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595년 2월 2일 (향년 ?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591년 5월 ~ 1592년 8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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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이오안 2세 보다 어머니: 마리아 후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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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무사티니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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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46대 보이보드.2. 생애
몰다비아 공 이오안 2세 보다와 호틴의 보야르 루페아 후루의 딸 마리아 후루의 아들로, 보이보드에 선임되기 전에는 가죽 재단사이자 마구 제작자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590년 그리스의 부유한 은행가 안드로니코스 칸타쿠지노스[1]의 딸과 결혼하면서 막대한 부를 챙겼다.슈테판은 이를 활용해 왈라키아 보이보드가 되기로 마음먹고, 당시 미네아 2세로부터 빚을 돌려받지 못해 불만을 품고 있던 튀르크 관리들에게 접근해 그 돈을 대신 갚아줄 테니 자기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관리들은 이에 응하기로 했고, 파디샤 무라트 3세는 관리들의 적극적인 추천에 따라 1591년 5월 19일에 미네아 2세를 아나톨리아로 추방하고 슈테판을 새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했다. 그 후 슈테판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농민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렸다. 그럼에도 충분한 돈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에 화가 난 오스만 관리들은 1592년 8월 알렉산드루 3세 첼 라우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했다.
그렇게 밀려난 슈테판은 히오스 섬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몇 년간 잠자코 지냈다. 그러다가 1594년 왈라키아 보이보드 미하이 2세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루돌프 2세와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반기를 들자, 대재상 시난 파샤는 그를 소환하기로 했다. 슈테판은 1594년 11월 왈라키아 보이보드의 권리를 부여받았고, 1595년 1월 오스만 제국군 8,000명을 이끌고 왈라키아로 진군했다. 그러나 그해 2월 2일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너려던 중 미하이 2세의 군대에게 요격당하여 참패했고, 그는 도주하던 중 강물에 빠져 익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