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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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게오르게 기카 Gheorghe Ghi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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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00년 3월 3일 | |||
오스만 제국 마케도니아 벨레스 | ||||
사망 | 1664년 11월 2일 (향년 64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재위기간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차 | 1658년 3월 3일 ~ 1659년 11월 2일 |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659년 11월 20일 ~ 1660년 5월 | |||
2차 | 1660년 6월 ~ 1660년 9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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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마테오 기카 어머니: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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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예카테리나, 스마라그다 | |||
자녀 | 그리고레 1세 기카 | |||
가문 | 기카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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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61대 보이보드, 몰다비아 공국 제56대 보이보드.2. 생애
1600년 3월 3일 오스만 제국 마케도니아 벨레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마테오라는 이름만 전해질 뿐,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계 알바니아인으로,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역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기카 가문의 창시자다. 일찍이 몰다비아 공국으로 가서 상인으로서 활약하다가 바실레 루푸 치세에 보야르로 발탁되었고, 나중엔 몰다비아의 영구 대사 자격으로 코스탄티니예에 보내졌다. 바실레 루푸의 뒤를 이어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된 게오르게 슈테판은 그가 대사 직위를 유지하도록 했다.1658년 3월 3일, 오스만 제국 궁정은 자국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되는 게오르게 슈테판을 폐위하고 게오르게 기카를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게오르게 슈테판은 왈라키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셰르반과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지원을 받아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탈환하려 했지만, 스트룽가 전투에서 게오르게 기카에게 패배했다. 1658년 12월, 게오르게 기카는 오스만- 크림 칸국 연합군과 함께 트란실바니아 약탈전에 참여했다.
1659년 10월, 콘스탄틴 셰르반이 라코치 죄르지 2세가 보내준 트란실바니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몰다비아로 진군해 게오르게 기카를 공격했다. 그는 몰다비아에서 속절없이 밀려났고, 11월 2일 통치권을 슈테파니타 루푸에게 넘겼다. 1659년 11월 20일 자국에 반기를 든 왈라키아 보이보드 미네아 3세를 축출한 오스만 제국에 의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자, 그는 왈라키아로 간 뒤 부쿠레슈티를 중심지로 삼았다.
1660년 5월, 일전에 게오르게 기카를 밀어내고 몰다비아 공국을 일시적으로 손에 넣었다가 크림 칸국이 파견한 타타르군의 지원을 받은 슈테파니타 루푸에게 밀려나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갔던 콘스탄틴 셰르반이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왈라키아로 쳐들어갔다. 게오르게 기카는 이번에도 일시적으로 밀려났지만, 그해 6월 타타르군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틴을 축출했다.
그러나 왈라키아가 연이은 내전과 혼란으로 파탄 지경에 처한 데다, 기근과 역병이 창궐해 수많은 주민이 사방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그는 오스만 제국 궁정에 공물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궁정은 그가 불충해 공물을 보내지 않는다고 간주하고 1660년 9월 1일 전격 체포한 뒤 에디르네로 이송했다가, 다시 코스탄티니예로 이송했다. 그 후 4년간 옥고를 치르다 1664년 11월 2일에 옥사했다.
게오르게 기카는 생전에 예카테리나와 스마라그다라는 아내 2명을 두었다. 그중 스마라그다를 통해 그리고레 1세 기카를 낳았다. 그리고레 1세 기카는 아버지가 폐위된 뒤 왈라키아 보이보드 직위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