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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슬루이 전투 루마니아어: Bătălia de la Vaslu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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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475년 1월 10일 | |
장소 | 몰다비아 공국 바슬루이 | |
원인 | 슈테판 3세의 킬리야 공략 및 왈라키아 공국 침략을 응징하려는 메흐메트 2세의 의지 | |
교전국 | 몰다비아 공국 | 오스만 제국 |
지휘관 | 슈테판 3세 | 하딤 술레이만 파샤 |
병력 |
몰다비아인 30,000명 세켈리인 5,000명 왈라키아인 2,000명 폴란드인 2,000명 헝가리인 1,800명 대포 20문. |
오스만 제국 기병 30,000명 보병 수만 명 왈라키아인 17,000명 |
피해 | 미상 | 40,000명 |
결과 | 몰다비아 공국의 승리. | |
영향 | 슈테판 3세의 명성 급상승, 메흐메트 2세의 복수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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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75년 1월 10일, 슈테판 3세가 이끄는 몰다비아 공국군이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한 전투.
2. 배경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인 킬리야 시와 체타티아 알바 성이 있는 부자크 일대는 다뉴브 강에서 흑해로 이어지는 무역로의 주요 거점이었다. 본래 왈라키아 공국에 속했지만, 14세기 후반에 몰다비아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1432년 1월 몰다비아 제10대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1세가 사망한 이래 오랜 내전으로 몰다비아가 혼란에 빠진 동안 왈라키아에 돌아갔고, 킬리야는 헝가리와 왈라키아가 공동 통치했다. 1465년 1월 24일, 몰다비아 제19대 보이보드 슈테판 3세가 킬리야 시를 탈환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부자크 일대를 확보하려 하면서 상황이 심각해졌다.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는 흑해의 주요 항구 거점인 부자크를 확보하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기반삼아 몰다비아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폴란드 왕국 및 헝가리 왕국을 향해 수로를 통한 공세를 벌일 중요한 전력적 거점으로 삼을 수 있다고 여겼다. 당대의 일부 독일 연대기에 따르면, 메흐메트 2세는 몰다비아를 요새로 삼고 그곳에서 폴란드와 헝가리 왕국에 대한 대한 공격을 시작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한편 몰다비아가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코스탄티니예와 15~20일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점도 그 나라를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메흐메트 2세의 야망을 부추겼다.
역대 몰다비아 보이보드들은 강대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두려워해 매년 2,000 두카트를 공물로 바쳤고, 슈테판 3세 역시 재위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에게 공물을 계속 보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가 칼리야를 공략한 그의 행위를 문제삼으며, 킬리야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인 왈라키아 공국의 소유이니 당장 넘기라고 요구하자, 슈테판 3세는 킬리야를 온전히 가지려면 오스만 제국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공물을 3,000 두카트로 늘렸고, 코스탄티니예에 사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1471년,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3세가 킬리야 요새를 공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슈테판 3세는 이참에 오스만 제국의 충실한 봉신인 라두 3세를 축출하기로 마음먹고, 1472년 바사라브 3세를 섭외했다. 1473년 11월, 슈테판 3세의 몰다비아군과 바사라브 3세가 고용한 용병대가 밀코프 강을 건너 왈라키아로 진격했다. 그 해 11월 18일에서 20일 사이, 라두 3세는 프라호바의 게르기차 인근에서 침략군과 맞섰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부쿠레슈티 성채로 피신했다. 이후 한동안 농성하던 그는 보이보드들이 대거 침략군에 가담했다는 걸 알게 되자, 11월 23일 밤에 다뉴브 강변 오스만 제국 요새인 지우르지우 요새로 피신했다.
1473년 11월 28일, 라두 3세는 13,000명의 오스만군과 함께 왈라키아를 탈환하려 했지만 몰다비아군과 6,000가량의 왈라키아군이 연합한 바사라브 3세 휘하 군대에게 격파되었다. 12월 23일, 라두 3세는 다시 30,000 가량의 오스만군의 선두에서 다뉴브 강을 건넜다.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지 못한 바사라브 3세는 몰다비아로 피신했다. 1474년 3월,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은 바사라브 3세가 라두 3세를 일시적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라두 3세는 몰다비아군이 철수하자마자 반격해 바사라브 3세를 도로 몰아냈다. 1474년 여름,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은 바사라브 3세가 라두 3세를 재차 몰아냈다. 바사라브 3세는 라두 3세가 재차 공격할 것을 우려해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이슈트반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재빨리 왈라키아로 진군했지만, 바사라브 3세가 아닌 그의 사촌 바사라브 4세를 옹립하려 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바사라브 3세와 2차례 맞붙었는데,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두 번째 전투에서는 격파했다. 한편, 슈테판 3세의 몰다비아군은 라두 3세를 지지하던 텔레아젠 요새를 며칠만에 함락하고 수비대를 학살하고 성채를 불태웠다.
슈테판 3세가 이렇듯 충실한 봉신인 라두 3세를 계속 축출하고 바사라브 3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앉히려 들자, 메흐멘트 2세는 몹시 격분했다. 게다가 슈테판 3세는 1473년 메흐메트 2세가 제국 동부를 침략한 백양 왕조의 제9대 샤한샤 우준 하산을 물리치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간 틈을 타 그동안 납부하던 공물을 끊어버렸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보복을 결심하고, 1474년 슈테판 3세에게 서신을 보내 왈라키아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을 철페하고, 킬리야를 오스만 제국에 넘길 것이며, 납부하지 않은 공물을 당장 납부하라고 요구했다. 슈테판 3세는 이를 거부했고, 유럽 각지에 서신을 보내 오스만 제국이 몰다비아를 침공하려 하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1474년 10월 20일, 라두 3세는 오스만군의 지원을 토대로 바사라브 3세와 바사라브 4세를 몰아내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또한 메흐메트 2세는 베네치아가 지배하던 슈코더르에 대한 공방전을 치르던 하딤 술레이만 파샤에게 포위를 풀고 소피아에 군대를 집결한 뒤, 몰다비아로 진격해 슈테판 3세를 굴복시키라고 지시했다. 5월 17일부터 8월 15일까지 3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힘겨운 공성전을 치르느라 지쳤던 오스만군은 슈코더르에서 몰다비아까지 한 달간 이동하며 악천후와 험난한 지형에 고통받았다. 1474년 9월 소피아에 집결하여 휴식을 취한 뒤, 왈라키아로 진군했다. 슈테판 3세가 나중에 교황청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오스만 기병대는 총합 3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오스만 중갑 보병대와 크림 칸국과 발칸 반도의 여러 가신들이 보낸 군대가 가담했고, 불가리아 농민 2만 명이 동원되어 물 위에 다리를 건설하고 도로에서 눈을 치우며, 보급 마차를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다뉴브 강을 건너 왈라키아 평원으로 가서 2주간 휴식을 취했고, 왈라키아 병사 17,000명을 추가로 확보했다.
슈테판 3세는 이에 맞서 기독교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헝가리 왕국에서 1,8000명, 폴란드에서 2,000 기병대만 가세했을 뿐, 다른 데서는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슈테판 3세는 세케이 군인 5,000명을 고용했고, 몰다비아 병사 30,000명(이중 상비군은 10,000 ~ 15,000명)을 동원했으며, 대포 20문을 갖췄다. 이후 오스만 제국군이 몰다비아로 쳐들어오면서, 바슬루이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경과
1474년 11월 몰다비아로 진군한 오스만 제국군은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이 파괴되고 농경지는 불살라졌으며, 우물이 독을 타서 마실 수 없는 등, 적군이 청야 전술을 대대적으로 단행한 걸 확인했다.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신속한 승리를 위해 몰다비아로 깊숙이 진군했지만, 적 경기병대의 유격 전술로 인해 많은 군수물자가 피해를 봤으며, 오스만 장병들의 피해와 피로도 누적되었다. 한편, 슈테판 3세는 오스만군의 움직임을 정찰병을 통해 확인한 뒤, 바슬루이 시 인근 라코바 강 하구의 발라드 계곡과 숲 사이에 갇힌 습지 지역에 군대를 집중 배치한 뒤, 오스만 제국군이 이쪽으로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1475년 1월 10일 아침, 오스만 제국군은 몇 걸음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 속에서 발라드 계곡으로 진군했다. 당시 날씨는 추웠고, 눈이 녹기 시작해 발라드 초원 전체가 웅덩이로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과 말이 같은 곳을 지나가고 있었기에, 계곡은 진창이 되어 전진하기 매우 힘들었다. 슈테판 3세는 계곡 바닥에 병사 수천명을 배치해, 오스만군과 교전한 뒤 계곡 깊숙이 유인하도록 했다. 오스만군 선봉대가 나무 다리를 통해 발라드 강을 건너 진군하던 그 때, 계곡에서 적군 악공이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소리가 들리더니, 몰다비아군 수천 명이 그들을 덮쳤다. 이후 격투가 한동안 벌어지다가, 몰다비아군이 짐짓 전투력에서 열세를 보인 척하며 후퇴했고, 오스만군 선봉대는 그들을 궤멸하기 위해 계곡 깊숙이 진군했다.
한편, 후방에서 뒤따라가던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저 멀리서 북과 나팔 소리 및 전투 함성이 들리는 걸 보고, 적군이 계곡에 전부 집결했다고 여겼다. 그는 즉시 병사들을 독촉해 다리를 서둘러 건너서 아군과 합세하게 했다. 이윽고 충분히 많은 오스만군이 다리를 건넜다는 생각이 들자, 슈테판 3세는 포병대에게 다리를 향해 발포해 끊어버리도록 했다. 뒤이어 숲에 숨어있던 몰다비아 궁수들이 세 방향에서 계곡으로 밀려든 적을 향해 사격했다. 그들은 안개 때문에 적이 보이지 않았기에, 발소리를 따라 화살을 쐈다. 여기에 몰다비아 경기병대는 습격과 도주를 반복하면서 오스만군이 계곡으로 계속 밀려오도록 유도했다
이후 오스만군이 계곡에 배치된 몰다비아군 수천 명을 몰아붙일 때, 오스만 제국군 좌측면 인근 숲속에서 몰다비아 악공들이 돌연 나타나 전투 개시를 알리는 노래를 연주했다. 이에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적이 아군 좌측면을 공격하려 들 것이라 여기고, 공세를 잠시 중단하고 그쪽을 막기 위해 진형을 개편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오스만군 좌측면에서 나타난 이들은 악공들 및 소규모 병사 뿐이었고, 슈테판 3세와 몰다비아 주력군은 발라드 강 너머 오른쪽 숲에 매복했다. 오스만군이 자기들 좌측면을 지키기 위해 진형을 한창 짜고 있는 틈을 타, 슈테판 3세는 주력군을 이끌고 적의 우측면을 향해 돌진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공격당하자, 오스만 제국군은 공포에 휩싸였다. 많은 이가 순식간에 전사했고, 더 많은 이들은 무기를 내팽개치고 도주했다.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어떻게든 군대를 수습하려 애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결국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후 몰다비아군은 다뉴브강까지 적군을 추격해 대거 살육했다. 이리하여 바슬루이 전투는 몰다비아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4. 결과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z, 1415 ~ 1480)에 따르면, 오스만군은 이 전투에서 4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했다고 한다. 그는 그러면서 슈테판 3세를 "우리가 존경하는 다른 전쟁 영웅들보다 절대로 뒤지지 않으며, 튀르크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세계 통치자들 중 최초의 동시대 인물이다. 내 생각에 그는 튀르크에 대항하여 기독교 연합을 이끌기에 가장 합당한 인물이다."라고 극찬했다. 또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일부 연대기 작가는 병사 45,000명, 깃발 100개, 포병 전체를 상실했고, 사령관 4명이 상실했다고 밝혔다. 익명의 연대기 작가는 슈테판 3세가 깃발 40개를 확보했다고 기술했다. 몰다비아군의 손실은 알려진 바 없으나 미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스만 제국군의 원정에 동행한 라두 3세가 이후 기록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은 걸 볼 때 이때를 전후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바사라브 3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등극했고, 바슬루이 전투에서 참패한 뒤 귀환하던 오스만 제국군 8,000명이 왈라키아로 진입할 때 습격해 격파했다.슈테판 3세는 전투가 끝난 뒤 사로잡은 고위급 장성들과 막대한 전리품을 폴란드 국왕이자 자신의 주군인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에게 보내 승전보를 알린 뒤, 군대와 자금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교황청과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서신과 포로 몇명, 튀르크 군기를 보내며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4세는 돈과 인력이 모두 부족하다며 지원할 수 없다고 통보했고, 교황청은 아슬레타 크리스티(Athleta Christi, 그리스도의 승리자)라는 칭호를 수여하면서도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또한 마차시 1세는 슈테판 3세가 보낸 장교와 깃발들을 내세우면서, 자기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고 홍보할 뿐 슈테판 3세에게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이렇듯 슈테판 3세가 완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이, 메흐메트 2세는 패전 소식에 격노해 며칠 동안 누구에게도 접견을 거부하고 복수할 계획을 구상했다. 1476년, 메흐메트 2세는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몰다비아로 진군했고, 왈라키아 보이보드 바사라브 3세도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 왈라키아군 10,000명을 파견했다. 여기에 크림 칸 멜리 1세 기라이가 이끄는 타타르군 15,000명도 가세했다. 슈테판 3세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양군은 그해 7월 발레아 알바에서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