오즈구로글루 이사 베이가 지휘하는 아나톨리아 시파히를 지휘했다.

이에 대항하는 후녀디의 군대의 진형은 명확하지 않다. 중앙에는 후녀디의 기병대가 편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보병대는 쇠사슬로 묶인 수레들이 세워진 플레멘티나 언덕을 뒤에 둔 채 편성되었다. 이 전투 수레에는 소구경 대포가 장착되어 있었기에, 후방에서 아군을 위해 엄호 사격할 수 있었으며, 적의 공세에 몰린 아군의 피난처 역할을 수행할 것이었다. 양익에는 각종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경기병대는 전방에 배치되었으며, 왈라키아 보조군도 포함되었다. 안토니오 본피니에 따르면, 헝가리군은 38명의 반데리아로 구성되었으며, 각 부대는 자체 지휘관의 지휘를 받았다. 양익을 지휘한 지휘관이 누구인지에 대한 신뢰할 만한 기록은 없다. 다만 후녀디의 처남 실라지 미하이, 크로아티아의 전 반 프랑코 탈로바크가 참여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양군은 10월 17일 정오까지 대치하기만 할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헝가리 기병 한 명이 대열에서 나와 결투를 신청했다. 이에 엘리아스라는 오스만 전사가 응했고, 두 사람은 한동안 결투를 벌였다. 그러던 중 헝가리 기사가 낙마했지만, 엘리아스의 안장이 충격으로 인해 말의 꼬리 쪽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엘리아스가 몸을 가누길 힘들어 해서 그를 사살하지 못했다. 헝가리 기사는 곧 말을 다시 탔고, 두 사람은 서로 승패를 내지 못한 채 귀환했다. 그날 오후, 후녀디는 경기병과 중기병을 혼합한 부대로 오스만 제국의 측면을 찔러봤다. 그 결과 양측 모두 상당한 손실을 입었지만 전투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날 밤, 오스만 진영에서 탈영한 다비드라는 사람이 후녀디를 찾아와서 오스만군이 방심하고 있으니 기습하라고 권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한밤중에 오스만군을 기습해 상당한 피해를 입혔지만, 예니체리가 재빨리 대응하면서 아군의 손실도 커지자 새벽에 군대를 언덕으로 되돌렸다.

10월 18일, 양군은 오전부터 본격적인 전투를 벌여 저녁까지 이어갔다. 그러던 중 좌익과 우익의 헝가리 기병대가 루멜리아와 아나톨리아 기병대를 성공적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을 목격한 후녀디는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적을 허물 수 있을 거라 판단하고, 즉시 중앙에 배치된 중무장 기병대를 이끌고 적 중앙 대열로 돌격했다. 이에 오스만 군은 화살을 비오듯 퍼부어 적의 돌격을 방해한 뒤, 일부러 적 중기병들이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 덕분에 후녀디의 중무장 기병대 선두 부대가 적 본영 코앞까지 이르렀지만, 그 진영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짐과 마차 때문에 더 이상 이동하기 힘들었다. 그 사이, 길을 일부러 열어줬던 튀르크 보병대가 적 기병대 뒤에서 골격해 군마의 미처 무장되지 않은 엉덩이 부분을 찔러 도살했다. 이에 동요한 헝가리 기병대는 달아나려 했지만, 뒤에서 따라오던 아군과 뒤섞이면서 서로를 짓밟는 등 대혼란에 휩싸였다. 말을 잃은 기병 일부는 근처 마을로 피신했지만, 튀르크군이 마을을 불지르는 바람에 섬멸되었다.

한편, 적 좌익과 우익을 성공적으로 돌파하는 듯했던 헝가리 측면 기병대들의 상황 역시 악화되었다. 투라한 베이가 이끄는 아크즈 부대가 아군 대열을 돌파하려던 헝가리군 좌익의 후방을 급습했다. 여기에 왈라키아 병사 8,000명이 전세가 불리해진 걸 확인하자마자 오스만군 편으로 넘어가 버렸고, 이에 동요한 헝가리 좌익 부대는 붕괴되었다. 사료에는 헝가리 우익 기병대에 대해 전혀 언급되지 않는데, 그들이 심각한 저항 없이 항복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해서 헝가리 기병대가 와해된 뒤, 튀르크 보병대가 헝가리 보병대를 덮쳤다. 헝가리 보병대는 황혼까지 언덕 위에서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수적 열세로 인해 쇠사슬로 묶은 수레 대형으로 후퇴한 뒤 마차에 장착된 대포의 엄호 아래 적의 공세를 겨우 격퇴했다.

10월 20일, 오스만 제국군이 최후의 공세를 개시했다. 헝가리 보병대는 수레에 의지해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예니체리의 맹공에 버티지 못하고 끝내 궤멸되었다. 중기병대를 이끌고 적 중앙 대열을 몸소 공격했던 후녀디의 이후 행방에 대해, 일부 사료는 수레로 후퇴한 뒤 장병들을 지휘했다가 끝내 지키지 못하자 간신히 탈출했다고 하고, 다른 사료들은 수레로 복귀하지 못하고 세르비아로 도주했다고 전한다. 학자들은 그가 수레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는 게 거의 불가능했을 거라 보고, 세르비아로 도주했다는 기록이 신빙성 높다고 본다.

4. 결과

헝가리군은 이 전투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안토니오 본피니에 따르면, 시트니차 강에는 물고기가 아니라 시체가 넘쳐 흘렀다고 한다. 정확한 피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최소 8,000명, 최대 17,000명이 목숨을 잃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또한 프랑코 탈로바크를 비롯한 헝가리의 수많은 기사들이 전사했으며, 실라지 미하이, 세바스티앙 로즈고니 등이 생포되었다. 오스만 제국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이나, 학자들은 당대 서구측 연대기에서 밝인 수만에 달하는 사상자는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하고, 8,000 ~ 10,000명 사이였을 거라고 본다.

패잔병들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도주했다. 일부는 제타로, 일부는 라구사로 피신했고, 후녀디 본인은 마르틴 프랑코판 백작과 기병 200명을 대동한 채 세르비아로 도주했다. 그러나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모라바 계곡을 심각하게 약탈한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기 때문에, 후녀디는 말을 죽인 뒤 숲길을 통해 몰래 이동해야 했다. 그러다가 클라도보 인근에서 세르비아인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된 뒤 주라지 앞으로 끌려왔고, 주라지는 후녀디를 지하 감옥에 가뒀다. 이후 헝가리 측이 사절을 보내 후녀디의 석방을 요구하자, 주라지는 아래의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1. 헝가리 왕국은 세르비아인에게 보복하지 않는다.
2. 헝가리 왕국은 적에 맞서 세르비아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3, 헝가리군은 앞으로 세르비아인의 초대나 도움 없이는 세르비아를 통과하지 않는다.
4. 후녀디는 세르비아 땅에 발생한 피해에 대해 100,000두카트를 지불한다.[4]
5. 이전에 브란코비치 가문의 소유였지만 1444년 후녀디에 의해 몰수된 헝가리 내 모든 재산을 주라지에게 반환해야 한다.
6. 후녀디의 장남(후녀디 라슬로)는 아버지가 약속을 이행할 때까지 주라지의 인질로 남아야 한다. 또한 주라지의 딸을 후녀디의 아들과 결혼시킨다.

그 후 헝가리 왕국은 오스만 술탄국의 발칸 반도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공세를 벌일 여력이 없었고, 다른 기독교 발칸 국가들도 오스만 술탄국에 정면 대결해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접었다. 오스만 술탄국은 적이 소극적인 태도로 전환한 틈을 타 본격적으로 발칸 반도 각지로 팽창했고, 그 결과 10년 사이에 동로마 제국 멸망,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보스니아 왕국 정복 등을 달성했다. 그렇지만 후녀디 야노시는 1456년 베오그라드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군 10만 명을 격파하고 숨을 거둘 때까지 헝가리를 끝까지 사수했고, 스컨데르베우는 146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공세를 꿋꿋이 버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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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kıncı. '돌격하는 자'라는 의미로, 오스만 제국군에서 약탈이나 공급을 담당하는 경기병. [2] 나폴리 왕국의 수도사이자 십자군 선동가 카피스트라노의 요한은 교황 갈리스토 3세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가톨릭의 불신자이자 적이라고 지칭했으며, 이탈리아 역사가 안토니오 본피니는 브란코비치가 매일 술탄에게 헝가리군의 작전에 대해 알렸다고 기술했다. [3] 이때 후녀디 야노시가 코소보로 이동하면서 지나간 협곡은 그의 이름인 야노시에서 따온 얀코 계곡라고 일컬어진다. [4] 헝가리 연대기는 이를 피해 보상이 아니라 후녀디에게 걸린 몸값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