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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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니콜라오스 마브로코르다토스 Νικόλαος Μαυροκορδάτο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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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80년 5월 3일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사망 | 1730년 9월 3일 (향년 50세) | |||
왈라키아 공국 부쿠레슈티 | ||||
재위기간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709년 11월 17일 ~ 1710년 11월 21일 | |||
2차 | 1711년 11월 8일 ~ 1716년 1월 5일 |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차 | 1716년 1월 21일 ~ 1716년 11월 25일 | |||
2차 | 1719년 3월 ~ 1730년 9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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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 어머니: 술타나 크리소스코울라이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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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이오안 마브로코르다트 | |||
배우자 | 카산드라 칸타쿠지노, 풀케리아 추키스, 스타브로폴리스의 스마라그다 | |||
자녀 | 콘스탄틴, 이오안, 알렉산드루, 술타나 | |||
가문 | 마브로코르다트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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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70대 보이보드, 왈라키아 공국 제69대 보이보드. 몰다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공국 최초의 파나리오테스 출신 군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2. 생애
1680년 5월 3일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출생했다. 그가 속한 마브로코르다토스 가문은 히오스 출신의 그리스인이었다. 아버지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는 오스만 제국의 외교관으로,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에 기여했으며, 동물 실험을 통해 폐의 혈액 순환을 입증하는 등 의학자로서도 활약했다. 어머니 술타나 크리소스코울라이오스는 역시 오스만 제국의 외교관이자 학자로 활약한 이오안니스 크리소스코울라이오스의 딸이다. 형제로 나중에 왈라키아의 보이보드를 역임한 이오안 마브로코르다트가 있었다.그는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훗날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된 코르산토스 노타라스의 가르침을 받았고, 여러 외국어를 익혔고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69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스만 궁정의 대 드라고만(Dragoman: 유럽 등 타국 사절단의 통역자, 번역가, 공식 가이드를 맡은 궁정 직위)으로 발탁되었으며, 1709년 11월 17일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710년 11월 21일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와 내통할 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오스만 파디샤 아흐메트 3세에 의해 폐위되었지만, 오히려 그 뒤를 이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된 디미트리에 칸테미르가 표트르 1세와 손잡고 오스만 제국에 대적하다가 망명하자 1711년 11월 8일에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그는 몰다비아 보이보드로서 재위하면서 보야르들의 횡포를 억제하고 농민을 보호하는 정책을 시행해 백성들의 호응을 얻었다. 또한 몰다비아 공국에 주둔하던 스웨덴군과 폴란드군을 오스만 제국의 협력하에 몰아냈다. 그러던 1716년 왈라키아 공 슈테판 칸타쿠지노가 처형된 뒤, 아흐메트 3세의 지시에 따라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로 부임했다. 당시엔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간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동조한 여러 보야르를 처형하고 왈라키아 대주교인 이베리아인 안팀을 오스만 제국으로 압송했다. 그러나 1716년 11월 25일 부쿠레슈티가 오스트리아군에 함락된 뒤 그들에게 체포되어 빈으로 시비우로 끌려갔고, 오스만 제국은 그를 대신해 동생인 이오안 마브로코르다트를 새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세웠다.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종식되면서 풀려났으며, 1719년 3월 형제 이오안이 사망하자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그 후 오스만 제국 궁정의 호의를 사 공물 액수를 줄이고 세금을 감면해 백성들의 호응을 얻는 한편,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왈라키아에 그리스 풍습, 그리스어, 그리스 의상을 도입했고, 동로마 제국 모델에 따라 궁정을 새로 세웠다. 여기에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아 도서관을 여럿 세웠고, 바카레슈티 수도원과 스타브로폴레오스 교회를 세웠다. 한편, 그는 그리스 소설인 필로테우 파테르가(Philotheou Parerga, 필로테오스의 여가)를 집필했다. 이 소설은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의 스타일을 본받았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프랑스 도덕주의자들의 학설을 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다국어에 능통해 유대인 출신으로 여러 유럽 통치자들의 외교 고문을 역임한 다니엘 드 폰세카(Daniel de Fonseca, 1672 ~ 1740), 트란실바니아의 고전학자 스테판 베르글러(Stephan Bergler, 1680 ~ 1746) 등 여러 학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웨이크 등 서방 종교인들과도 서신을 교환했다.
1730년 9월 3일 부쿠레슈티에서 역병에 걸려 사망했고, 바카레슈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에 아들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 직위를 물려받았다.
3. 가족
- 카산드라 칸타쿠지노(1682 ~ 1713)
- 풀케리아 추키스(? ~ 1716)
-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1711 ~ 1769): 몰다비아 보이보드 4회, 왈라키아 보이보드 6회 역임.
- 이오안 마브로코르다트(1712 ~ 1747): 몰다비아 보이보드(1743 ~ 1747)
- 스타브로폴리스의 스마라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