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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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99년 | ||
몰다비아 공국 흔체슈티 카운티 라푸슈네아 | |||
사망 | 1568년 5월 5일 (향년 69세) | ||
몰다비아 공국 이아시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차: 1552년 9월 ~ 1561년 11월 18일 | |||
2차: 1564년 10월 ~ 1568년 3월 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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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보그단 3세 어머니: 라푸슈네아의 아나스타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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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룩산드라 | ||
자녀 | 보그단 4세, 페트루 7세 카자쿨( 사생아), 아론 트리아눌(사생아) | ||
가문 | 무사티니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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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28대 보이보드.2. 생애
1499년 몰다비아 공국 흔체슈티 카운티 라푸슈네아에서 보그단 3세와 라푸슈네아의 아나스타샤 사이의 사생아로 출생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에서 지내다가 1552년 9월 폴란드 왕국의 세니아위스키 가문과 몰다비아의 보이니치(Vornic, 왕실 감독관)을 맡은 미온 모조크의 지원을 토대로 몰다비아 공국 제27대 보이보드 이오안 1세 졸데아를 체포해 코를 베고 수도자로서 평생을 살게 한 뒤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이후 폴란드의 트렘보울라(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의 테레보레)로 가서 가족과 재회했고, 다시 바쿠타로 가서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전쟁 시 몰다비아 기병 7,000명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몰다비아 공국은 폴란드 왕실의 통제를 받았다.1553년 1월, 알렉산드루 4세는 바쿠타에서 타타르족을 사대하는 폴란드에 수천 군인을 보냈다. 또한 그 해 5월 11일 미르체아 5세를 도와서 현직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라두 8세를 몰아내고 미르체아 5세를 옹립했다. 그러나 그는 곧 미르체아 5세와 마찰을 벌였고, 1554년 2월 28일에 군대를 보내 미르체아 5세를 축출한뒤 라두 7세의 아들인 파트라스쿠 첼 분을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1558년 트란실바니아 내 자기 영지였던 키세우와 발타 성채를 되찾기 위해 원정을 떠나 샤라 바르세를 약탈한 뒤, 트란실바니아 공국과의 협상 끝에 두 영지를 돌려받았다.
이렇듯 그는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오른 이래 승승장구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폴란드 왕국의 지원을 받는 그를 의심했다. 1555년 오스만 궁정으로부터 코스탄티니예에 출두하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그는 가지 않는 대신 뇌물을 뿌려서 오스만 관리들이 자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1561년 그의 궁정에서 지내던 이오안 2세 야콥 헤라클리드가 용병대를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그해 11월 18일 베르비아 마을 인근에서 알렉산드루 4세를 격파했다. 알렉산드루 4세는 후시로 후퇴한 뒤 다시 맞섰지만 2번째로 패한 뒤 킬리야로 이동했다가, 몰다비아 국고를 가져온 부인 룩산드라와 함께 코스탄티니예로 이동했다. 그러나 1562년 3월 오스만 궁정에 의해 로도스로 추방되었다.
1563년 이오안 2세 야콥 헤라클리드가 슈테판 7세 톰샤에게 피살되자, 그는 오스만 궁정에 200,000 굴덴을 바치고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하는 걸 허락받았다. 이후 몰다비아로 돌아와 슈테판 7세 톰샤와 내전을 벌였고, 오스만 제국군과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은 알렉산드루 4세를 옹립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몰다비아로 진군해 약탈을 자행했다. 결국 1564년 3월 슈테판 7세 톰샤가 밀려나 귀족 이온 모조크, 포체드닉, 베베리타, 스팬치오그와 함께 폴란드 왕국으로 망명했지만, 르비우에서 폴란드인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루 4세는 복위한 뒤 처음에는 자신을 축출하는 데 관여했던 모든 보야르에게 용서를 약속했다. 입지가 굳건해지자마자 대 보야르들을 초대하는 성대한 만찬을 벌인 뒤, 외국 용병들을 동원해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 폴란드 연대기 작가들에 다르면, 1564년 11월부터 보야르 12명이 수체아바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그에게 몰다비아 공국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도록 모든 도시의 성채를 파괴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알렉산드루 4세는 모든 성읍에 나무를 가득 채우고 불을 질렀다. 하지만 방화는 요새에 큰 피해를 입히지 않았으며, 이는 요새의 파괴를 피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다만 호틴만은 오스만 제국 수비대가 배치되었고, 이곳 수비대는 종종 몰다비아 시골들을 약탈했다.
1568년 3월 5일 이전에 오한과 고열에 시달리던 그는 3월 5일 트란실바니아 궁정에 주치의인 안드레이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안드레이는 그가 사망한 후에야 도착했다. 또한 그는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궁정에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장남인 보그단 4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3월 9일 국가 평의회를 소집한 뒤 모든 신하 앞에서 홀을 보그단 4세에게 전달한 후 모두에게 그를 보이보드로 받들라고 요청했다. 모두가 그의 뜻을 받들겠다고 맹세하자, 그는 보그단 4세에게 보이보드 직위를 넘겨준 뒤 파호미(Pahomie)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어 이아시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5월 5일에 사망했다. 사후 슬리티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룩산드라(1538 ~ 1570): 몰다비아 공국 제22대 보이보드 페트루 5세 라레슈의 장녀. 알렉산드루 4세와 결혼하기 전에 몰다비아 공국 제27대 보이보드 이오안 1세 졸데아와 결혼했다.
- 보그단 4세(1555 ~ 1574): 몰다비아 공국 제31대 보이보드.
- 사생아
- 아론 트리아눌(1560 ~ 1597): 몰다비아 공국 제37대 보이보드.
- 페트루 7세 카자쿨(? ~ 1592): 몰다비아 공국 제38대 보이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