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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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라두 3세 드러쿨레아 Radu III Drăcul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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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셀 프루모스(cel Frumos)[1] | |||
출생 | 1437년 / 1439년 | |||
사망 | 1475년 1월 (향년 37~39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462년 8월 ~ 1473년 11월 | |||
2차 | 1473년 12월 23일 ~ 1474년 3월 | |||
3차 | 1474년 3월 ~ 1474년 여름 | |||
4차 | 1474년 10월 ~ 1475년 1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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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블라드 2세 어머니: 유프락시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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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미르체아 2세, 블라드 3세, 블라드 수도공, 알렉산드라 | |||
배우자 | 마리아 베스피나 | |||
자녀 | 마리아 보이치차 | |||
가문 | 드라쿨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이슬람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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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17대 보이보드. 블라드 3세의 동생이자 예니체리 군단장으로, 오스만 제국을 섬기면서 형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살다간 인물이다.2. 생애
왈라키아 공국 제12대 보이보드 블라드 2세의 아들이다. 모친은 정설에 따르면 몰다비아 공국의 공 알렉산드루 1세의 딸인 'Cneajna'라고 한다. Cneajna는 ' 공작부인'을 의미하는 경칭이다. 루마니아 역사가 라두 플로레스쿠(Radu Florescu, 1925 ~ 2014)에 따르면, 이 여인의 본명은 유프락시아(Eupraxia)라고 한다. 반면 또 다른 루마니아 역사가 마테이 카자쿠(Matei Cazacu, 1946~)는 유프락시아란 이름은 정확한 게 아니므로 Cneajna라고만 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형으로 미르체아 2세, 블라드 3세가 있었고, 이복형제로 블라드 수도공, 알렉산드라[3]가 있었다.1442년 3월, 오스만 특사로부터 에디르네로 가서 무라트 2세에게 경의를 표하라는 지시를 받은 블라드 2세는 장남 미르체아 2세를 라키아 통치자로 세운 뒤 공물을 가지고 에디르네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라트 2세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반역죄로 기소되어 감옥에 갇혔다. 1442년 6월, 트란실바니아 총독 후녀디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한 뒤 단 2세의 손자이자 단 3세의 아들인 바사라브 2세를 왈라키아의 보이보드로 앉히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미르체아 2세는 후녀디 야노시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산악지대로 피신한 뒤 오스만 술탄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 후 블라드 2세는 어린 아들 블라드 3세, 라두 3세가 인질로 넘겨지고, 매년 공물을 바치고, 매년 왈라키아의 소년들을 보내 오스만 군대에서 복무하도록 훈련하는 조건을 수락한 뒤에야 겨우 풀려났다. 이리하여 에디르네 궁정으로 넘겨진 블라드와 라두 형제는 그곳에서 논리학, 쿠란, 오스만어, 페르시아어 및 문학 교육을 받았다. 한편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1443년 보이보드 직위를 되찾았지만, 1448년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군의 지원을 받은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블라드는 인질에서 풀려나 보이보드를 되찾기 위해 도전했지만, 라두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 술탄의 궁정에서 활동했고, 나중에 예니체리 지휘관으로 발탁되었다. 1453년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전을 벌일 때 참여했고, 코스탄티니예로 개칭된 그곳의 톱카피 궁전에서 사는 것을 허락받았다. 아테네 출신의 동로마 제국 학자였던 라오니코스 칼코콘딜레스(Λαόνικος Χαλκοκονδύλης, 1430 ~ 1470)에 따르면, 라두는 메흐메트 2세의 친밀한 친구이자 최측근이 되었다. 그 후 메흐메트 2세가 라두의 아름다운 용모에 혹하여 그를 침실로 초대했지만, 라두는 단검을 꺼내 메흐메트 2세의 허벅지를 찌르고 달아났다. 하지만 메흐메트 2세는 너그럽게 용서한 뒤 라두를 설복시켜 밤낮으로 소년들과 함께 지내며 사랑을 나눴다고 한다.
1461년, 메흐메트 2세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블라드 3세를 응징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군을 일으키기로 했다. 라두는 예니체리 기병 4,000명을 이끌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될 예정이었다. 블라드 3세의 유격 전술과 수많은 오스만 전사를 꼬챙이로 꿰뚫어서 전시하는 공포 전술로 인해 원정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라두는 1462년 별동대를 이끌고 다뉴브 강 평원에서 보야르들을 설득했다. 그는 특권을 회복하겠다고 약속하고 블라드 3세의 진영에서 탈영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켰으며, 평화, 온화한 통치, 과거의 잘못에 대한 어떠한 보복도 없음을 약속했다. 여기에 블라드 3세에게 심한 탄압을 받았던 색슨족이 거주하던 도시들에 사절을 보내 유리한 무역 규정을 맺겠다고 약속했다.
그동안 블라드 3세의 공포정치에 시달렸던 보야르들과 색슨족은 즉시 그에게 귀순했고, 부쿠레슈티와 트르고비슈테 시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다. 블라드 3세는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 북쪽 성으로 피신했지만, 그곳마저 위험해지자 이전에 동맹을 맺었던 헝가리 왕국의 국왕 마차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헝가리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는 도움을 받기는커녕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이리하여 왈라키아 전역을 장악한 라두 3세는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다만 오스만 제국군 소속 기병대인 시파히가 왈라키아 남부에 영구 주둔하는 걸 허용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이 다뉴브강 무역을 통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471년, 라두 3세는 칠리아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몰다비아 공 슈테판 3세와 전투를 치렀다. 이에 슈테판 3세는 라두 3세를 축출하기로 마음먹고, 1472년 단 2세의 아들 바사라브 3세를 섭외했다. 1473년 11월, 슈테판 3세의 몰다비아군과 바사라브 3세가 고용한 용병대가 밀코프 강을 건너 왈라키아로 진격했다. 그 해 11월 18일에서 20일 사이, 라두 3세는 프라호바의 게르기차 인근에서 침략군과 맞섰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부쿠레슈티 성채로 피신했다. 이후 한동안 농성하던 그는 보이보드들이 대거 침략군에 가담했다는 걸 알게 되자, 11월 23일 밤에 다뉴브 강변 오스만 제국 요새인 지우르지우 요새로 피신했다.
1473년 11월 28일, 라두 3세는 13,000명의 오스만군과 함께 왈라키아를 탈환하려 했지만 몰다비아군과 6,000가량의 왈라키아군이 연합한 바사라브 3세 휘하 군대에게 격파되었다. 12월 23일, 라두 3세는 다시 30,000 가량의 오스만군의 선두에서 다뉴브 강을 건넜다.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지 못한 바사라브 3세는 몰다비아로 피신했다. 오스만군은 여세를 이어가 몰다비아로 진군했지만, 바라드에서 슈테판 3세에게 완패했다. 1474년 3월,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은 바사라브 3세가 라두 3세를 일시적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라두 3세는 몰다비아군이 철수하자마자 반격해 바사라브 3세를 도로 몰아냈다. 1474년 여름,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은 바사라브 3세가 라두 3세를 재차 몰아냈다.
바사라브 3세는 라두 3세가 재차 공격할 것을 우려해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이슈트반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재빨리 왈라키아로 진군했지만, 바사라브 3세가 아닌 그의 사촌 바사라브 4세를 옹립하려 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바사라브 3세와 2차례 맞붙었는데,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두 번째 전투에서는 격파했다. 한편, 슈테판 3세의 몰다비아군은 라두 3세를 지지하던 텔레아젠 요새를 며칠만에 함락하고 수비대를 학살하고 성채를 불태웠다. 1474년 10월 20일, 라두 3세는 오스만군의 지원을 토대로 바사라브 3세와 바사라브 4세를 몰아내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 후 오스만군은 바사라브 3세가 망명한 몰다비아로 진군했지만, 1475년 1월 10일 바슬루이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라두 3세도 이 원정에 참여했는데, 이후 기록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은 걸 볼 때 이때를 전후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라두 3세 사후 바사라브 3세가 슈테판 3세의 지원에 힘입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476년 11월 라두 3세의 형 블라드 3세가 바사라브 3세를 몰아내고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복귀했지만, 1476년 12월 또는 1477년 1월 사망했고,[4] 바사라브 3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3. 가족
- 마리아 데스피나: 세르비아 또는 알바니아 출신 여인으로 추정된다.
- 마리아 보이치차(1457 ~ 1511): 몰다비아 공 슈테판 3세의 세번째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