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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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9년 8월 17일 | |||
왈라키아 공국 크라이오바 | ||||
사망 | 1869년 4월 13일(향년 69세) | |||
프랑스 제2제국 니스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1차) | |||
1849년 6월 ~ 1853년 10월 29일 | ||||
왈라키아 보이보드 (2차) | ||||
1854년 10월 5일 ~ 1856년 6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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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디미트리에 비베스쿠 어머니: 예카테리나 바카레스쿠 양아버지: 바르부 슈티르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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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게오르게 비베스쿠 | |||
배우자 | 엘리자베타 칸타쿠지노-피스카누 | |||
자녀 | 페나레타, 엘리제, 엘레나, 알렉산드루, 드미트레 | |||
가문 | 비베스쿠-슈티르베이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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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95대 보이보드.2. 생애
1799년8월 17일 왈라키아 공국 크라이오바에서 보야르 디미트리에 비베스쿠와 예카테리나 바카레스쿠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게오르게 비베스쿠가 있었다. 유년기 때 왈라키아의 명문가인 슈티르베이 가문의 마지막 일원이자 외할아버지인 바르부 슈티르베이에게 입양되면서, 외할아버지의 이름과 슈티르베이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았다.1815년 파리로 유학해서 수년간 철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1821년 왈라키아로 돌아간 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그리스인의 독립을 꾀한 필리키 에테리아(Φιλική Εταιρεια: 친구 협회)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왈라키아 봉기에 참여했다. 그러나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트란실바니아의 브라쇼브로 망명했다.
1825년 부쿠레슈티로 귀환한 뒤 그리고레 4세 기카 치하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1829년 러시아군이 왈라키아를 장악한 뒤, 러시아군 지휘관 파벨 드미트리에비치 키셸레프 장군에 의해 왈라키아 정부 일원이 되었으며, 왈라키아 최초의 헌법인 <유기적 규제(Органический регломент)>[1] 작성 위원회의 위원으로 발탁되었다. 1836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총독 알렉산데르 9세 기크 치하에서 법무부 장관을 맡아 나폴레옹 1세 시대의 프랑스 모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상업법 도입에 참여했다.
1842년 12월에 열린 보이보드 선거에 출마했지만 동생 게오르게 비베스쿠에게 패배했다. 1848년 왈라키아 혁명이 오스만 제국군에게 전복된 뒤, 술탄 압뒬메지트 1세는 콘스탄틴 칸타쿠지노를 카이마캄(caimacam, 임시 통치자)로 세우고 1년 가까이 통치해 왈라키아를 이전 상태로 되돌린 뒤, 1849년 6월 바르부 슈티르베이를 새 보이보드로 추천했다. 바르부는 러시아 당국에 뇌물을 건내 그들의 용인을 얻어낸 뒤 보이보드에 취임했다. 그의 통치는 1851년까지 지속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공국 공동 점령 기간과 겹쳤다.
그는 통치자로서 행정, 재정, 공교육 분야에서 다소의 개혁을 실시했다. 저축과 공공 지출 의 엄격한 통제를 통해 국가 부채의 3분의 2를 줄였고, 부쿠레슈티 에 극장을 세웠고, 1848년 혁명 동안 폐쇄된 학교를 다시 열었으며, 사법부의 행정 소송이 좀더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했다. 또한 농민들이 보야르들의 토지를 분할 받는 토지 개혁을 추진했지만, 콘스탄틴 칸티쿠지노 등 보수파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지지부진했다. 한편, 로마인 노예 제도에 있어서 노예의 내부 거래를 제한하고, 내부 거래로 인한 가족의 분리를 금지했다.
1853년 10월 크림 전쟁이 발발한 후 10월 29일 러시아군이 왈라키아를 장악하자 빈으로 망명했다. 1854년 10월 5일 부쿠레슈티로 돌아와서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했지만, 더 이상 행동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왈라키아에 진주한 오스트리아군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 1856년 크림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파리 협약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통합을 제안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865년 6월 25일 보이보드로서 7년 임기가 끝나자 파리로 이주했다.
1857년 왈라키아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통합안에 찬성 투표한 후 파리로 귀환했다. 1866년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에 일시적으로 귀국해 루마니아 공으로 선출된 카롤 1세를 지지했다. 이후 파리와 니스에 주로 거주했고, 1868년 부쿠레슈티를 마지막으로 방문했으며, 1869년 4월 13일 니스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엘리자베타 칸타쿠지노((1805 ~ 1874): 그리고레 칸타쿠지노-파스카누와 엘레나 브랑코비아누의 딸.
- 페나레타(1822 ~ 1894): 테오도르 기카의 부인.
- 엘리제(1827 ~ 1890): 슈테판 벨루의 부인.
- 엘레나(1831 ~ 1864): 레오 라리쉬 폰 묀니히 백작의 부인.
- 알렉산드루(1836 ~ 1895): 마리아 기카-코마네슈티의 남편.
- 드미트레(1842 ~ 1913): 알렉산드린 폰 소이카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