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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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21년경 | ||
몰다비아 공국 | |||
사망 | 1574년 7월 14일 (향년 53세) | ||
몰다비아 공국 로슈차니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572년 2월 ~ 1574년 7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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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슈테판 4세 어머니: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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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로스토프의 마리아, 마리아 후루 | ||
자녀 | 페드루, 슈테판 수르둘 | ||
가문 | 무사티니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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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32대 보이보드. 첼 비테아즈(cel Viteaz)는 별명으로, "용감한 자"를 의미한다.2. 생애
몰다비아 공국 제21대 보이보드 슈테판 4세의 아들로, 아르메니아 여성을 어머니로 둬서 아르메니아인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기 폴란드 왕국,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코스탄티니예, 루스 차르국, 그리스를 잇따라 방문했다. 이반 4세의 서신에 따르면, 이오안은 1566년경 루스 차르국에 살았고, 로스토프의 공 시메온의 딸 마리아와 결혼해 아들 페트루를 낳았다. 이오안은 나중에 아내와 아들을 몰다비아로 데려가려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그 후 이오안은 폴란드 왕국에 들렀을 때 오스만 제국 사절단의 통역을 맡았고, 코스탄티니예로 동행한 뒤 데 드라고만(dragoman: 중동인과 유럽인 사이의 통역사) 직책을 맡았다. 그러던 1571년, 오스만 제국 궁정은 몰다비아 보야르들로부터 몰다비아의 현 보이보드 보그단 4세가 몰다비아 궁정 고문들을 폴란드인으로 채우고 폴란드 왕국에 적극적으로 따른다는 고발을 듣고, 몰다비아가 폴란드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보그단 4세를 폐위하고 이오안을 보이보드로 앉히기로 했다.
오스만 제국 궁정으로부터 몰다비아 왕좌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은 이오안은 튀르크족과 테살리아 용병대를 이끌고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이에 대응해, 보그단 4세는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폴란드 헤트만 미콜라이 멜레츠키가 이끄는 3,000 병력이 몰다비아로 이동했다. 1571년 말, 이오안 3세의 용병군은 이아시에 도착한 뒤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칭했다. 이후 프루트 강 유역에서 이오안 3세의 용병대와 보그단 4세와 폴란드 연합군이 대치했다. 당시 병력 규모는 보그단 4세 쪽이 2배 이상 많았지만, 승리를 확신하지 못해 2달간 소규모 접전만 벌였다.
그러다가 1572년 2월 오스만 제국군 6천 명이 이오안 3세를 돕기 위해 전장에 도착하자, 미콜라이 멜레츠키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폴란드로 철수했고, 보그단 4세는 해외로 망명했다. 이리하여 몰다비아 보이보드로서의 입지를 굳힌 이오안은 보야르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는 음모에 가담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죄수들의 고문을 친히 주관해 보야르들의 증오를 받았다.
이오안은 오스만 제국에 연간 35,000 두카트에 달하는 공물을 바치면서도 이웃 국가와의 무역을 증진하고 앞면에 자신의 이미지와 "몰다비아의 아버지"라는 문구가 새겨진 구리 동전을 주조했다. 또한 수도를 수체아바에서 이아시로 옮겼다. 157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2세가 사망한 뒤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선거가 열렸을 때, 그는 루스 차르국의 차르 이반 4세를 지원했지만 실패하고 앙리 3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 선임되었다.
1574년, 오스만 제국 궁정은 이오안에게 사절을 보내 공물을 2배 바치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압제로부터 몰다비아를 해방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농민들을 대거 징집해 대규모 병력을 양성했으며, 여러 폴란드 영주들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고, 자포르제 카자크는 헤트만 이반 스비르고프스키의 1,200 병력을 파견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 궁정은 페트루 6세 슈체아풀을 새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했다.
1574년 봄, 오스만 제국군은 왈라키아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2세 미르체아의 지원을 받으며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이오안은 이에 맞서 몰다비아 기병 900명과 카자크들을 먼저 파견했고, 이들은 폭샤니 인근의 질리슈테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오스만 제국군이 이 때문에 혼란에 빠진 사이, 이오안이 주력군을 이끌고 도착해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했다. 몰다비아-카자크 연합군은 뒤이어 왈라키아로 진군해 부쿠레슈티를 점령한 후 빈틸라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옹립한 후, 브라일라로 향해 튀르크 보조부대를 격파하고 도시를 불태웠지만, 성채를 함락하지는 못했다.
이오안은 다음으로 몰다비아에 위치한 튀르크군 요새인 부자크로 향했다. 카자크군은 도중에 벤더리에서 대규모 튀르크-타타르 분견대를 격파한 뒤 벤더리 마을을 점령했지만 요새를 공략하지 못했다. 10,000명의 튀르크군이 요새를 구원하고자 이동했지만, 인근에서 역습을 받고 파괴되었다. 이후 포코틸로가 이끄는 카자크 600명이 폴란드에서 보낸 보트 25척을 타고 드네스트르강을 따라 벤더리로 이동했다. 이오안은 그들에게 드네스트라강변의 애커만 요새를 공략하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곧바로 진군해 애커만 마을을 점령했지만, 성벽을 허물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성채는 공략하지 않고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새로운 군대를 소집해 남쪽에서 몰다비아로 진군했고, 크림 칸국도 동쪽에서 군대를 파견했다. 이오안은 오스만 제국군을 막기 위해 보야르 이에레미아 골리아에게 오스만 제국군이 다뉴브강을 건너는 걸 저지하도록 했다. 이에레미아 골리아는 이사케아 인근의 오블루치스키가 오스만 제국군이 건너기 가장 좋은 길목이라고 판단하고 그곳에 주둔했다. 그러나 나중에 오스만 제국이 제공한 뇌물 3만 갈벤을 받고 그들이 건너게 했으며, 적군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허위 보고까지 올렸다. 이에 이오안은 35,000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1574년 7월 10일, 양군은 카굴 호수 근처에서 마주쳤다. 다뉴브 강변을 건넌 오스만 제국군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걸 알게 된 몰다비아-카자크 연합군은 동요했고, 안 그래도 이오안의 왕권 강화 정책으로 많은 동료가 희생된 것에 불만이 있었던 보야르들은 곧바로 오스만 제국군에 귀순했다. 이에 이오안은 로슈차니 마을 인근 계곡으로 후퇴한 뒤 적군에게 포위되어 사흘간 항전했다.
그러나 도저히 승산이 없자, 이오안은 7월 14일에 자신과 병사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군은 그를 체포해 참수했고, 유해를 네 마리의 낙타에 묶어 조각냈다. 자포르제 헤트만 이반 스비르고프스키도 처형되었고, 수많은 몰다비아-카자크 연합군 장병들도 피살되었다. 여기에 크림 칸국에서 몰려온 타타르인들이 몰다비아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수많은 몰다비아인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이후 페트루 6세 슈체아풀이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등극했다.
이오안 3세 첼 비테아즈는 생전에 로스토프의 공 시메온의 딸 마리아와 결혼해 아들 페트루를 낳았지만, 마리아와 페트루 모두 루스 차르국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후 호틴의 보야르인 루페아 후루의 딸 마리아 후루와 결혼해 슈테판 수르둘을 낳았다. 슈테판 수르둘은 1591년 5월부터 1592년 8월까지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를 역임했다.