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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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4년 | |||
왈라키아 공국 크라이오바 | ||||
사망 | 1873년 6월 1일(향년 69세) | |||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843년 1월 1일 ~ 1848년 6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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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디미트리에 비베스쿠 어머니: 예카테리나 바카레스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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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바르부 슈티르베이 | |||
배우자 | 조이 마브로코르다트, 마리아 바카레스쿠 | |||
자녀 | 그리고레, 니콜라스, 게오르게, 알렉산드루, 마리아 | |||
가문 | 비베스쿠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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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94대 보이보드.2. 생애
1804년경 왈라키아 공국 크라이오바에서 보야르 디미트리에 비베스쿠와 예카테리나 바카레스쿠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바르부 슈티르베이가 있었다. 1817년부터 1824년까지 부쿠레슈티와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825년 왈라키아로 돌아온 후 1828년 왈라키아에 진주한 러시아군 지휘관 파벨 드미트리에비치 키셸레프 장군의 지도하에 소집된 돌지 카운티 임시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왈라키아 법무부와 외교부에서 다양한 직책을 역임하다가, 1834년 러시아군이 물러난 뒤 은퇴하여 1842년 빈과 파리에서 살다가 본국으로 귀환했다.1842년에 개최된 국가의회에서 왈라키아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2세 기카의 실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알렉산드루 2세를 "알바니아계 외국인"이라고 단정하며, 더이상 알렉산드루의 통치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연설했다. 의원들은 기카 가문과 더이상 협력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고, 그들의 불만 사항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에 전달되었다. 양국은 알렉산드루는 더 이상 왈라키아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폐위하기로 합의했다. 결국 1842년 10월 7일, 오스만 제국은 그를 폐위한다는 칙령을 선포했고, 알렉산드루는 빈으로 피신했다.
1843년 1월 1일, 왈라키아에서 <유기적 규제(Органический регломент)>[1]에 의거한 첫번째 보이보드 선거가 개최되었다. 그 결과 게오르게가 보수적인 보야르들과 젊은 자유주의자들 모두의 지지를 받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그는 취임한 직후 그동안 알렉산드루 2세 기카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던 이들 전원을 사면했고, 정부 구성원을 기카 가문의 정치적 반대자들로 구성했다. 그러나 여러 입법 계획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국가의회와의 관계가 서서히 악화되었다.
1844년 봄, 왈라키아 당국은 러시아 기술자 알렉산드르 트라다필로프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가 국가의 광산을 관리하도록 했다. 또한 광산 소유자가 18개월 이내에 광산 채굴을 시작하지 않으면 러시아 회사가 12년 동안 광산 관리를 인수하고 수입의 10%를 소유자에게 지불하며, 10%를 왈라키아 정부에 지불하도록 했다. 게오르게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국가의회는 강하게 반대했다. 의원들은 러시아가 지역 정치에 개입하려는 수작으로 간주했다. 계약은 결국 취소되었지만, 러시아 당국은 국가의회를 껄끄러운 존재로 여기고 게오르게에게 해산을 종용했다. 1844년 3월 4일, 게오르게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승인을 받고 의회를 해산했다.
1846년 11월 의회 선거가 소집되었을 때, 게오르게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정적들이 의회에 들어가는 걸 저지하고 자기 지지자들을 의회에 대거 배속시켰다. 이에 그가 독재자가 되려 한다는 비난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기에 더해 루마니아어가 현대화와 양립할 수 없다면서, 성 사바 대학을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학교로 개편하라고 명령해, 루마니아어를 민족 언어로 여기던 민족주의자들의 강한 반감을 샀다.
1847년 3월 23일, 부쿠레슈티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그 후 게오르게는 세로운 도시 계획 규정을 반포했다. 1847년 이웃한 몰다비아 공국과 관세 동맹을 맺었고, 1848년 1월 1일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국경지대인 포크사니 검문소를 폐지했다. 또한 보이보드가 교회의 예산을 승인하는 등 정교회 성직자에 관한 새로운 법률을 재정했으며, 교회 및 공공 당국에 속한 모든 집시 노예를 해방하는 등 몇 가지 중요한 법률을 통과했다.
1848년 여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 유럽 전역을 뒤흔들던 1848년 혁명에 호응한 지식인들이 혁명을 일으키기로 했다. 6월 9일, 서부 왈라키아의 이슬라즈 마을에서 엘리아데-라둘레스쿠(Eliade-Radulescu) 회원들이 농민들을 소집한 뒤 <이슬라즈 선언문(Proclamaşia de la Islaz)>을 반포했다. 그들은 이 선언문에서 왈라키아의 완전한 독립, 언론의 자유, 법 앞의 모든 사람의 평등, 새로운 조세 제도 도입, 방위군 창설, 무료 교육, 제헌의회 직접 선거, 통치자 지위 단순화 및 대통령 직위 도입, 농민에게 보야르 토지 분배 등을 역설했다. 그후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시민들이 부쿠레슈티 광장에 집결한 뒤 고스포다르 궁전으로 향했고, 군대와 경찰은 이들을 저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후 소규모 혁명가들이 궁전에 들어가 게오르게에게 이슬라즈 선언문을 넘겼고, 게오르게는 6월 11일 이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슬라즈 선언문은 왈라키아 헌법으로 선포되었으며, <유기적 규제>는 폐지되었다. 게오르게는 6월 13일 보이보드에서 물러나 해외 망명을 떠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파리에 정착했다. 나중에 왈라키아 혁명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요청을 받아들인 압뒬메지트 1세가 파견한 오스만 제국군 20,000명에 의해 진압되었고, 게오르게의 형제인 바르부 슈티르베이가 합뒬메지트 1세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그 후 파리에서 여생을 보내던 그는 1857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디반(Divan)의 일원으로 참여해, 두 공국의 통합은 외국 통치자의 주권 아래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859년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의 왕좌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가 선출되었다. 1873년 6월 1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조이 마브로코르다트(1805 ~ 1892): 왈라키아 공국 카이마캄(Caimacam: 임시 통치자) 그리고레 브랑코비아누의 양녀. 1843년, 게오르게는 조이가 정신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그녀와 이혼하고 친척인 마리아 바카레스쿠와 결혼하려 했지만 정교회의 허락을 쉽사리 받지 못했고, 1845년에 비로소 이혼했다.
- 그리고레 비베스쿠-브랑코비아누(1827 ~ 1886): 루마니아계 프랑스 여성 시인이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안 드 노아유의 아버지.
- 니콜라스 비베스쿠(1832 ~ 1890): 미셸 네 원수의 손녀 루이즈 엘레니 네이 델힝겐과 결혼. 알제 갈멜 수녀원장 잔 비베스쿠의 아버지.
- 게오르게 비베스쿠(1834 ~ 1902): 프랑스 귀족 발렌티나 드 카라만의 두번째 남편.
- 알렉산드루 비베스쿠(1842 ~ 1911): 프랑스 언어학회 회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상자.
- 마리아 바카레스쿠(1815 ~ 1859)
- 마리아 비베스쿠(1845 ~ 1929): 몽테스키우-페장삭 백작 오돈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