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597년 3월 20일 (향년 ?세) | ||
재위기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592년 6월 ~ 1592년 8월 |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592년 8월 ~ 1593년 9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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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보그단 4세 어머니: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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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무사티니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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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47대 보이보드, 몰다비아 제38대 보이보드. 몰다비아 보이보드로는 알렉산드루 6세이다.2. 생애
몰다비아 보이보드 보그단 4세의 사생아다. 1592년 6월, 오스만 제국 파디샤 무라트 3세는 보야르들을 상대로 심한 탄압을 가해 몰다비아 공국을 혼란에 빠뜨린 아론 트리아눌을 폐위하고 알렉산드루 3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루 3세가 미처 몰다비아에 부임하기 전에, 자포로제 카자크의 지원을 받은 페트루 7세 카자쿨이 몰다비아를 장악했다. 이후 아론에게서 돈을 꼭 받아내야 했던 오스만 관리들과 예니체리의 강력한 청원을 받은 무라트 3세는 1592년 8월 아론을 보이보드로 복위하기로 하고, 또다른 가신인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에게 페트루 7세를 축출하고 아론이 몰다비아 공국에 복귀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1592년 8월, 오스만 관리들은 왈라키아 보이보드 슈테판 수르둘이 자기들에게 빚진 돈을 갚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될 예정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알렉산드루 3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하기로 했다. 슈테판은 곧바로 체포된 뒤 히오스 섬으로 추방되었고, 알렉산드루 3세가 오스만 제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왈라키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입성했다. 그는 전임자가 돈을 갚지 못해 무너진 걸 똑똑히 지켜봤기에,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고자 왈라키아 농민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고 악착같이 거둬들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대규모 봉기가 일어날 조짐이 포착되자, 그는 희생양을 지정하고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일부 채권자와 보야르들을 처형했다. 그는 이로 인해 '첼 라우(cel Rău, 악한 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사형집행인은 처형 대상이었던 크라이오바 반(Ban) 미하이 2세를 살려줬다. 그렇게 풀려난 미하이는 곧바로 오스만 궁정에 알렉산드루 3세가 왈라키아에서 심각한 폭정을 자행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알렉산드루 3세는 갈수록 악화하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시나이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 복원 자금을 기부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1593년 9월, 오스만 관리들은 빚진 돈을 갚지 못하는데다 왈라키아를 혼란에 빠뜨린 그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여기고 미하이 2세를 새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알렉산드루 3세는 그동안의 행적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코스탄티니예로 향했다가 곧바로 체포된 후 가신 조항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어 4년간 구금되었다가 1597년 3월 20일에 코스탄티니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